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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Dec 07. 2023

[르무통 X 경주] 남산에 마음 한 쪽을 내려놓다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 - 탑곡 마애불상군 - 동서삼층석탑 - 서출지



두세 번 경주를 찾다 보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남산을 향하게 된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기웃거리며 부처며 탑을 찾는다. 그러면서 거기에 신라인의 진심과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황룡사지와 대릉원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감은사지 지나 감포를 찾으며 경주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여러 번 경주에 오가다가 어느 날 결국 남산엘 가게 됐다. 신발 뒤축이 닳도록 남산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경주를 사랑하게 됐다.

남산은 신라 서라벌의 진산이다. 왕이 살았던 서라벌 궁성인 월성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남산이라 불린다. 높이가 500미터도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깊다. 남산에 깃든 나정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나며 신라의 역사가 시작됐고, 남산의 그늘 드리운 포석정에서 신라는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신라는 역사의 처음과 끝을 남산과 함께 한 것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월성 산책길


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부처

자, 이제 본격적으로 남산으로 가 보자. 남산은 불국토를 이루려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긴 산이기도 하다. 절터 122곳, 석불 80좌, 석탑 61기가 남산 전역에 흩어져 있다. 남산의 웬만한 바위는 불상 아니면 탑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남산은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남산만 제대로 보려고 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린다. 


야외 박물관 느낌이 나는 남산의 바위


남산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코스가 삼릉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누워있는 능이다. 삼릉을 지나면 계곡을 따라 금오봉에 오를 수 있다. 삼릉골에는 모두 10기가 넘는 부처가 있다. 먼저 석조여래좌상과 만난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사 끈과 옷 주름까지 생생하게 새겨져 있고 당당하게 앉아 있다. 하지만 머리가 없다. 동국대학생들이 처음 발견했을 때는 땅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상은 어떤 표정으로 앉아 있었을까. 


석조여래좌상에서 10분쯤 더 어르면 계곡 건너 왼편에 선각육존불에 닿는다. 커다란 두 개의 바위에 여섯 불상을 음각했다. 석조여래좌상을 지나면 상선암에 닿는다. 바로 위에는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앉아 있다. 삼릉골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높이가 7미터에 달한다. 

좌상을 지나 금송정터를 지나면 금오봉 정상의 바둑바위다.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단다. 경주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여기까지가 삼릉 코스다.


걸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과 남산 탑곡마애불상군이다. 불곡은 이름 그대로 ‘부처 골짜기’다. 골짜기를 따라 난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바위 속 숨은 부처님이 어떤 신비로움처럼 불쑥 나타난다. 넓고 높은 커다란 바위에 깊이가 1미터나 되는 석굴을 파고 그 속에 여래좌상을 조각했다. 그 높이는 1.5미터 정도 되는데 두 손을 소맷자락 안에 넣고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 살짝 숙인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꼭 할머니 같다고 해서 ‘할매 부처’로도 불린다. 남산에 있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부처님이다.


오솔길 한 편에 위치한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 산책길에 함께한 르무통 메이트(블랙)


남산의 부처님들은 대부분 이렇다. 화려한 장식 같은 건 없다. 하나같이 못나고 투박하다. 그래서 더 정겹고 반가운 독특한 부처님들이다. 그 앞에서 뭔가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기보다는 그냥 마주 보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부처님, 요즘 좀 힘드네요.’ 이렇게 투정이라도 부리다 보면 답답한 마음 한구석이 뚫리고, 어지러운 삶의 타래가 조금은 풀릴 것 같기도 하다.


이곳에서 탑곡마애불상군이 지척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 유적 중 가장 많은 조각이 새겨져 있다. 높이 10미터, 둘레 40미터의 가장 큰 바위를 부처 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 사면에 여래상과 보살상을 비롯해 비천상, 나한상 등 33명의 부처님을 새겨 서방정토를 그려 넣었다. 


햇빛이 드리워진 탑곡 마애불상군


라오스와 미얀마, 부탄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모든 생활은 불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 스님들에게 공향을 한 다음에야 그들의 아침을 먹었고, 일을 마친 후에는 탑에 들러 향을 피운 후 집으로 돌아갔다. 신라인들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밥을 먹고 일을 하는 모든 순간, 모든 일이 부처님의 자비로 이뤄진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호미질을 하다가 허리를 펴고서는 남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골짜기 어디에 있을 부처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불천탑의 남산, 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부처이고 신라인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 경주에 가시거든 남산에 올라보시길. 꼭 올라보시길.


