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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일 Oct 22. 2018

통영에 가면 이순신이 있다.

조카와 함께한 통영 충렬사 기행문

 열대야에 지쳐 자고 있는데, 다대포에 살고 있는 누나가 아이패드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요즘 태연이가 시무룩하고 기운이 없는데, 어디 데리고 놀러 가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태연은 올해 열 살이 되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조카다. 꿈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군인이 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어릴 때 꿈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자신이 가고 싶다고 해서 일곱 살부터 태권도, 유도, 검도를 배우는 것이다. 나는 조카의 모습을 보고 어린 나이에 대견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다가 몇 주 전,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검도 대련을 하던 조카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상대는 조카보다 두 살 맞은 5학년 학생이었다. 정식 대련이라면 감독이나 심판이 있어서 당연 별일 없었겠지만, 관장이나 사범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일인 듯했다. 조카는 온몸이 퉁퉁 부어서 왔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다. 다행히 병원에 가니 큰 문제는 없었고 피멍이 든 정도였다. 상대방 부모도 와서 사죄를 하고, 아이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서 반성문을 쓰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타박상도 삼주가 지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몸은 상처를 잊었지만 마음은 고통을 잊지 않은 듯했다. 조카는 그 뒤로 시무룩해졌고 검도뿐만 아니라 유도와 태권도도 모두 그만두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했다. 


 평소에 나를 유난히 좋아하는 조카의 마음에 쓸쓸한 비가 내리니, 내 마음에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막내 삼촌으로서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이 녀석을 데리고 어디로 갈까? 그러다가 퍼뜩 떠오른 곳이 통영이다. 이순신의 도시하면 통영. 수많은 시련을 견뎌내고 영웅이 된 이순신 장군의 도시를 접하면, 조카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삼촌과 여행을 도통 떠난 적이 별로 없으니 어딜 가더라도 조카가 좋아할 것 같았다. 아니다 다를까, 내가 어디 가자고 말하니 마음이 조금 풀린 듯,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따라 나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야무지게 매면서 물어보았다. 


 “삼촌.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충렬사에 가자.”

 “에게. 겨우 절이야?”

 “아니. 사당이야. 충렬사로 말할 것 같으면 사당도 그냥 사당이 아니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위대한 전투를 벌였던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지.” 

 “아. 이순신 장군님을 모시는 곳.”


 조카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나는 조카의 반응을 보고 딴 곳도 들려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어린이가 좋아하는 물놀이 시설이나 해수욕장 같은 곳 말이다. 그런데 차를 타고도 한참 동안 말없던 조카가 뜬금없이 묻는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어릴 때에도 뛰어났어?”

 “뛰어났다면 무술을 잘 했냐는 걸 묻는 거니?”

 “응.”

 “그렇다면 대답은 아니. 이순신 장군은 스물두 살이 되어서 무예를 배웠어. 그리고 서른두 살이 되어서 무과에 급제하니깐 하급 장교가 되는데 무려 10년이나 걸린 셈이야. 영재는 아닌 게 분명해.”

 “그래?”

 “그럼. 삼촌이 보기엔 네가 이순신 장군보다 더 유리해. 너는 일곱 살 때부터 무술을 배웠으니깐 꾸준히 하면 열일곱 살이면 이순신 장군만큼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지.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


 사실 나의 진심은 조카가 육사가 되냐 안 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래에 조카가 손에 든 것이 지휘봉이면 어떻고, 사진기면 어떠랴. 나는 조카가 바라는 데로 꿈을 이루면 좋은 것이다. 다만, 조카가 어릴 때부터 작은 시련에도 너무 쉽게 소망을 버리는 습관이 생기지 않을까를 걱정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있었으면 했다. 작은 시련 때문에 너무 쉽게 포기하면,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부족한 삼촌은 조카에게 좋은 모범이 되지 못하지만, 수많은 시련을 견뎌내고 이 세상을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보면, 태연에게 좋은 자극이 되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순신의 도시 통영의 충렬사로 향한 것이다.


