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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Dec 15. 2023

[르무통 X 강화도] 해안 성벽을 따라 거닐다

전등사 - 덕진진 – 광성보 – 강화외성 – 연미정



섬 여행은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길의 끝에서 바다가 기다린다는 설렘이 있는데, 김포와 마주보고 있는 강화도 동쪽은 해안선을 따라 철벽 같은 성벽이 이어진다. 섬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인 강화나들길이 정비되면서 여행하기 좋은 섬으로 분류되지만, 동쪽 해안의 강화나들길은 성벽을 따라 걷거나 성벽을 올려다보며 걷게 된다. 총도 포도 없던 시절, 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최소한의 방어는 성을 쌓는 것이었다. 높고 가파른 성벽은 강력한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강화도 곳곳에서 마주한 성벽에는 치열했던 섬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동트기 전 전등사의 고요

조금 특별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동트기 전 전등사로 향했다.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 안에 자리잡은 사찰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삼랑성의 정확한 축조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국시대 석성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하니 그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정족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삼랑성은 네 방향에 문이 있지만, 문루가 남아 있는 것은 남문이 유일하다. 전등사의 일주문을 대신하는 삼랑성 남문 정해루를 지나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 대조루를 통과해 절집에 들어서니 단청이 벗겨진 대웅전이 보인다. 3칸짜리 아담한 집의 처마 끝이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하고 있다.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가람을 배치한 전등사는 대웅전 옆으로 향로전과 약사전, 명부전이 나란히 섰고, 뒤쪽으로 극락암과 취향당, 삼성각이 들어섰다. 모든 건물은 대조루를 향하고 있는데, 개간사업이 진행되기 전까지 산자락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대조루에 앉아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사이 해가 떠오른다. 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멀리 섬 같은 산 등성이 사이로 바닷물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동트기 시작한 고요한 전등사 / 단풍길을 따라 신고 걸은 르무통 버디(옐로우)


천년 고찰이 품고 있는 이야기

전등사에 가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웅전 처마 아래서 네 귀퉁이를 이고 있는 벌거벗은 원숭이 상이다. 벌을 서듯 처마를 받들고 있는데, 대웅전을 지은 도편수와 그를 배신한 여인의 설화가 전해진다. 지붕의 막새기와 연봉오리를 닮은 도자기도 특별하다. 기와에 정을 박고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장식인데, 조선백자로 만들었다. 양산 통도사와 영주 부석사, 그리고 전등사에서만 볼 수 있는 장식이다. 대웅전 안쪽의 기둥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이름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맞서 싸운 양헌수 장군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새긴 조선군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당으로 나와 대웅전을 향해 서면 왼쪽 산자락 아래 공터가 눈에 띈다.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고, 풍수지리에 따라 지은 가짜 궁궐이 있던 자리다. 궁궐 모형은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주춧돌과 집터만 남아 있다. 전등사를 감싸 안은 산 위쪽에는 삼량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랑성으로 가는 길에는 정족사고가 있다. 사고란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을 말한다. 이곳에 <조선왕조실록>과 왕족의 족보를 보관했었다.


덕진진에서 바라보는 강화 바다

강화도 동쪽 바다에 새겨진 이야기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는 짠 바닷물이 강처럼 흐른다 해서 ‘염하’이라 불리는 강이 흐른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은 예로부터 조기와 민어, 밴댕이, 젓새우 등으로 유명한 황금어장을 형성했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생산된 물품은 배에 실려 염하를 지나 육지로 전달됐다. 중국과 일본 등 인접한 국가에서 오는 배도 모두 이 지역을 통과해야 서울에 닿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강화도는 외세의 침략이 잦았다. 섬 곳곳에는 지금도 전쟁과 항쟁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안가를 따라 세워진 돈대와 성벽이다. 전등사 대웅전 안 나무기둥에 새긴 조선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도 동쪽으로 향했다.

강화도 동쪽 성벽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하자 고려의 무신정권은 강화를 임시 수도로 삼고 몽골에 항전했다. 1232년 강화로 천도한 고려는 몽골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궁궐과 궁궐을 둘러싼 내성을 쌓고, 동쪽 해안에는 외성, 그리고 도읍을 둘러싸는 중성을 쌓았다. 1270년 몽골과의 화의로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요구에 의해 강화도에 설치된 고려 궁궐과 성곽은 모두 헐렸다.