남산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곳

수려한 모습이 돋보이는 남산동 동서삼층석탑

남산동 동서삼층석탑과 서출지는 함께 돌아볼 만하다. 동서삼층석탑은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서로 다른 양식의 두 탑이 쌍탑을 이루고 있는데 그 조화와 균형미가 예사가 아니다. 쌍둥이 탑을 지나면 남산동 입구고 여기에 서출지가 있다. 영화 ⟨신라의 달밤⟩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서출지(書出池)는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21대 소지왕이 까마귀를 따라 이곳에 왔다가 연못에서 나온 노인으로부터 쪽지를 받고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여름날, 연꽃이 피고 연못 주변의 배롱나무가 꽃을 활짝 피울 때 가장 아름답다. 연못 서북쪽에 정자 이요당(二樂堂)이 들어서 있다.


남산 여행의 마지막은 포석정지다. 통일신라 헌강왕 때는 태평성대로 꼽힌다. 포석정은 이때 만들어진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왕의 연회 장소였다. 유상곡수연은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오는 동안 시(詩)를 지어 읊고,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는 유희다. 지금 정자는 사라졌고 물길만 남아 있다. 물길 모양이 전복을 닮아 ‘전복 포’(鮑)자를 쓴다. 물길은 약 22미터다.  

헌강왕 시절의 짧은 태평성대가 끝나고 37대 선덕왕부터 56대 마지막 경순왕까지의 신라는 격변이었다. 한순간도 왕권이 안정된 적이 없었다. 신라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그 사이 지방 호족이 득세하고 구예의 태봉과 견훤의 후백제, 고려 등을 잇달아 건국했다. 그렇게 경순왕 때에 이르러 신라는 결국 멸망했는데, 그때 경순왕은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역사는 조금 다르게 포석정을 조명하고 있기도 하다. 포석정 인근에서 제사용품이 대거 발굴되었는데, 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연회가 아니라 왕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고 나름 설득력도 얻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포석정은 신라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장소임에는 분명하다.


조금은 쓸쓸해진 마음을 안고 포석정을 나온다. 어느새 해가 뉘엿하고 그림자가 길다. 나는 대릉원 방면을 한 번 바라보고 남산 방면을 돌아본다. 천년왕국 신라를 번성하게 했던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고,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던 부처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전복 모양을 닮은 물길 흔적, 포석정지


오늘 저녁에는 경주를 떠난다. 나는 주춧돌을 놓아두듯 마음 한쪽을 경주 어느 곳에 둔다. 그래야 이곳을 더 그리워할 수 있으므로 기꺼이 그렇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지 않아야 할 아주 중요한 감각이 있다. 그리움도 그중 하나다. 그리움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간절해질 수 있을 것이며, 간절함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살면서 내내 경주를 그리워할 것이다. 황룡사지 빈터의 허무와 석가탑의 지극함과 남산 골짜기마다 들어앉은 부처들의 염원을 계속 궁금해하고 그리워 것이다. 해가 지고 그늘이 엽서처럼 내려오고 있다. 


- 정보: 황리단길 오스테리아 밀즈(070-7311-9007)는 고풍스러운 기와집에 들어선 정통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분위기도 맛도 근사하다. 감칠맛 가득한 한치먹물리조토가 별미. 안강할매고디탕(054-762-0352)은 다슬기탕을 잘한다. 배추, 부추 등을 썰어 넣고 들깨가루를 듬뿍 뿌린다. 천년한우(054-742-1452)는 고기가 좋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상차림비(5000원)를 내면 숯과 반찬을 가져다 준다. 서울에선 등심을 선호하는 데 비해 경주 지역에선 보통 갈빗살을 많이 먹는다. 갈빗살 이름은 같지만 평소 보던 부위가 아니다. 이외에도 채끝, 부채, 업진 등 다양한 부위가 있다. 삼릉고향손칼국수(054-745-1038)는 경주밀을 이용해 직접 손으로 밀어낸다. 





[르무통 X 경주] 시리즈 작가 소개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아주 오랜 여행자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이번 생이 약간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지금까지『밤의 공항에서』『잘 지내나요, 내 인생』『사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등을 펴냈다.

모두 여행에 관한 혹은 생에 관한 책들이다. 

『문학동네』에 시 ‘밀물여인숙’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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