 충렬사 주차장에 오전 11시 30분 무렵에 도착했다. 주차료 1000원을 선불로 내고 조카와 함께 충렬사로 가는 길을 걸었다. 밖은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고, 거리엔 사람이 많지 않아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 


 통영의 충렬사는 선조 39년(1606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충무공이 노량해전(1598)에서 전사한 지 8년째 되는 해, 정유재란(1597)이 끝난 뒤 9년 뒤의 일이다. 충무공의 능력을 신뢰하여 그를 초고속 승진을 시켰지만, 한편으론 충무공을 모질게 대했던 임금 선조. 선조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충렬사 앞에 당도하니 이름처럼 붉은 홍살문이 서 있었다. 홍살문에는 플래카드가 매달려 있어서 아무 사전 정보가 없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실은 아무 사당에나 있는 게 아니고, 정 2품의 신위를 모신 곳에서만 세울 수 있는 문이라고 한다. 정 2품은 현재 공무원 지위로 보자면, 장관이나 도지사쯤 되는 지위다.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건축물이었다. 이곳을 배경으로 조카와 사진을 찍고 표를 끊고 정문을 통과했다. 정문엔 세 개의 문이 한 지붕 안에 도란도란 어울려 있었는데,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이라고 하여 제사 때만 쓴다고 했다. 


 정문을 지나면 '강위'라는 조선 시대 시인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은 강한루(江漢樓)라는 누각이 있고, 그 아래로 400년 가까이 된 동백나무가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강한루로 올라가기 전에 조카에게 나무의 수령을 이야기해주었다. 조카는 공손히 나무에게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나무에게 인사를 왜 하니? 나무가 귀신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나무만큼 이 사당을 지킨 생명체도 없으니깐. 400년 동안 이순신 장군의 넋을 지키며 예쁜 꽃을 피웠는데, 이 정도 인사가 과분하겠어?”


 듣고 보니 이치가 있다. 나도 공손히 합장을 했다. 조카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강한루는 충무공의 8대손이자 172대 통제사였던 이승권이 지었다. 당대 시인 강위가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고자 중국의 옛이야기를 끌어다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강한은 중국의 지명인데, 이곳에서 주나라 소호가 적의 항복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충무공의 공이 주나라 소호에 비할 바 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이름이 '강한'이면 어떻고, '광한'이면 어떠랴. 충무공의 업적이 조선시대 내내 찬양받고 후손에게 까지 대대로 영광을 주는 것이 대단한 일이다. 최근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다루는 충무공은 고독한 인간의 모습인데, 자신이 사후에는 이렇게 영웅 대접을 받을 줄 예상했다면 조금은 즐겁지 않았을까? 살아남아서 능욕을 당하는 장수가 아니라 멋지게 죽어서 영웅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 시기하는 자가 많은 조선의 조정에서 처세하는 방법이 아니었을는지. 


 조카와 함께 강한루에 올라가 통영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강한루에 올라가니 올망졸망한 통영의 작은 도시 풍경이 보였다. 조선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마을이 잘 보였을 것이다. 죄다 흙으로 지은 초가집이고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었을 테니깐. 옛날 장수들은 이곳에서 근엄한 얼굴로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이곳에서 잠시 풍경을 즐기는데, 조카가 지루했는지 몸을 배배 꼬았다. 나는 따분해하는 태연에게 즉석으로 놀이를 제안했다.


 “태연아. 이리 와서 서봐. 아니 그렇게 말고 이렇게, 이렇게 힘차고 씩씩하게 걸어와야지.”


 내가 웃으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씩씩한 걸음을 보여 주자, 그제야 조카도 웃으며 씩씩하게 걸어서 내 앞에 섰다.


 “이제부터 네가 사령관이 되어 보는 거야.”

 “내가? 정말?”


 조카는 들뜬 음성으로 반응했다. 


 “그럼. 너 앞으로 육사생도가 된다고 했잖아. 육사가 된다면 장군이 되는 꿈도 가져야 하지 않겠어. 그럼 재미로 사령관이 되어 보는 것도 재밌지 않겠어.”

 “그래. 알았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삼촌이 충성하고 경례를 하면, 너는 구령 없이 경례만 하고, 손은 삼촌보다 먼저 내리면 되는 거야. 이렇게. 어때? 간단하지. 나머지는 삼촌이 하는 거 구경만 하면 돼. 중요한 건 네가 여기 눈앞에 수천 명의 군인이 도열해서 너를 우러러보고 있다고 상상하는 거야. 잠깐 눈 감고 상상해봐. 옳지. 옳지.”


 그리하여 나는 열 살 된 조카 앞에서 ‘받들어 총’과 ‘충성’ 구령을 외치며 씩씩하게 경례를 했다. 조카도 씩씩하게 경례를 받았다. 태연은 삼촌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경례까지 하자, 마치 자신이 사령관이 된 것처럼 즐거워했다. 


