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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무통 LeMouton Sep 27. 2024

진짜 이탈리아를 느끼고 싶다면 토스카나의 깊숙한 곳으로





코로나 이후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큼직한 도시의 숙소를 구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마땅한 숙소를 구하지 못해 애가 타는 나에게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후배가 의견을 보내왔다. 꼭 관광지에 있지 않아도 된다면 자기 옆집에서 묵는 건 어떠냐고 했다. 후배는 피렌체에서 빠르지 않은 기차를 타고 50분쯤 가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옆집 주인은 연극배우였는데 오래된 큰 집을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로 허가받아 워크샵을 위해 이탈리아를 찾은 배우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있었다.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는 이탈리아의 농촌관광형 민박으로, 한적한 시골의 농가에 머물며 그곳의 문화를 경험하는 숙박 형태였다. 안 그래도 오래전 여행잡지에서 보고 인생에 한 번쯤 묵어봐야지 생각했었다. 기회는 항상 뜻밖의 상황에 찾아오는 법. 드디어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를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만약 내가 가는 날짜에 방이 비었다면 묵고 싶다고, 시차가 달라 자고 있는 후배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아침에 일어나니 후배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선배가 오는 날 마침 비어 있대요. 이곳에서 진짜 이탈리아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환영해요!” 


평화로운 폰테데라 역의 풍경


눈을 크게 뜨고 놓치지 않도록 Pontedera - Casciana T.

후배의 동네, 그러니까 나의 첫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체험 지역은 폰테데라였다. 후배는 몇 번이고 당부했다. “기차에서 가끔 안내방송을 하지 않으니 꼭 시계를 잘 보고 있어야 해요. 40분쯤 지나면 졸지 말고 내릴 준비를 하고 창밖을 잘 보는 거예요. 창밖에 Pontedera - Casciana T. 가 보이면 내려야 해요. 지나치면 안 돼.” 걱정 말라고 후배를 안심시키고 기차를 타면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디지털에 의탁한 여행은 데이터의 강도에 따라 자신감을 상실하기 쉬웠다. 갑자기 안테나 수가 줄어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굴렀는데, 시계만 보면 된다니! 폰테데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시계만 잘 보고 눈만 크게 뜨고 있으면 오케이라니. 폰테데라에 내리는 건 자신 있었다. 


그렇게 40분이 지나고 역을 하나둘 지나치니 역사 벽에 파란색으로 쓰인 Pontedera - Casciana T. 가 보였다. 짐을 챙겨 기차에서 내리면서 인간의 온 감각을 깨우는 아날로그의 정확성에 대해 감탄했다. 역은 아담하고 한가했다. 연한 땀 냄새가 나는 청소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게 전부였다. 학교를 마치고 번화가로 놀러 나가는 차림새였다. 배꼽을 드러낸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큰 가방을 어깨에 걸친 아이들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내가 그 아이들만 할 때 우리의 출발지는 역이 아닌 서점이었다.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서점은 먼저 도착해 책을 읽고 있으면 되니 조금 일찍 가도 또 조금 늦게 가도 미안하지 않은 장소였다. 어느 날 미리 도착한 서점에서 여행책을 뒤적이다가 어느 풍경을 맞닥뜨렸었다. 투명한 물빛의 하늘과 태양 빛으로 샤워를 마친 듯한 초록의 벌판, 그 한쪽으로 완만한 곡선의 길 양옆에 키가 크고 뾰족한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이었다. 아름다웠다. 화가라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림 같은 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궁금했다. 그 길을 매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한참 공상에 빠져 있다가 사진의 오른쪽에 쓰인 단어를 메모했었다. <토스카나>. 


넓게 펼쳐진 초록 벌판과 뾰족한 나무들 / 폰테데라 산책을 함께한 르무통 포레스트(화이트)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가 보이는 차분한 풍경

