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게 번지는 황금빛 노을과 28번 트램
오래된 그림책 같은 아름다운 리스본의 구시가
대부분의 공항은 방문객에게 까다롭다. 혹시 침입자는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입국신고서를 받는다. 어디에서 어느 만큼 머물겠다는 계획을 확인한 후에야 문을 열어준다. 그러나 리스본포르텔라공항은 까다로운 절차 없이 문을 개방했다. 절차 없이 빠져나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을 기다리며 어리둥절했다. 정말 이대로 입장해도 되는 거라고? 조건 없는 환대는 리스본의 첫인상이었다.
포르텔라공항에서 시내까지는 10km가 채 안 되는 거리로 자동차로 20여 분이면 충분했다. 공항을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 진입했고 여느 유럽과는 다른 분위기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니까 포르투갈의 첫 느낌은 오래도록 아껴 간직한 추억의 그림책 같았다. 긴 세월을 함께하며 일정하게 색이 바랜, 그러나 그림도 이야기도 읽을 때마다 사랑스러운 보물 1호 그림책 같은 느낌.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진한 색감의 도시일 거라고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지만 더 좋았다. 오히려 조금 더 편안하게 리스본에 스며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달까.
넋을 놓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우버 기사가 말을 걸었다. 한국 사람인가요? 네. 나는 브라질에서 왔어요.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일자리를 위해 브라질에서 리스본까지 왔다며 수다를 떨었다. 먼 옛날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후 두 번째로 출발한 선단이 발견했던 브라질. 침략의 역사에 희생되었던 브라질은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어를 쓰게 됐다. 언어가 같아 현대의 브라질 사람에게 리스본이 가능성 있는 유럽진출의 선택지가 되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기사는 한국인들의 명석함에 대해 잔뜩 칭찬하더니 Valeu라는 단어를 알려줬다. 고마워, 좋아, 괜찮아, 잘 가, 안녕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서 어떤 상황에서 써도 좋을 거라고 했다. 나는 내릴 때까지 그에게 발레우라는 단어의 억양과 발음을 교정받고 헤어질 때 자신 있게 말했다. Valeu!
숙소는 구시가의 중심거리 바로 다음 골목이었다. 다음 골목이어도 거의 중심거리나 마찬가지였다. 4, 5층 정도의 비슷한 건물들이 죽 늘어선 거리에 작은 레스토랑이 숙소의 리셉션이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서빙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먼 친척의 집에 놀러 온 것 같았다. 공항도 그렇고 이렇게 손님을 자유롭게 두는 여행지라니!
서빙을 마친 직원이 예약을 확인하고 레스토랑 옆 두껍고 무거운 건물의 정문을 열어줬다. 눈앞에 100년 아니 200년은 되었을 법한 나무계단이 펼쳐졌다. 설… 마. 직원은 4A호의 키를 줬는데 2층의 4번째 복도 첫 번째 방일 거라고 믿었다. 계단뿐인 건물 안 어디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었으므로, 반드시 2층이어야 했다. 그러나 모든 여행기의 전개가 그러하듯 4A호는 제일 위층이었다. 천정 높은 유럽 건물답게 계단은 올라도 올라도 끝날 것 같지 않게 이어졌다. 5초에 한 번씩 트렁크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며 그래도 가볍고 편안한 신발을 신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만약 불편하고 무거운 신발을 신었다면 나는 분명 여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니 리스본을 여행하려는 여행객들이여, 꼭 편안한 신발을 신고 숙소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확인하도록.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작가 페르난도 페소아는 리스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리스본, 여행객은 무엇을 봐야만 하는가’라는 가이드 책을 쓸 정도였다. 이 책은 <페소아의 리스본>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다. <페소아의 리스본> 첫 페이지에서 페소아는 리스본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눈부시에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쭉 늘어선 일곱 언덕 위로, 들쭉날쭉 튀어나온 다채로운 건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이룬다. – 물길로 오는 여행자들이라면 아주 멀리서라도 햇살에 금빛으로 물든 푸른 하늘 위로 떠오르는 또렷한 꿈속의 한 장면 같은 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돔과 기념비와 고성들이 주택들 위로, 이 아름답고 축복받은 도시의 전령처럼 아스라이 늘어서 있다.” 문장을 읽으며 풍경을 상상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였다.
