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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일 Mar 14. 2019

신발은 욕이 아니지.

둘째 조카가 두 살이다. 방에서 종종 기어 다니기도 하지만 집 안팎에서 아장아장 걷기도 뛰기도 곧잘 한다. 그리고 몇 가지 짧은 단어는 말할 줄 안다.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내 거, 나도, 제발, 아니야는 분명하게 발음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ㄴ'받침과 'ㅇ'받침은 발음을 전혀 하지 못하는데, 아마도 조음기관이 미성숙해서 일 것이다. 

  둘째 조카는 형을 혀아라고 부른다. 첫째 조카는 그런 동생이 귀여워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만 오면 낮잠 자는 동생을 일부러 깨워서 놀곤 한다. 조카의 엄마는 잠자는 동생을 못 깨우게 하지만 첫째 조카는 꾀가 많다. 

“안 깨울게.”

 라고 말하고는 일부러 동생이 잠든 방에 들어가서 문을 세게 '쾅' 하고 닫고 나가는 것이다. 둘째 조카도 형이 자신을 깨우는 것이 싫지 않다. 오히려 활동적인 형과 노는 것이 즐거워서 오후에 낮잠을 자다가도 형이 아직 안 왔는가 싶어 종종 잠을 깨곤 한다. 둘째 조카는 형과 오래 놀면서 점차 형의 성격을 닮아서 가장 좋아하는 일은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다. 요즘은 미세먼지가 몹시 심해서 엄마, 아빠의 만류로 외출을 못하지만 육안으로 봐도 공기가 깨끗한 날이 더러 있다. 둘째 조카는 매일 다대포 14층 베란다에 서서 날씨가 좋은지, 흐린 지 관찰하다가 하늘과 바다가 사파이어 빛으로 빛나면, 엄마에게 막 달려가며 외친다.   

“엄마! 나가! 나가!”

 그러면 그들의 엄마는 밖이 아직 추워서 안된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PM2.5의 초미세먼지가 있어서 안된다거나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반대한다. 둘째는 엄마의 얼굴을 그 크고 순수한 눈으로 진지하게 바라보며 엄마의 말뜻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안된다는 말만 알아들을 뿐 안 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둘째는 아빠에게 달려간다. 

“아빠! 아빠! 나가! 나아가!”

그러면서 다시 그 크고 순수한 눈을 말똥말똥 뜨며 아빠의 약한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아빠는

“그래. 가자.”

하고 쉽게 외출을 승낙한다. 우리 시대의 좋은 남자란 지난 저녁 과음해서 몸이 피곤해도 자신의 아들이 원한다면 밖에 나가서 놀아주고 싶은 존재로 정의된다. 조카는 자신의 자그마한 옷장 문을 열어 자기 외투도 알아서 꺼내 입고, 아빠, 엄마, 형에게 양말까지도 갖다 준다. 정말 부지런하게 친절하다. 그런데 미스터리한 일은 아직 신발은 스스로 신지 못한다. 


 그날도 둘째 조카는 제일 먼저 나갈 준비를 마치고 신발장 앞에 혼자 서있다. 아빠와 엄마는 아직 외투와 모자를 꺼내 입는 중이고 자신 혼자 오도카니 신발장 앞에 기다리려니 심심하고 지루하다. 그때 둘째가 외친다.

“엄마! 시발!”

순간, 집안에는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마치 모든 공기가 밖으로 다 빠져나가서 진공상태가 된 느낌이다. 그리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조카가 말한 단어의 정체는 신발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둘째 조카의 발을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조카가 놓인 공간을 이동시켜주는 조력자였고,  조카의 모험 욕구를 해결해주는 헤르메스의 탈라리아(talaria, 그리스 신 헤르메스가 신고 다니는 날개 달린 신발)였다. 엄마가 둘째의 말뜻을 알아듣고 웃으며 대답한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신발 신겨줄게.”

 하지만 엄마가 화장하는 모습을 본 둘째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한다.

 둘째는 다시 아빠에게 부탁한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시옷 발음이 더 강하다. 아마, 처음 시발을 발음한 뒤로 자신감을 얻은 탓일 것이다.  

“아빠! 씨발!”

그때 외출 준비를 마친 첫째 조카가 신발장에 다가가며, 조금 짜증 나는 말투로 말한다. 

“너는 왜 밖에 나가는데 욕을 하는 거야!”

둘째는 형이 말을 하며 다가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구세주를 발견하고 크고 맑은 눈으로 큰소리로 외친다. 

“혀아. 씨이이 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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