베스파가 태어난 곳 폰테데라 

역사를 빠져나와 기다리고 있던 후배와 만났다. 내가 예약한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후배의 옆집, 그러니까 후배의 집까지는 차로 조금 더 들어가야 했다. 차 안에서 보는 풍경은 공항에서 내려 관광지로 달려갈 때와는 다른 MBTI의 I 같은 풍경이었다. 고요하고 차분한 풍경.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 아닌 매일의 평범한 하루가 펼쳐지는 풍경. 볼 게 별로 없다는 후배의 말에 이 자체로도 그저 좋다고 대답해줬다. 창밖으로 스쿠터가 지나갔다. “아 맞다, 여기 진짜 전 세계에서 유명한 게 있어요.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펙과 오드리헵번이 탔던 그 스쿠터 베스파 알죠? 폰테데라가 베스파의 고장이에요.” 그리하여 폰테데라에는 베스파 공장은 물론 박물관도 있고 5월이면 전 세계 베스파인들이 모여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달리는 행사를 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오토바이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 깊숙한 곳까지 오는 열정이라니. 어느 한 가지에 몰두하는 사랑스러운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잠시 머물 나의 집에 도착했다. 토스카나의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는 여러 형태인데,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며 와인을 경험하는 것도 있고 이탈리아 농촌 체험을 하며 신선한 식재료로 진짜 이탈리아 가정식을 먹는 프로그램도 있다. 내가 묵은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처럼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곳은 사실 많지 않은데 나는 오히려 좋았다. 학창 시절 매료됐던 풍경 속에서 상상했던 나는 무얼 체험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경험하는 모습이었으니까. 후배의 동네는 거의 100년이 되어간다는 집 서너 채가 모여 있었고 그중 하나가 후배의 작은집, 그 옆집이 내가 묵을 집, 그 옆집은 귀여운 강아지들이 반기는 집이었고 제일 큰 집은 2차 대전 때까지 담배공장으로 사용되었다는 큰 창고였다. 



생의 아름다운 경험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세 집은 마당의 경계 없이 마치 한 집처럼 트여 있었다. 풍경을 나누지 않고 사이좋게 공유했다. 앞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건물의 뒤편으로는 작은 호숫가 옆으로 숲으로 가는 길이 나 있었다. 저 너머가 숲이라는 집주인의 안내를 받자마자 나는 경사진 뒷마당을 뛰어 내려갔다. 작은 오솔길을 지나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난 골드문트가 지났을 것 같은 그런 숲길이 이어졌다. 집 앞과 뒤 모든 풍경이 유럽 작가들의 책 속 문장들과 겹쳐졌다.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전혀 다른 풍경들이 즐비한 관광지에서의 생경함과 다른 느낌으로 익숙한 초록과 돌멩이와 흙이 마치 처음 보는 것들처럼 다가왔다. 다른 역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고 다른 삶이 있는 곳이어서겠지. 나는 꼼꼼하게 그 다른 풍경을 살피며 걸었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그곳엔 계절이 아름답게 머물렀다. 숨 쉴 수 없는 열기로 진저리 쳐지는 도시의 여름이 아닌 진짜 여름. 그늘 아래 적당한 바람이 불고, 노란 벽에 지난봄 자스민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냇가에 시원한 물이 흐르고 발치에 핀 키 낮은 하얀 들꽃이 별처럼 이어지는 여름. 그것들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토스카나 사람들의 삶도 아름다웠다. 

 

작은 호수가 있는 숲길 / 하얀 들꽃이 이어지는 들판에서의 산책 with 르무통 포레스트(화이트)


여름을 만끽하며 쉬고 있는데 이웃의 아주머니가 이탈리아에서 난다는 맛도 모양도 자두와 비슷한 매진이라는 열매를 건넸다.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 온 오렌지빛 피아스코(Fiasco)를 꺼냈다. 피아스코는 아래로 갈수록 둥글게 커지는 병을 지푸라기로 감싼 토스카나 전통 와인병인데, 이동하던 중 어느 마트에서 오렌지빛의 피아스코를 발견하고 가방에 넣어왔다. 토스카나 키안티 종류가 담긴 피아스코도 좋겠지만 왠지 노란 벽의 숙소에 오렌지빛이 어울릴 것 같았다. 테이블보를 깔고 오렌지빛 피아스코와 매진을 올려놓았다. 바람에 테이블보가 살랑살랑 춤을 췄다. 잔을 채우고 가만히 앉아 저 너머 100년 된 집과 들판과 사이프러스 나무 너머 하늘과 구름 너머를 바라봤다. 화려한 도시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경이 다정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그곳에 머물며 나는 매일 집 주변을 어슬렁대다가 뒤꼍 테이블로 가 테이블보를 깔고 피아스코를 꺼내 토스카나의 땅에서 자란 과일을 곁들였다. 그것만으로 꼭 토스카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만약 다시 토스카나를 찾는다면 또다시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에 머물 것이다. 비워두었던 고향집에 찾아온 토스카나 사람처럼 계절을 즐기고 햇살을 만끽하면서.


매진, 피아스코와 함께한 한낮의 피크닉 시간 with 르무통 포레스트(화이트)





<걸음 속의 유럽> 폰테데라 산책은 르무통 포레스트(화이트)와 함께했습니다.

원고 내 여행 코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aps.app.goo.gl/CBfiwT1JAKyNi1BN9


토스카나를 거닐은 '르무통 포레스트' 만나보기↓

벗고 싶지 않은 편안함, 르무통 (lemout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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