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 – 고려궁지 – 용흥궁 –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 소창체험관
지형적으로 강화도는 외부 문물이 빠르게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생산된 물산을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이나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까지 가장 빠르게 운송하려면 수로를 이용해야 했고, 강화해협을 지나야 했다. 청나라는 물론 미국과 프랑스도 모두 강화해협을 통해 육지로 접근하려 했고, 전쟁을 일으켰다. 굴곡진 역사를 써내려가는 사이 강화도에는 새로운 문물과 지식이 빠르게 전해졌고, 그것을 토대로 광복 이후 산업이 발달했다. 그 흔적을 찾아 원도심으로 향했다.
몽골이 침입하자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기고 몽골군의 2차 침입에 대비해 3중으로 성을 쌓았다. 가장 먼저 강화도 동쪽 해안선을 따라 외성을 쌓고, 궁궐을 중심으로 내성과 중성을 쌓았다. 고려궁지와 원도심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바로 당시 쌓은 내성으로, 성곽 길이가 7.1km에 이른다. 고려궁지 왼편으로 난 오르막 길을 오르면 내성의 북문인 강화산성 진송루에 닿는다. 북문 너머 성곽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해 붙여진 이름이다. 성곽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 제법 가파른 경사길을 올랐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질 무렵 백발의 신사가 날쌘 걸음으로 앞지르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힘들지 않느냐 물으니 매일 걷는 산책하는 코스라 힘들지 않다고 답한다. 노신사를 따라 정상에 도달하니 평평한 터가 나온다. 북장대가 있던 곳이다. 장대란 전쟁 시 군사지휘에 용이하도록 설치한 장군의 지휘소인데, 평시에는 성의 관리나 행정 기능을 수행했다고 한다. 북장대에 서니 강화 원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북한까지 보인다.
고려궁지에 들렀다. 강화 천도 후 궁궐이 있던 자리다. 규모는 작지만 개성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으며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과 화친 조약을 맺고 개성으로 환도할 때 몽골은 강화도에 지은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할 것을 요구했고, 39년동안 국가의 중심이었던 궁궐을 부쉈다. 조선조에 들어 유수부 건물과 민가가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 역시 거의 사라졌다. 조선시대에 지은 건물도 병인양요 때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강화 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이방정, 외규장각 등만 남았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였지만, 조선시대 강화도는 유배지였다. 고려궁지 아래쪽에 위치한 용흥궁은 강화도령 철종이 왕이 되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다. 철종은 회평군 옥사에 연루돼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돼 학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원왕후의 명으로 한양으로 돌아왔고, 나무꾼에서 조선의 왕이 된다. 행랑채를 갖춘 용흥궁의 구조는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처럼 살림집 형태로 소박하고 정겹다. 미디어에 묘사된 것보다 풍족한 유배생활을 했나 싶었는데, 원래 초가집이었던 것을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기와집으로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내전과 외전, 별전 1동씩 남아 있으며, 궁 안에는 철종이 살던 곳을 알려주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궁 위 언덕에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강화성당은 1900년에 지은 한국적 기독교 교회건축물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이다. 하늘에서 보면 성당 터가 배 모양을 닮았는데,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외형은 전통 한옥 고건축 기법을 따랐으나 중층 구조로 지었다. 내부는 더 독특하다. 1층 부분에 전실과 퇴실을 배치하고, 기둥을 세워 바깥 쪽에 회랑을 만들었다. 기둥 안쪽의 중층 부분에는 지성소와 회중석을 배치했는데 유리창을 통해 자연채광이 들어오도록 설계하는 등 서양 교회의 전통건축 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지금도 주말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최근에는 한국적인 매력이 가득한 스폿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용흥궁 주차장 출구 앞에는 살짝 기울어진 낡은 굴뚝이 있다. 예술 작품인가 싶어 가까이 가니 푯말에 삼도직물을 기념하며 남긴 조형물이라고 적혀 있다. 삼도직물은 1947년부터 2005년까지 운영됐던 섬유회사로, 한때 강화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큰 기업이었다. 