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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Dec 06. 2023

[르무통 X 경주] 이제야 알게 된 아름다움에 대하여

경주 풍력발전소 - 불국사 - 석굴암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단체버스를 타고 수학여행을 왔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어느새 오십 중년이 되었다. 차를 몰아 경주 시내를 벗어나 불국사로 가는 길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아닐까.


불국사 닿기 전, 풍력발전소에 잠깐 들른다. 높은 언덕에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경주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나와 풍력발전기 아래에 서서 아득히 펼쳐지는 가을 숲을 내려다본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다 보면 어느날 문득 코앞에 겨울이 와 있겠지. 힘껏 심호흡을 한다. 달짝지근한 가을 공기가 가슴 깊숙이 가득 찬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던 경주의 풍경, 경주의 공기다.


가을 숲 전경과 함께 어우러진 풍력발전소


아름다움을 알게 될 때 어른이 된단다

불국사 가는 길, 길은 뱀처럼 똬리를 틀며 나아간다. 삼십 수년 전 풍경이 떠오른다. 희미하고 아련하다. 핸들을 돌리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여전하구나. 나이가 들면서 ‘여전하다’는 말이 점점 좋아진다. 이제는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때맞춰 어김없이 온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안다. 예를 들자면, 천 년 세월을 이기고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 봄이면 피는 벚꽃과 상강에 어김없이 내리는 서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 앞에 서면 마음이 괜히 뭉클하고 대견스러워할 수 있다면 눈을 한 번 더 맞추고 쓰다듬어 보려고 한다.


불국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불이문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오솔길이 시작된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 단풍이 짙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단풍잎이 말꼬리처럼 흔들린다. 숲길을 지나 만나는 불국사는 변한 것이 없다.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단체사진을 찍었던 청운교와 백운교도, 친한 친구들과 어깨를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던 석가탑, 다보탑도 그대로다. 대웅전 처마에 깃드는 가을 햇살의 질감이 잠자리 날개처럼 바스락거린다.


숲길을 지나 도착한 불국사 앞


불국사에서도 가장 눈길을 잡는 곳이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두 탑 만으로도 책 한 권을 거뜬히 만들 정도로 이야기가 많다. 10원짜리 동전에도 나오는 다보탑은 우리나라 탑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아름답다. 돌을 마치 나무처럼 깎아 만들었다. 사각형의 받침돌 옆으로 계단이 놓여 있고 다시 5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그 위에 팔각형, 다시 꼭대기는 원으로 돼 있다. 사각형에서 팔각형, 다시 원하는 변하는 것은 성불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불교에서 원은 완성을 나타낸다.  


다보탑은 건축 당시의 모습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원형을 알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했다 복원했는데 돌들이 남았다고 한다. 부속품이 남았다는 것은 뭔가 잘못 맞췄다는 것이다.  

반대편의 석가탑은 완벽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4:2:2의 비율이다. 2층과 3층은 크기가 같지만 탑 중간의 동판을 처마처럼 깎아 3층이 더 작아 보이도록 했다. 이런 기법은 비록 돌탑이지만 아름다운 처마의 곡선미를 느끼게 한다.


석가탑은 바위 위에 만든 탑이다. 탑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바위와 탑의 기단이 만나는 부분이 독특한 것을 알 수 있다. 바위 표면 모양을 그대로 살린 것.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의 표면에 맞게 기둥 밑 부분을 깎는 것을 ‘그랭이질’이라고 하는데 이를 탑에 쓴 것이다. 다른 나라의 탑에선 찾아볼 수 없다.


불국사에서 가장 눈길을 잡는 다보탑과 석가탑


그 시절 수학여행 때는 불국사든, 석가탑이든, 다보탑이든 별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여행을 왔다는 게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찾은 이 탑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살다 보면 나이가 하는 일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을 아는 것, 그 앞을 떠나기가 왠지 아쉬워 자꾸만 서성이고 맴돌게 되는 것도 나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나는 다보탑 앞을 한참 동안 서성이다가 석가탑을 오래도록 뱅뱅 맴돈다. 다행이다.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인생과 아름다움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언제쯤 이생에 지극할 수 있을런가

불국사를 나와 지금은 석굴암 앞이다. 석굴암은 1995년, 우리나라 문화재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국사와 함께 지정됐다. 8세기 경덕왕 10년(751년), 그러니까 신라의 정토신앙이 가장 왕성하던 때다.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와 함께 만들었다.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고,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처음에는 석불사로 불렸다.