 즐거운 분위기로 강한루를 걸어 나와 전시관을 향했다. 전시관은 별 특징 없이 소박한 건물이었다. 전시관 앞에는 대포 한 쌍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명나라 신종이 진린의 건의를 받아 충무공에게 하사한 팔사품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 8종류의 15가지 물품이다. 현충사에도 팔사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곳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고 이곳에 보관된 물건이 진품이라고 한다. 나는 팔사품 중에서 붉은 비단에 파란색 글씨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는 독전기라는 깃발이 인상적이었다. 귀도와 참도라는 두 자루의 칼도 눈에 띄었는데, 귀도는 칼자루에 귀신 머리와 용머리 장식이 되어 있었다. 칼집은 오동나무로 만들었다. 한눈에 봐도 만드는데 정성이 많이 들어간 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참도는 얼핏 보기엔 평범한 칼로 보이지만, 이 칼 또한 평범한 칼이 아니다. 나무로 만든 칼자루를 귀한 상어 가죽으로 한번 감싸고 붉은 칠을 한 다음 다시 한번 소가죽으로 감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보물을 보면, 거만한 명나라 장수도 감동시킨 충무공의 인품과 공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조카는 팔사품보다는 현자총통과 지자총통과 같은 대포에 더 관심을 보였다. 사실, 팔사품은 충무공과 연관된 문화재이면서,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는 유물로 중요하긴 하지만, 실제 전쟁터에서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전에선 잘 만든 칼자루 일 만개보다 잘 나가는 대포 한 방이 더 귀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참 군인이 되고픈 조카의 눈에는 당연 실제 무기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나는 조카에게 임진왜란 때 대포의 활약과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당시 해전에서 대포는 무서운 파괴력에 비해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우선, 대포는 명중률이 많이 떨어져서 너무 멀리 있는 적은 정확히 맞추기 어려웠다. 그리고 장전하는 데 시간이 매우 걸려서, 만약에 적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도선하여 공격하면, 심한 타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특히, 일본 수군의 전법은 조총과 백병전이었다. 세키부네를 타고 상대편 배에 빠르게 접근하여 상대 함선에 기어올라 백병전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대포에 의존해서만 공격하다 보면, 되려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은 대포를 포물선이 아닌, 직격으로 쏘는 방식, 그리고 적군이 도선하기 전에 판옥선을 돌려서 반대편에 있는 대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일본군을 무찔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세키부네(지금의 순양함과 비슷함)가 가까이 근접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까지 가까웠을 때 대포를 쏘았을까?


 임진왜란 때 당시의 화포 운용 방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로 추측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수조 규식(수군 훈련용 지침서)을 보면 적선과 200보에서 250보 거리에서 화포를 쏘라고 명시되어 있다. 1보의 길이를 약 1.2미터로 봤을 때(경국대전에 영조척을 기준으로 1보는 3.8척이며, 1척은 현재 미터법으로 31.22cm이다.) 240미터에서 300미터 거리에서 쏘았음을 알 수 있다. 240미터 보다 가까운 적은 활로 이용하고, 300미터 안으로 다가오는 적은 대포로 파괴하는 전술이다. 


 “그러니깐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자신이 가진 무기의 약점을 최대한 강점으로 만든 충무공 이순신의 전술 운용 능력에 감탄해야 해.”


 나는 제법 긴 설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교훈을 짚어주었다. 조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질문했다. 


 “그런데 일본은 왜 당시에 대포를 안 썼어?”

 “아주 좋은 질문이야. 삼촌도 그 점이 이상해. 일본은 이미 네덜란드와 무역을 해서 대포 기술이 있었거든. 게다가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를 보면 왜군이 가진 총통을 노획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아마도 당시엔 대포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왜놈들. 바보네. 그렇지?”

 “그렇지만은 않아. 칠천량 해전에서는 오히려 우리나라 해군이 거의 전멸당하거든. 겨우 열두 척의 배만 남고, 원균을 비롯해 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지.”

 “이순신 장군님은 뭐했대?”

 “그때 이순신 장군은 모함을 받고 장군 자리에서 쫓겨났었거든. 세상은 원래 그래. 어느 조직이든 너무 공이 많으면 시기하는 사람이 생기는 법이야.”

 “그렇구나.”