그 전망대, 리스본을 대표하는 산타루치아 전망대는 산타루치아 성당 위에 있었다. 화려한 아줄레주가 있는 벽을 지나면 자줏빛 꽃이 흐드러진 나무 뒤로 전망대가 나타났다. 페소아의 말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치가 배경으로 펼쳐졌다. 전망대 한쪽에서는 예술가들이 모여 작은 마켓을 열고 공예품을 팔거나 버스킹을 했다. 전망대 벽에 편안하게 기대 기타를 퉁기고 노래를 하고 매듭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아름다움을 한껏 즐기는 신들의 모임 같았다. 신의 영역에 들어선 천사이길 꿈꾸며 나도 그들 사이에 서서 눈부신 광경을 음미했다. 언덕 아래 펼쳐진 붉은 지붕과 반짝이며 빛나던 푸른 물빛. 나는 오래도록 그곳에 서서 리스본에서 단 한 곳을 찾아야 한다면 이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과의 콜라보가 환상적인 리스본의 풍광을 한껏 음미하고 나는 페소아가 알려준 다음 장소로 향했다. 산타루치아 전망대와 이어진 알파마지구였다. 페소아는 알파마를 ‘이 도시에서 가장 다채로운 구역’이라고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오래된 어민 주거지는 아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리스본에 여러 날 머문다면 절대 이곳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여기 말고는 어디에서도 옛 리스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알파마의 모든 것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정말이었다. 알파마지구는 페소아가 그 글을 쓴 100년 후인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인 듯했다. 오래된 창문, 오래된 거리, 오래된 계단, 오래된 아줄레주. 그 사이사이 바다로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여인들이 불렀다는 구슬픈 파두가 울려 퍼졌다. 알파마지구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전망대가 있는 언덕의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길 권한다.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 규칙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하나씩 지나면 그들의 삶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지금은 개발할 수 없어 시들어 가는 모습이지만,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사실 알파마로부터 시작됐다. 하나둘 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언덕 위로 위로 집을 짓다가 점점 퍼져나간 것이 리스본이었다. 리스본은 걸으면 걸을수록 가까워진다. 유럽의 대도시들이 아무리 걸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호시우라고 부르는 동 페드루 4세 광장, 페소아의 단골 카페였던 아 브라질레이라와 그 근처에 있는 유럽 최초의 서점 베르트랑. 에펠이 설계한 귀여운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 전망대와 테주강과 닿아 있는 널따란 코메시오 광장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짧지도 터무니없이 길지도 않은 리스본의 구시가는 탈것이나 지도의 도움 없이 얼마든지 두 발로 나아갈 수 있다.
한참을 걷다 멈추니 산타루치아 성당과 전망대로 올라가는 시작점이었다. 그 길, S자 곡선으로 휘어진 좁은 길로 낭만을 가득 실은 트램이 지나갔다. 리스본의 주요 관광 스팟에 다 선다는 노란색의 28번 트램이었다. 좁은 거리와 양옆의 오래된 건물과 노란 트램, 꿈속의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듯한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구석구석 걷는 것이 좋아서 트램을 타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문을 닫은 상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트램을 기다렸다. 해가 지는 그 순간 온 도시를 노란빛으로 물들이며 지나가는 트램을 보며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꼭 끌어안았다.
<걸음 속의 유럽> 포르투갈 리스본1 산책은 르무통 메이트(오렌지)와 함께했습니다.
원고 내 여행 코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aps.app.goo.gl/CBfiwT1JAKyNi1BN9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닐은 '르무통 메이트' 만나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