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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Dec 05. 2023

[르무통 X 경주] 결국 중요한 건 뭔가를 느낀다는 것

대릉원 - 오릉 - 삼릉 - 무열왕릉 - 탈해왕릉



능은 ‘사인 sign’ 같다. 능은 흡사 커다란 목소리 같다. 죽은 왕들은 도시 한 가운데 거대한 능을 만들고 그 속에 묻혔다. 능 속으로 들어가 오히려 불멸의 존재가 된다. 신라인들은 경주 곳곳에 자리한 능 사이를 걸으며 죽은 왕들의 ‘죽지 않은’ 권위를 여전히 체감한다. 그리고 그 권위 앞에서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설득당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왕들이 지키는 왕국에 소속되었다는 안온을 느낀다.

경주 시내의 대릉원과 오릉 그리고 탈해왕릉, 남산 자락에 자리한 삼릉, 동해 감포 바다의 무열왕릉은 왕국 신라의 단단한 권능과 아득한 신비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가을 새벽, 나는 탈해왕릉 에서 손뼉을 치며 체조를 하는 아주머니의 편안한 뒷모습과 푸들을 끌고 산책을 즐기는 젊은 여인의 여유로운 걸음을 보며 문득 확신이 들었다. 소나무 숲 뒤에 우뚝한 능. 그 속에서는 이런 말이 메아리치며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는 왕들이 지키는 왕국 신라다. 백성들은 걱정하지 말고 오직 삶에만 힘써라.’


위엄과 전의 그리고 용맹이 쌓인 곳

왕의 굳건한 위엄과 외적을 겨누는 서슬 퍼런 전의와 용맹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문무대왕릉이다. 경주 시내에서 추령을 지나 문무대왕릉으로 가는 길은 강대한 왕국 신라를 만나는 길이다.

가기 전, 먼저 감은사지에 들른다. 완벽한 조형미로 인해 신라탑의 전형으로 불렸던 감은사탑이 있는 곳이다. 우리 고미술사의 기틀을 마련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 ⟨경주 기행의 일절⟩이라는 글에서 “신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유적을 찾아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길러보아라”라고 했던 그 탑이다.


감은사탑은 웅장하다. 높이가 13.4미터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탑뿐 아니라 삼층석탑 중에서도 가장 크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는 감은사탑의 완벽한 조형미는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높이 3.9미터의 쇠찰주는 멀리서 보면 창처럼 보인다. 왜구를 향한 시퍼렇고 날카로운 전의가 노골적이어서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언이 가슴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동해의 어둠을 틈타 감포 바다에 상륙한 왜구는 감은사탑을 창을 든 무사로 여기고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이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세우기 시작했는데 완성은 아들 신문왕이 이룩했다. 문무왕의 위업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신문왕이 감은사라 이름 붙였다.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감은사지 3층 석탑 / 석탑으로 향하는 길에 착용한 르무통 메이트(그레이)


문무왕은 신라의 위대한 왕이다. 아버지 대의 백제 정벌(660년)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당나라 군대를 기벌포(금강하구)에서 격파하고 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대업을 마친 문무왕을 이렇게 유언했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됐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아니라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삼국사기』)


감은사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문무대왕릉은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납골이 뿌려진 곳이다. 새벽녘, 해가 뜰 때 문무대왕릉 앞에 서 보시라. 수평선 끝에서 거센 파도가 밀려오고, 반공은 갈매기들의 날갯짓으로 어지럽다. 그리고 어디선가 꽹과리와 징, 북소리가 들린다. 문무대왕릉은 기도를 드리려는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다. 

십여 년 전, 그들이 울리는 북소리와 아마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강대하면서 전의로 가득한 신라를 만나게 해주었다. 나는 해가 뜰 무렵, 핏빛으로 물들던 동해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전율에 떨었고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붉게 물들어가는 문무대왕릉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오릉과 삼릉의 평화로움 속을 거닐며

반면 오릉은 평화롭다. 대릉원과 황리단길의 떠들썩한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경주IC를 통해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만나는 오릉은 시조 박혁거세를 비롯, 남해 차차웅과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 등 4명의 왕과 알영 왕비의 능이 모인 곳이다. 신라의 문을 연 주역들이 이곳에 있다. 경주에 있는 왕릉급 고분은 무려 1,850기에 이르는데,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처럼 많은 왕릉을 갖고 있는 도시는 없다.