강화도에서 직물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직기가 개량되면서부터다. 1920년대에는 재래식 직기로 면직물과 견직물을 생산했고, 해방 전후로 강화읍에 공장형 직물산업이 발달했다. 1970년대에는 삼도직물을 중심으로 60여 개의 크고 작은 직물공장에서 다양한 직물을 생산했는데, 1970년대 중반 이후 합성섬유 중심으로 직물산업의 흐름이 바뀌면서 대구로 산업의 중심이 옮겨갔다. 그렇다면 왜 강화도에서 직물산업이 발전했을까. 답을 찾아 소창체험관으로 향했다. 소창체험관은 1938년 지어진 한옥과 염색공장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강화 소창 역사에 대한 해설은 물론 직물공장의 옛 전경, 소창 제조 과정, 소창으로 만든 각종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운 좋게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강화도에서 직물산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문화해설사는 흥미로운 답변을 내놓았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우선 강화도는 지리적 요건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지리적 요건 덕분에 신문물과 신기술이 빠르게 전해졌다. 덕분에 직물 짜는 기계가 수동식에서 기계식으로 바뀌는 과정 또한 다른 지역보다 빨랐다고 한다. 또한 강화도에는 여성 인력이 풍부했다. 우리나라에 전쟁을 겪지 않은 지역은 없지만, 강화도처럼 모든 시대에 걸쳐 전쟁을 겪은 곳도 드물다. 전쟁이 발발하면 성인 남자는 군역으로 동원됐고, 그들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 확률은 매우 낮았다. 때문에 여성의 생활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1930~1960년대 강화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여성 보부상이 있었다. 조선의 여성 캐러반인 이들은 각 가정과 직물공장에서 만든 직물을 지고 전국을 누볐다. 한번 집을 떠나면 돌아오기까지 2~3달이 걸렸고, 많게는 1년에 4번까지 장사를 하러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 강화도와 김포를 연결하는 다리가 놓이고,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이지면서 여성 보부상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합성섬유 공장이 들어서면서 강화 직물산업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강화외성을 돌아보고 온 후라 지리가 도시의 운명 뿐 아니라 여성들의 삶을 바꿨다는 얘기가 꽤 설득력있게 들렸다.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에 가면 보다 자세한 직조 과정을 볼 수 있다는 문화해설사의 말에 바삐 걸음을 옮겼다. 동광직물은 1960~1970년대 강화 직물산업의 부흥기를 함께한 직물공장이다. 한때 20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번창했으나 직물산업 쇠퇴와 맞물려 폐쇄됐고, 방치됐던 것을 강화군에서 매입해 직조기와 북카페, 체험관 등을 갖춘 문화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우리나라 근대 직물산업을 한눈에 돌아볼 수 있도록 전성기 공장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기기를 설치작품처럼 전시하고 있다.
풍수지리가 가장 좋았던 터는 한 나라의 궁궐이 되고 도읍이 됐다. 역적 낙인이 찍혀 유배됐던 강화도령은 나라의 왕이 됐고, 배척 받던 외국 문물은 우리네 전통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근대 이후 산업의 흐름과 여인의 삶에도 지리는 영향을 줬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지점, 그 좁은 해협은 강화도에 빛과 그림자를 새겨 놓았다. 강하고 큰 빛이 들어 영광의 시대를 보냈고, 그만큼 짙은 그림자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원도심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어두운 색의 실 없이 아름다운 양탄자의 무늬를 만들 수 없다’던 소설가의 말이 떠올랐다. 짙게 드리운 강화의 그림자에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오늘의 시간은 어떤 색의 실로 기록될까,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Info.
강화 원도심 고려도성 도보해설 투어
고려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무료 투어 프로그램. 네이버(https://booking.naver.com/booking/12/bizes/319241)로 예약하거나 현장에서 신청할 수 있다. 코스는 용흥궁에서 시작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3.1운동기념비, 고려궁지, 노동사목 표지석, 이화견직 담장길, 김상용순절비까지 돌아보고 심도직물 굴뚝 앞에서 끝난다. 약 80분 소요.
[르무통 X 강화도] 시리즈 작가 소개
이미선
다양한 형태의 글을 쓰는 용역 라이터.
여행 매거진 <KTX Magazine>과 <AB-ROAD>를 거치면서 최근에는 주로 여행에 대한 글을 쓴다.
과거에는 여행하면서 감정을 메모로 남기는 것을 좋아했는데,
여행이 업이 된 후에는 여행지의 소리를 녹음하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