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타 제노바(Porta Genova F.S) 지하철역의 출구는 기차 플랫폼과 이어져 있었다. 눈앞에 완행열차로 보이는 기차가 서 있고 기찻길 너머 벽에는 어떤 자유로운 영혼이 밤마다 몰래 새겨놓았을 화려한 그래피티가 가득했다. 문득 다시 그 기차를 타고 굽이굽이 알지 못하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싶어졌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조용히 눈인사를 나누고,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보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 등장하는 소소한 이야기들 엿듣고 싶었다. 포르타 제노바(Porta Genova F.S) 역은 그런 충동이 일게 하는 역이었다. 그 역에서 애써 유혹을 뿌리치고 원래 내가 가려던 곳, 나빌리오 운하를 향해 걸었다.
포르타 제노바(Porta Genova F.S) 역 중앙광장에서 나빌리오 운하까지는 가는 길은 10여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횡단보도를 건너 길을 따라 내려가다 왁자한 소리가 들리는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면 거의 다 도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골목 입구부터 골목 바깥까지 레스토랑의 테라스석이 즐비하다. 물가까지 한두 블럭 떨어져 있지만 밀레니즈들은 오히려 그곳을 더 선호할 것이다. 관광객이 넘치는 운하 근처보다 아페리티보의 가격이 훨씬 저렴할 테니까. 실제로 나빌리오 운하를 찾았던 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유로스타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골목 입구 펍의 손님들은 대부분 퇴근 후 함께 경기를 보러 온 마을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밀라노의 밤을 걷기 위해 특별히 나빌리오 운하를 찾은 것이므로, 운하의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물 내음을 맡으며 씩씩하게 골목을 지나 아래로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마침내 물가에 다다랐고, 아치형의 다리 아래로 기다란 가로줄 같은 강물이 흘렀다. 그 가로줄 이쪽과 저쪽은 알록달록한 색색의 차양을 내린 펍들로 가득했다. 어느 펍의 한 귀퉁이 작은 무대에서 연주하는 뮤지션들의 노랫소리와 밀라노 관광지 무늬의 자석을 파는 노점상이 손님을 끄는 소리가 한데 엉켜 공기 속에 섞였다. 전 세계 각 나라에서 왔을 법한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좁은 길을 오가느라 서로의 옷자락을 스치며 사과를 하고 인사를 했다. 두오모 광장의 인파와는 또 다른 인파였다. 두오모 광장이 웅장한 교향곡이라면 나빌리오 운하는 재미있는 변주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처음엔 그 분주함에 넋이 나가 가로줄의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결정했다. 섞이려 하지 않고 정하지 않고 일단 걷기로. 운하의 끝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멀어서 끝과 끝을 걸어보겠다는 계획은 얌전히 접어 두었다. 나빌리오 운하는 밀라노 대성당을 지을 대리석을 옮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그 훨씬 전부터 있어 왔다. 밀라노는 두 강 사이에 있는 평지라는 뜻인데 스위스에서부터 내려오는 티치노 강과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에서 시작되는 아다 강의 사이에 있다. 도시 안에 강이 없던 밀라노는 오래전부터 인공수로를 만들어 교역을 해왔다. 나빌리오 운하, 즉 나빌리오 그란데와 파베제, 마르테사나, 파데르노, 베레과르도 5개의 운하가 곳곳에서 도시의 물줄기로 존재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중세 시대 알프스와 밀라노의 예쁘고 아름답고 맛있고 멋있는 것들이 그 물길을 따라오고 갔던 것이다. 이 운하들은 1970년대까지 운송용으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낭만을 전하는 잊지 못할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운하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면 알프스에 닿는 걸까, 가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일단 걸었다. 나빌리오 운하는 걷는 것만으로 기운이 차오르는 곳이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다리를 오가며 지그재그로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었고,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과 풍경들에 계속해서 감탄할 수 있었다. 물길 저 너머로 노을이 내려앉을 때 무지개 모양의 다리 위에 있었는데, 만약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면 그 자리에서 사랑 고백을 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관광객을 태운 작은 유람선을 따라 노을이 내일로 넘어가는 걸 바라보며 분명 어디선가 고백이 오고 가고 있을 낭만의 길.
그 풍경 속에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쪽과 저쪽을 오고 가며 걷다가 완전히 어둠이 쏟아지려 할 때 자리를 잡고 앉아 아페리티보를 한잔했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친구가 간단한 스낵이 나오지 않는 아페리티보는 가짜라고 했는데, 아주 간단한 과자가 조그마한 양철통에 담겨 나왔다. 10유로를 내면 칵테일 한잔에 이런저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세트 메뉴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냥 가볍게 한잔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캄파리와 아페롤을 보면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나빌리오 운하가 떠오르겠지. 아페롤 같던 오렌지빛 노을과 그 노을을 보고 캄파리처럼 붉게 물들던 마음이 다시 살아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홀짝홀짝 그들의 스피릿을 즐겼다.
진짜 어둠이 내리고 나빌리오 운하를 장식하는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무지개 모양 다리 위의 조명은 무지갯빛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조명 아래 더 행복해 보였다. 나빌리오 운하는 밀라노의 밤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웠다. 사실 한낮의 나빌리오 운하는 쓸쓸할 것 같다. 사람들의 온기가 빠져나간 노을도 조명도 없는, 문 열기 전의 놀이공원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빈티지마켓이 열리는 날에는 조금 덜하겠지. 낭만이 가득한 밀라노의 밤거리를 걷고 싶어서 찾아온 건 참 잘한 일이었다.
돌아가기 위해 포르타 제노바(Porta Genova F.S) 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현대식 트램과 구식의 클래식한 트램들이 차가 없는 도로를 춤추듯 지났다. 전깃줄을 엇갈리며 한쪽에 트램이 서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텅 빈 트램이 전깃줄을 타고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동안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과 엇갈려 역으로 들어간 나는 화려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벽 앞에 모여 있던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마주했다. 어른 흉내를 낸 모습이 자기들만의 파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둥글게 모여 선 아이들의 머리 위로 별이 쏟아졌다. 학창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각기 다른 학교로 흩어진 동네 친구들과 만나던 아지트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 머리 위로도 별이 빛나고 있었을까?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아이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너희 머리 위에 별이 빛나고 있다고. 그렇게 전해지 못한 말을 남기며 그날 밤 밀라노는 낭만으로 충만했다.
<걸음 속의 유럽> 밀라노2 산책은 르무통 메이트(그레이)와 함께했습니다.
원고 내 여행 코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aps.app.goo.gl/CBfiwT1JAKyNi1BN9
밀라노를 거닐은 '르무통 메이트' 만나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