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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일 Mar 28. 2018

어느날 고양이가 문을 두드렸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3년 전 겨울이었다. 아파트 뒤뜰에서 밤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집이 2층이라서 고양이의 애처로운 소리는 확성기를 튼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덜 자란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고양이 울음보다는 인간의 아기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소리 때문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소리는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곧장 나오지 않고, 그대로 깊숙이 박혀 가슴을 후벼 팠다. 문득 아파트 화단 주변에 고양이들이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배고플까 걱정이 들었다. 다음 날, 마트에서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보라색 고양이 사료를 한 봉지를 샀다. 나는 사료 봉지를 들고 화단에 갔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을 법한 장소에 사료와 우유를 섞어서 사기그릇에 담아 두었다. 다음 날 들뜬 마음으로 그 장소에 가니 사기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아에 허덕인 난민을 구원한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틀에 한번 사기그릇에 사료를 담아두기로 했다.

 한 달이 지났을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구세요”라고 불렀는데, 밖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다시 방안에 들어가서 책을 읽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다시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이 많으신 할머니가 집을 잘못 찾았거나 동네 꼬마가 장난을 치는 줄 생각했다. 인터폰 카메라로 밖을 보았다. 캄캄한 화면에 빛이 들어오면서 현관을 환히 보여주는데,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분명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는데, 소리의 근원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속으로 ‘귀신 따위는 없어’라고 중얼거렸지만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시 똑똑 소리가 들렸다. 헛것이 아니라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나는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현관문을 덜컥 열었다.


 야옹. 야옹.

 온몸이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올려 보며 울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여는 순간에도 문을 두드리려고 했었는지 오른쪽 앞발을 들고 있었고, 내가 갑자기 문을 왈칵 열면서 깜짝 놀라자 고양이도 똑같이 놀란 모양이었다. 크고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또 작게 두 번 울었다.


 야옹. 야옹.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저 고양이는 내가 준 사료를 먹은 고양이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을 어떻게 알았을까? 미행했나? 그렇다면 나는 어쩐담. 저 고양이를 키울 것인가 쫓아낼 것인가, 키운다면 집은 어떻게 만들어주지, 캣 타워는 꼭 있어야 할까, 배변 교육은 누구에게 배워하나, 죽으면 어쩌지, 등등의 생각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내가 키운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내 몸 씻는 것도 무지 귀찮은데, 내 머리 감을 때도 물로만 감는데, 고양이를 씻기고 먹이고 돌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대로 씻지 않아서 털이 뭉친 불행한 고양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고양이는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내가 신은 분홍색 강아지 슬리퍼에 호기심을 보이고 코를 들이대며 핥기 시작했다. 내 냄새나는 슬리퍼에 애정을 보이는 고양이를 차마 빗자루로 쫓아낼 수 없었다. 고양이의 행동이 너무나 귀여워서 내 마음이 바람에 놓인 버드나무 잎처럼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우유부단한 내 마음을 흔드는 바람인 것이다.  

 “어머니, 밖에 나와 보세요.”    

 나는 한 손에 빗자루를 든 채 어머니를 불렀다. 좋게 말하면 도움을 요청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어머니에게 책임과 판단을 전가(轉嫁)한 셈이다. 어머니는 나의 소란에 밖에 나와 보시고는, 내 손에 든 빗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어머니는 나와 달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놈의 고양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리 가지 못해! 썩 저리 가! 가!”    

 고양이는 어머니의 무서운 목소리와 빗자루 스윙에 뒤로 물러나다가 2층과 1층 사이 계단에 멈춰 섰다. 잠깐 물러섰지만, 인간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관망세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잘생기고 귀여운 줄 아는 아주 영악한 고양이임이 분명했다. 처음엔 인간들이 화를 내도 조금 있으면 곧 마음이 변해서 자신을 받아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빗자루를 휘두르며 돌진하였다. 관운장이 청룡도를 휘두르듯 어머니의 빗자루는 황룡과 청룡이 어울려져 춤을 추는 듯했다. 어머니의 빗자루 쌍용 봉술은 고양이의 기대를 송두리 채 분쇄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밑에는 노랑이, 삼색이, 검정고양이까지 무려 세 마리가 우리 집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얀 고양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나머지 고양이도 밀고 들어 올 작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작전 실패를 외치며 후퇴해야 했다. 고양이 사총사는 고구려의 수비에 패전한 당태종의 군대처럼 추운 겨울날 힘없이 아파트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고양이를 쫓아내고 나서야, 나는 내가 고양이에게 섣부르게 도움을 준 행동이 얼마나 경솔했는가 생각했다. 그 고양이들은 자기들에게 먹을 것 주는 인간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 인간 집을 찾아가면, 맛있는 것도 주고 잠자리도 줄지도 모른다옹.’하며 나를 간택했던 것이다.


 나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에게 준 사탕을 도로 빼앗는 어른처럼 나는 나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기대를 저 버렸다. 나의 잘못이었다. 나는 애초에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을 때, 내가 그 고양이를 끝까지 돌봐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야 했다. 기분 내킬 때 도움을 주고 결국 그들이 내게로 왔을 때, 도움 주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이 느꼈을 실망과 배신감은 얼마나 클까?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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