 조카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순신 장군께 인사드리러 갈까?”

 “좋아.”


 우리는 전시관을 나와 외삼문을 지났다. 외삼문은 광복 후 우표 도안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문이다. 외삼문은 충렬사라는 현판이 걸린 키 큰 가운데 문이 돌출되어 있고, 양 옆으로 키 작은 두 문이 한 발 뒤 쳐져 서 있는 형태다. 마치 가운데에 장군이 서 있고, 양 옆으로 부관이 장군의 명을 기다리며 서 있는 듯했다. 이런 형태의 삼문을 솟을삼문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는 정문과 마찬가지로 가운데 문이 닫혀 있는데, 제사를 지낼 때는 귀신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열어둔다. 외삼문에는 6개의 비각이 있었다. 충렬 묘비명, 이언상 사적비, 직계 후손 통제사 5위의 기념비, 최숙 사적비, 이운용 기실비, 유형 유애비가 그것이다. 특히, 충렬 묘비명은 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때 이항복 선생이 지은 글을, 송시열 선생의 필체로 새긴 것으로 유명하다. 외삼문 양편에는 숭무당과 경충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경충재는 한때는 충렬서원으로 불리며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학당이었고, 숭무당은 장교 3명이 상주하면서 사당의 관리를 맡는 사무실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둘 다 회의실이나 강의실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은 눈으로만 대충 훑고 지나갔다.  


 외삼문을 지나면 조그마한 중문이 나타났다. 중문 양옆에는 키 큰 태산목이 버티고 서서 관람객을 마중하고 있었다. 중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동재가 있고 서재가 보였다. 이곳은 제사를 담당하는 곳이다. 서재의 마루에는 거북선의 모형이 있었다. 조카는 거북선 모형을 보고 무척 좋아라 했다. 내가 나중에 거북선 모형을 하나 사주겠다고 하니 뛸 듯이 기뻐했다. 


 동재와 서재를 지나면 마지막 문인 내삼문이 있다. 내삼문은 조선 중기 삼문 조형의 정화라는 평을 받는다. 외삼문은 가운데 중문이 우뚝 솟아있는 반면, 내삼문은 중문이 그렇게 튀지 않았다. 균형감이 돋보였다. 게다가 내삼문을 전경으로 울창하게 자라나는 대나무 숲을 보면 신선의 세계로 가는 문처럼 보인다. 


 내삼문을 지나면 마침내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정당에 도달했다. 사당 중앙에는 군복을 입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명조 팔사품을 그린 병풍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충무공의 얼굴은 내가 상상으로만 느끼던 인물과는 달랐다. 워낙 소설과 영화에서 고독한 인물상을 많이 다뤘던 탓일까. 내가 생각한 인물은 수심에 가득 차 있고 온갖 고난과 역경으로 얼굴에 상처가 많은 거친 인물로 생각했는데, 그림 속 충무공은 인자한 학교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매우 진지했지만 악기 한 점 없이 선했다. 만약 내가 저런 인물을 모시게 된다면 목숨을 믿고 맡길만할 것이다. 조카도 충무공의 얼굴을 보고 즐거워했다.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통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조카와 함께 인사를 드렸다. 진지하게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조카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가 났다. 


 밖에 나오니 오후 1시 가까이 되었다. 내려가는 길은 매우 가쁜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카가 활력을 되찾아서일 것이다. 


 “태연아. 이순신 장군님을 보니 어땠어?”

 “죽은 뒤에도 수 백 년이 지나서도 존경받는 거 보면 멋진 것 같아.”

 “그래. 너도 그런 사람 되고 싶니.”

 “응. 당연하지. 근데 삼촌 점심때 뭐 먹을 거야.”

 “뭐 먹고 싶은데?”

 “팥빙수.”

 “그건. 밥이 아니라 후식 아냐?”

 “뭐든 배부르면 되는 거지. 뭐. 전술 운용에는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거야.”

 “허허. 전술 운용. 그럼. 너 육사 가는 거 포기 안 하는 거다.”

 “응. 당연하지. 삼촌은 내가 그런 일로 소중한 꿈을 포기할 줄 알았어?”


  내려오는 길에 충렬사 마당에 무궁화를 보았다. 끊임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와 조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무궁화의 기운이 조카에게 옮겨갈 것처럼 말이다. 조카도 무궁화처럼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꿈을 계속 이어가길 조용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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