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DJ가 다음 곡을 소개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의 끝에 Aerosmith, I Don't Want to Miss a Thing이라는 말이 들렸다. 차는 알 수 없는 골목으로 접어들며 일방통행 길을 유영하듯 빠져나갔다. 좁은 골목 오래된 건물 옆으로 젊거나 늙거나, 크거나 작거나, 진갈색 혹은 옅은 갈색 혹은 모래 색깔 혹은 100살이 넘은 떡갈나무의 기둥 색깔 혹은 치즈 색깔, 아무튼 제각기 다른 컬러의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이 유리창 앞으로 살랑이며 다가왔다. 스피커에선 밴드 에어로스미스의 보컬 스티븐 타일러가 울듯이 노래했다. I don't wanna close my eyes / I don't wanna fall asleep / cause I'd miss you baby / And I don't wanna miss a thing 운전자가 이제 곧 라 보케리아라고 말해줬다. 꿈에서 깬 듯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눈을 감지도 잠들지도 않고 똑바로 바르셀로나 뒷골목 한낮의 풍경을 마주하면서, 나는 사는 내내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이 풍경을 그리워할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어로스미스의 음악이 BGM으로 각인된 그 거리를 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노래가 끝날 무렵 차에서 내렸는데 전혀 다른 소음이 밀려왔다. 바르셀로나의 부엌 라 보케리아 시장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과 그들을 타깃으로 하는 좀도둑과 오래도록 그 시장을 지키고 있는 상인들과 원래 그곳의 주인인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다. 색색의 향신료를 파는 가게, 김치만큼 종류가 다양했던 올리브 가게, 정육코너, 생선코너, 지중해의 햇살에 선명해진 과일이 가득한 좌판. 당장이라도 소동이 벌어질 것처럼 활기찬 라 보케리아를 둘러보고, 시장 가장자리 레스토랑에서 빠에야와 스페인고추볶음 뻬트론을 주문해 먹으니 금방 카탈루냐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베리아 반도 북동쪽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의 주도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불리는 것보다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로 불리길 희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곳이다.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그곳이 바르셀로나라는 도시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람블라 거리의 끝에 대항해 시대 망망대해로 나아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동상이 서 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바닷가까지 이어진 바르셀로나의 중심인 람블라 거리. 라 보케리아에서 빠에야를 먹고 나와 람블라 거리의 시작점에서 끝까지 섞여드는 순간 바르셀로나를 압축해 경험할 수 있었다. 낮의 람블라 거리에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구호를 외치는 시위행렬이 줄을 이었는데, 이 시위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람블라 거리의 끝엔 바다가 있었다. 저 먼 곳을 가리키고 있는 콜럼버스 동상을 지나면 항구였다. 복잡한 거리를 피해 온 새들과 신대륙 발견의 시작점에 서고 싶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그 바닷가에 서 있다가 아 그래, 바르셀로나는 반도의 한 면이지 싶었다.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에 다다르니 해변에 가고 싶었다. 스마트폰 속 지도가 2km 정도 위쪽으로 걸으면 해변이 나온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7월의 뜨거운 지중해의 한낮에 걸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고 결국 다시 우버를 불렀다. 드라이브 코스가 분명할 해안도로는 차로 가득 차 있었고 2km를 걷는 만큼의 시간을 들여 해변에 도착했다. 조금 억울했지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차 안에 있었던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신발의 모래를 터는 사람들 앞에 차를 세워주면서, 이동하는 내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던 운전자는 자랑이라도 하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게 진짜 바르셀로나야!
네타해변은 바르셀로나의 사진가 요시고의 사진을 보는 듯했다. 바다와 모래의 경계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모래 위를 장식하는 색색을 파라솔. 람블라 거리를 메웠던 관광객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일상 속 쉼을 위해 떠나온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그곳이 왜 진짜 바르셀로나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틈에서 나도 잠시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적셨다. 태양의 빛을 흡수한 뜨거운 모래와 달리 바닷물은 미지근하지 않고 시원했다. 물놀이 채비를 갖추지 않아 풍덩 바다로 뛰어들진 못했지만 물이 튀어도 금방 마르는 신발 덕에 용기를 내 바다와 모래의 경계를 따라 이쪽저쪽 걸었다. 문득 생각지 못한 파도가 쏴 밀려오면 사뿐히 뛰어 물을 피하면서 진짜 바르셀로나의 한낮 풍경에 참여했다.
그리고 네타해변 모래의 열기가 식을 즈음 다시 람블라 거리로 돌아왔다. 콜럼버스 동상을 등지고 왼쪽에 있는 라 보케리아 방향을 낮 동안 지났다면 이젠 그 오른쪽을 가볼 차례. 백야로 8시가 지나도 남아 있는 빛을 따라 고딕지구로 향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까지 가는 그 길엔 아주 오래된 작은 책방이 있었고 그곳에서 어린왕자 스페인어판을 샀다. 쓸쓸할 때 해지는 걸 보러 간다던 어린 왕자의 말을 기억하며 대성당 앞의 광장으로 해지는 걸 보러 갔다. 그곳엔 이름 없는 악사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고 커다란 그러니까 내가 양팔을 쫙 펼친 길이의 나무 막대 두 개를 양손에 쥔 남자가 연신 비눗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비눗방울을 터트리기 위해 아이들이 몰려들고 그 아이들의 등 뒤에서 악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 노래 뒤로 오래된 800년 정도 되었다는 뾰족한 모양의 근엄한 대성당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성당 앞 계단에 앉아 어둠이 집어삼키기 직전의 희미하게 반짝이는 그 모든 것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I don't wanna miss a thing 정말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기다리다가 마침내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 레이알 광장을 찾아갔다. 매년 한 해에 두 달은 바르셀로나에서 머무는 친구가 반드시 어두워질 때 가봐야 한다고 했던 곳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들을 지나 아치 모양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나가 아담한 광장이 나타났다. 그곳은 어두웠지만 어둡지 않은, 작은 전구들의 불빛으로 가득했다. 광장의 끝엔 레스토랑들의 야외 테이블이 있었고, 한가운데에선 비보이들이 펼치는 버스킹이 흥을 돋웠다. 아케이드 안쪽 건물에는 Trantos라는 플라멩고 공연장이 있었는데 무용수처럼 차려입은 여자들이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레이알 광장은 비보잉과 플라멩고와 알 수 없는 흥겨운 공기가 가득했다. 여러 날 그곳에 머물며 느지막이 일어나 모든 에너지를 그 광장에서 쏟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밀려왔다.
찬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여름의 뜨거웠던 바르셀로나를 떠올린다. 태양에 빛나던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되살린다. 포슬하던 모래와 네타 해변의 윤슬, 라 보케리아를 가득 채운 선명한 색감과 열기가 가시지 않은 레이알 광장의 야경. 그 낮과 밤의 풍경을 그리워하면서.
<걸음 속의 유럽> 포르투갈 스페인 바르셀로나1 산책은 르무통 버디(옐로우)와 함께했습니다.
원고 내 여행 코스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aps.app.goo.gl/CBfiwT1JAKyNi1BN9
포르투갈 리스본을 거닐은 '르무통 버디' 만나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