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가 되지 못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일은 즐겁다. 누구의 목표도 아닌 것들이 주는 특유의 느슨함, 편안함이 있다. 그러니까 기필코 가야 하는 목적지, 기필코 도달해야 하는 점수, 기필코 완수해야 하는 과업을 빗겨 난 것들. 목표지향의 세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주는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모두가 목표하는 절벽마을 친퀘테레로 가는 길목의 항구도시 라스페치아는 딱 그런 곳이다. 뜨거운 열기 가득한 여름 한낮의 그늘, 그 아래 문득 서늘하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은 곳.
이탈리아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외국 여행객들에게 라스페치아는 목적지가 아니다. 라스페치아 중앙역에 모여든 90%의 사람들의 손에는 친퀘테레로 가는 티켓이 들려 있다. 절벽 바위 위에 세워진 5개의 해안 마을, Cinque Terre. 이탈리아어로 Cinque는 다섯을 Terre는 땅을 의미한다. 라스페치아는 아슬아슬한 절벽 위 알록달록한 건물과 그 아래 펼쳐진 바다가 있는 그곳으로 떠나는 기차가 시작되는 곳이다.
나 역시 친퀘테레 여행을 계획하면서 어쩔 수 없이 라스페치아를 여행지에 포함시켰었다. 절벽 아래 지중해가 보이는 친퀘테레 다섯 마을 안의 숙소는 너무 비쌌고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 친구로부터 인근의 라스페치아를 소개받고 숙소를 정할 때만 해도 라스페치아는 낯설었다. 이름이 어찌나 안 외워지던지 기차표를 끊기 위해 몇 번을 다시 되뇌어야 했다. 라 스페치아, 라 스페치아. 라스페치아는 그렇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 소년의 단짝 같은 존재였다. 이름과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주인공의 친구나 동료 정도의 느낌.
예상대로 트렁크를 끌며 중앙역을 빠져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친퀘테레 행 기차를 타기 위해 건너편 플랫폼으로 더 깊숙하게 밀려들어갔다. 인파에서 멀어져 중앙역사를 빠져나오는 순간 사람들과 반대방향을 선택하며 얻은 공간의 여유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살짝 펄럭일 정도의 친절한 바람을 맞으니 낯선 곳이 왠지 친숙해졌다. 부는 바람에 앞으로 쏠려 목을 감싼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목적지로 불리는 다른 곳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가한 역 앞의 작은 광장 앞에 섰다. 눈앞에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보였다.
숙소는 중앙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우버나 택시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내 두 다리로, 나의 속도로 찾아가면 됐다. 한껏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나무 아래 음수대가 분수라도 되는 듯 아이들과 비둘기들이 사이좋게 물놀이 중이었다. 나무 앞 안내표지판에 110살, 이탈리아의 기념비적인 나무 중 하나이니 훼손해선 안된다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110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나무 그늘 아래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목적지가 없이 단지 쉼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편안한 표정이 아름다웠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나의 다음 이탈리아 여행의 목적지는 라 스페치아가 될 거란 걸.
라스페치아가 목적지에서 비켜난 곳이라고 얘기했지만 이탈리안들에게 라스페치아는 여름, 겨울 어느 계절이든 사랑받는 휴양지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아 오히려 조용히 지낼 수 있으니 자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말발굽처럼 움푹 들어간 스페치아만은 천혜의 항구로 오래전부터 번성했던 도시였다. 라스페치아는 오래전부터 무역선이 오가고 고기잡이 배들도 가득했던 안온하고 활기찼던 해안도시였다. 현재의 라스페치아의 항구에는 무역선과 크루즈와 요트와 어선이 전부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물빛 푸른 라스페치아의 항구를 바라보면 일과 삶과 여가가 한데 진열된 것 같다. 무엇이든 선택하고 싶은 걸 고르면 된다는 듯 느긋하게 모양도 쓰임도 가지각색의 다양한 배들이 정박되어 있다.
그 풍경을 보며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이탈리아의 고등학교 교사 카타 선생님이 내준 여름방학 숙제가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가끔 아침에 혼자 해변을 산책하라는 것. 햇빛이 물에 반짝이는 걸 보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걸 떠올리라는 이야기와 햇빛처럼 행복하고 바다처럼 길들일 수 없는 사람이 되라는 당부가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인 듯 가까이 다가온다.
라스페치아라는 낯설지만 친숙한 먼 이국의 바닷가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앉아 햇빛처럼 행복하고 바다처럼 길들여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것만으로 온마음이 충만해졌다.
라스페치아는 그렇게 즐겨야 한다. 대한민국 학생들의 여름방학 숙제가 아니라 이탈리아 학생의 여름방학 숙제처럼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바라보고 많이 걷고 천천히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한적하다고 해서 라스페치아가 시골마을의 분위기를 띄는 건 아니다. 세련된 도시의 건물과 도시의 주택들이 즐비한 꽤 도시적인 느낌의 휴양지다. 낮에는 중앙역에서 시작해 바닷가까지 산책을 하고 밤에는 건물과 건물 사이 상점과 레스토랑이 모여 있는 식당가와 광장을 어슬렁 거리기 딱 좋다. 거리 자체가 쾌적하고 산뜻해서 자꾸 걷고 싶어진다. 특히 이탈리아 특유의 4, 5층 건물의 아파트 형 주택 창 하나하나를 엿보며 걷는 재미가 있다. 발코니마다 집주인의 취향이 엿보이는 꽃이며 패브릭, 야외용 가구로 장식되어 있다. 다른 이의 취향을 살피는 것도 경험이라고 생각하므로 낮 동안 라 스페치아 시내를 걸을 땐 고개가 하늘을 향해 있다. 가끔 알록달록한 빨래도 보이고 빨랫줄 사이를 지나는 구름도 만나는 시간.
걷다가 식당에서 미각을 열어준다는 식전 주 아페리티보를 한잔 하면서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즐겁다. 광장의 골목 사이를 걸으며 오렌지빛의 아페롤을 마실 것인지 루비 빛깔의 붉은 캄파리를 마실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것. 아,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이런 작은 사치를 누리는 곳이 라스페치아인 것이다. 고민하며 걷는 사이 항구에 도착한 어선에서 갓 잡은 생선이 레스토랑으로 전달되고 차양을 길게 내린 레스토랑의 부엌은 분주히 오늘의 셰프 특선 메뉴를 만든다.
라스페치아에도 여행 책자에 쓰인 지역의 볼거리가 있다.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그곳엔 중세의 건축물인 산조르조성과 대성당도 있고 해군본부가 창설되었던 곳답게 전쟁박물관과 예술과 관련된 눈길을 끄는 장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목적 없이 도착해 그저 어슬렁어슬렁 걸어야 라스페치아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공원을 가로질러 야자수가 늘어선 해안가까지, 언덕길을 오르내리고 빙글빙글 광장을 돌아야 한다. 토마토소스의 향이 곁들여진 그 땅의 기운에 몸이 흠뻑 젖도록 걷는 것이다. 인생에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 둘, 셋 끝없이 떠올리면서.
<걸음 속의 유럽> 라스페치아 산책은 르무통 스위트(폼 그린)와 함께했습니다.
원고 내 여행 코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aps.app.goo.gl/CBfiwT1JAKyNi1BN9
라스페치아를 거닐은 '르무통 스위트' 만나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