백색 화강암으로 인위적인 석굴을 만들어 석굴 사원으로 꾸몄는데,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을 새겼고, 주실에는 본존불과 협시보살 등을 모시고 새겼다. 크다고 할 수 없는 석굴 사원이지만 사찰이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인 사천왕문, 인왕문, 대웅전, 문수전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본존불 옆으로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화려하고 격조 있게 새겨져 있다. 그 앞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의 표정은 무섭다. 사천왕상의 표정은 고집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고, 보살상은 한없이 우아하기만 하다.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석굴암 본존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석굴암만의 장엄과 신비로움을 빚어낸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유적, 예술품과 만났지만 석굴암에서는 오직 석굴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정 그리고 감동과 만날 수 있었다. 석굴암에 들어서서 본존불과 마주하는 순간, ‘아, 이런 문화재가 있다는 건 우리나라의 축복이다!’ 하고 느끼게 된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대각상’이다. 붓다께서 대정각(大正覺,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해 35세에 득도했다. 6년이라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수한 전생에서부터 석가모니는 정진해 왔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출사표는 그 결기가 무서울 정도다. “내게는 믿음과 노력과 지혜가 있다. 어찌 삶의 ‘집착’을 말하는가. 몸과 피는 말라도 지혜와 하나 된 마음은 더욱 편안할 것이다. 굴욕적으로 사느니 싸우다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고 말하며 수행에 들어갔다.


석굴암의 석가모니는 각고, 그러니까 뼈를 깎는 고통의 수행을 끝내고 마침에 깨달음에 닿은 표정이다. 눈은 반쯤 감겨 있는데, 시선은 아래를 지그시 향하고 있다. 해탈한 눈이다. 입술은 힘을 주어 다물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그 무엇도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 예전에 이 표정이 어떤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약간이나마 안다. 이 편안한 눈빛과 단호한 입술, 그리고 자애로운 표정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또 후회가 된다. 지난 세월, 질투와 치기로 가득했던 내 젊은 날이, 허투루 낭비한 나날들이 마냥 부끄럽고 아플 따름이다. 나는 왜 더 치열하지 못했고, 더 겸손하지 못했을까.


석굴암 나와 돌아가는 길, 마음 한쪽이 가을 하늘에 뜬 연처럼 가벼운데 또 다른 한쪽은 추를 달아놓은 듯 무겁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은 지극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석공은 어떤 간절함으로 다보탑을 깎았으며 어떤 애틋함으로 석가탑을 쌓아 올렸을까. 내 입술은 언제쯤에나 석가모니의 그것처럼 단호해질 수가 있을런가. 


가을 단풍이 든 석굴암 숲 속 / 최갑수 작가가 여행길에 함께한 르무통 메이트(블랙)


오십은 지천명이라고 하는데, 자기에게 내려진 인생의 임무를 비로소 알고 그 일을 굳건하게 해나갈 때라는 하는데, 여전히 흔들리며 갈팡질팡 하고 있는 한 어리석은 인생이 단풍숲 속을 걸어가고 있다. 여행과 글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왔지만, 여행을 잘하고 글을 잘쓰는 것이 좋은 인생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한 인생이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단풍숲 붉게 물든 길을 내려가고 있다. 


- 정보 : 경주역에서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성동시장이다. 600여 개의 상점들이 입점해 있고 상인도 800명에 이른다. 시장 구경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역시나 먹자골목 탐방 아닐까. 성동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먹을거리는 우엉김밥이다. 김밥에 간장과 물엿을 넣고 푹 조려낸 우엉조림이 들어간 것이 특징인데,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맛이 자꾸만 손이 가게 만든다. 뷔페골목은 성동시장 먹자골목을 대표하는 명소다. 경주사람들은 이곳을 ‘합동식당’이라고 부른다. 6m²도 안되는 작은 식당들 10여 곳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콩나물, 두부조림, 버섯볶음, 오이무침, 멸치무침, 동그랑땡, 계란말이, 불고기 등 먹음직스러운 반찬들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게다가 무한리필이다. 






[르무통 X 경주] 시리즈 작가 소개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아주 오랜 여행자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이번 생이 약간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지금까지『밤의 공항에서』『잘 지내나요, 내 인생』『사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등을 펴냈다.

모두 여행에 관한 혹은 생에 관한 책들이다. 

『문학동네』에 시 ‘밀물여인숙’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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