조선시대 강화도는 임금과 조정의 피난처이자 실록과 왕실의 서적을 보관하는 보장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연미정에서 굴욕적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산성 남문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관리와 여인들이 청군에 항거하며 순절하기도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효종은 군사력을 기르고 성과 무기를 정비했다. 이때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군사시설인 진과 보가 설치됐다. 숙종 때는 진과 보에 소속된 돈대와 포대를 구축하면서 강화는 점점 전략적 요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아무리 튼튼하게 쌓은 성도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강화도는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초지진은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됐고, 덕진진 역시 신미양요 때 미군 해병대에 점령당하면서 홍예문만 남기고 모두 파괴됐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되자 보다 체계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광성보 역시 미군 포격으로 초토화됐다. 조선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이어 패배했다.


바람따라 펄럭이는 덕진진 깃발


복원되고 보수된 역사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는 물론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을 모신 신미순의총 등을 품고 있는 광성보로 향했다. 잘 조성해 놓은 해안 공원처럼 광성보의 인상은 포근하고 너그럽다.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암반 위에 설치한 용두돈대에 이르자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거세다. 광성보 바로 아래는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최단거리인 손돌목인데, 물살이 세 접근이 어렵다고 한다. 초지진부터 성벽을 따라 광성보까지 오면서 ‘투수가 공을 던지면 닿을 것 같은 거리’라며 농담처럼 말했는데, 돈대 끝에 서서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찔하다.


오두돈대로 향하는 길 / 느티나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연미정


광성보를 나와 오두돈대 방향으로 가다 보니 새로 강화외성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구간이 나온다. 강화외성은 고려시대 토성으로 지어져 후대에 몇 차례 보수되고 보완되면서 석성으로 바뀌었는데, 성벽 위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뿌리가 단단한 돌 틈 사이를 파고들어 돌덩이를 밀어내고 속살을 보여준다. 자칫 위태로워 보이지만 나무 뿌리가 흙을 단단하게 잡고 있어 더 이상 성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다. 오두돈대 주변에서는 벽돌로 개축한 성벽이 있는데, 이는 벽돌을 섞어 지은 수원화성보다 50년 이상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초지진에서 시작된 강화외성은 북쪽의 적북돈대까지 이어진다. 적북돈대는 현재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에 위치하는 데다가 복원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기에 강화외성을 둘러보는 것은 월곶돈대가 있는 월곶진에서 멈춘다. 월곶돈대 안에 들어서니 단정한 누각과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누각의 이름은 연미정,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한 줄기는 서해로 다른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돈대 앞 물길이 제비꼬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미정 아래에서 느티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니 갯벌 위에 새겨진 물자국이 포개진다. 누각 너머로는 북한이 보이고, 돈대 너머로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바라보되 닿을 수 없는 거리, 손돌목돈대보다 거센 바람소리가 사위를 채운다.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손돌목 돈대 / 겨울 산책길 발을 포근하게 해준 르무통 코지(아이보리)


시간의 지층 위로 더해지는 새로운 이야기

초지진에서 시작된 강화외성은 북쪽의 적북돈대까지 이어진다. 적북돈대는 현재 민간인 출입 금지 지역에 위치하는 데다가 복원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기에 강화외성을 둘러보는 것은 월곶돈대에서 멈췄다. 월곶돈대 역시 오랫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다가 2007년 4월에 개방됐는데, 한때는 검문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해야 출입할 수 있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북쪽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경고도 들었다. 종종 들리는 흉흉한 소식에 잊고 지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세상은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침략자에게 쉬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던 역사를 따라 강화도 동쪽 해안을 여행했다. 오래된 시간이 딱딱하게 굳어 지층을 이룬 탓에 낡은 성곽 하나도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우리는 시간을 볼 수 없지만, 시간에 의해 달라진 것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다. 강화도의 시간 역시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밤낮없이 경계가 삼엄했던 돈대는 사방이 트인 전망대가 됐고, 높게 쌓은 성벽 바깥으로 근사한 바다 산책로가 이어진다. 물길 따라 쉼 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지는 길이니 다음 여행에는 다른 이야기로 채울 수 있길 바란다.


Info.

돈대란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의 관측시설이자 방어 시설이다. 조선시대 강화도에는 돌로 쌓은 돈대 53개가 설치되었는데, 강화대교 남단의 갑곶돈대는 1679년에 완성된 48개의 돈대 중 하나다.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이었는데, 내부에 강화전쟁박물관(032-930-7077)이 있어 시대별 관련 유몰과 강화중성 건설모습, 초지진 교전 장면 등을 연출한 디오라마 등을 볼 수 있다.





[르무통 X 강화도] 시리즈 작가 소개

이미선


다양한 형태의 글을 쓰는 용역 라이터. 

여행 매거진 <KTX Magazine>과 <AB-ROAD>를 거치면서 최근에는 주로 여행에 대한 글을 쓴다.


과거에는 여행하면서 감정을 메모로 남기는 것을 좋아했는데, 

여행이 업이 된 후에는 여행지의 소리를 녹음하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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