한적함이 느껴지는 오릉


능역에 들어서면 공원에 들어온 것만 같다. 경주의 왕릉은 다른 나라의 왕릉과 달리 닫힌 공간이 아니다. 경주의 왕릉 어딜 가나 느긋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기는 경주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오직 경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 서안의 병마용갱과는 완전히 다르다. 


남산 자락에 자리한 삼릉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누워있는 자리다. 봉긋한 능 세 개가 연달아 솟아 있다. 사실 삼릉에서 능보다 더 관심을 끄는 건 삼릉을 둘러싼 솔숲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들이 능 주변으로 빼곡하다. 소나무 껍질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고 투박하다.

서남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입구를 지나 안으로 조금만 걸어들어 가면 삼릉이 나온다. 굵은 소나무들이 있고 가는 소나무도 있다. 홀로 떨어져 푸른 소나무들이 있고 주변 풀들과 어우러져 함께 소나무들도 있다. 소나무 숲은 천년 고도 입구를 지키는 호위병 같다. 제멋대로 구불거리는 소나무들은 귀기마저 풍긴다. 

대도시 경주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목재가 필요했고 주된 재료는 소나무였다. 곧고 바른 소나무는 죄다 베어져 나갔다. 그렇게 남은 것이 이렇게 구불거리고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다. 삼릉 숲은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남은 소나무들이 자손을 퍼뜨리고 퍼뜨려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삼릉을 둘러싼 솔숲에 비치는 햇살 / 여행을 함께한 르무통 메이트(올리브그린)


삼릉 하면 떠오르는 사진작가가 있다. 배병우 작가다. 배 작가가 즐겨 찾는 소나무 숲이 바로 경주 삼릉 소나무 숲이다. 안개 가득한 그의 소나무 숲 사진은 한국미의 절정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고 2005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가수 엘튼 존에게 팔리면서 대중에게도 단숨에 유명해졌다. 지금은 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한국 사진작가의 중의 한 명이 됐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 <사색기행>에서 “이 세계를 정말로 인식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육체의 여행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자기 육체에 부속된 ‘종합적인 감각장치’, 리얼한 현실을 인식하는 그 장치를 현장에 가져가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인식이라는 것이 있다. 리얼한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리얼한 현실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일단 가서 직접 보라’일 것인데, 누군가는 이렇게 비웃을 수도 있겠다. “역시 작가란 쉬운 말을 어렵고 현란하게 푸는 사람이군” 하고 말이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쉬운 말로 해서는 하고자 하는 말이 제대로 전달이 안된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어렵게 말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고, 독자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능은 사인 같다, 능은 목소리 같다’라고 말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가서 느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일단 가보시라. 가서 능 주위를 걸어 보시라. 가면 듣게 될 것이고, 가면 보게 될 것이다. 능 앞에서 누군가는 능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권위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 크기만큼의 허무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느끼든 괜찮다. 살면서 중요한 건 뭔가를 느낀다는 것이니까.  


능 주변 산책길의 평화로운 오후


- 정보 : 감포항에서는 복어회를 맛보자. 은정횟집(054-744-8600)은 할머니가 며느리와 함께 대를 이어 맛을 내는데 특히 복어 요리로 유명하다. 복이 넉넉하게 들어간 국내산 활참복탕도 맛볼 수 있고 참복회 코스 요리도 즐길 수 있다. 경주의 먹을거리로는 쌈밥과 해장국이 유명하다. 쌈밥집은 대릉원 동편 골목 후문 쪽에 많이 있다. 이풍녀구로쌈밥(054-749-0060), 삼포쌈밥(054-749-5776)이 유명하다. 상추와 배추, 호박 등과 다양한 양념장이 나온다. 경주역 부근 팔우정 로터리에는 해장국집 골목이 있다. 해초와 콩나물, 메밀묵을 넣고 시원하게 끓여낸다. 





[르무통 X 경주] 시리즈 작가 소개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아주 오랜 여행자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이번 생이 약간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지금까지『밤의 공항에서』『잘 지내나요, 내 인생』『사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등을 펴냈다.

모두 여행에 관한 혹은 생에 관한 책들이다. 

『문학동네』에 시 ‘밀물여인숙’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전 01화 [르무통 X 경주] 마음을 따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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