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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Sep 25. 2018

어릴 적 우리는 자주 꿈에 대해 물었다. 무엇이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보다 근사한 꿈,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배짱 두둑한 아이는 대통령이 될 거라고 했다. 머리가 좋은 아이는 자신의 꿈이 과학자라고 했다. 나는... 나는 뭐라고 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른이 된 우리들은 이제 꿈을 말하지 않는다. 꿈이라는 단어는 더는 환대받지 못한다. 꿈은 저의 부박한 현실을 불만족하는 자의 실패한 언어처럼 들린다.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은 스스로 낙오를 자백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릴 적 우리가 말했던 꿈은 벌써 이루어졌어야 한다. 최소한 꿈의 길을 걷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대통령의 길을, 학자의 길을 가지 않는다. 나 또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꿈이 되지 못했다.


꿈을 이룬 유명인들의 자살 소식도 종종 들려온다. 그러한 풍문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꿈 없이 사는 우리들에게 일용할 변명이 된다. 꿈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공식의 증명이 된다. 행복하지 않은 삶의 자위가 된다.


얼마전 H를 찾아갔다. SNS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다. 난생처럼 수필 공모전을 준비하며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서 통화와 톡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사는 단양에서 그가 지내는 여수까지는 멀고 교통편도 불편하다. 쉽게 마음을 낼 만한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공모전 준비 기간 동안 살뜰히 챙겨준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마치 옆집 마실가듯 문지방을 넘었다.


H의 아파트는 5층에 있었다. 고락산 푸른 산자락을 등에 두른 스물한 평 남짓의 공간에는 여수의 맑은 바람이 드나들고 해 질 녁 빛의 알갱이가 사금처럼 떠다녔다. 그 고즈넉한 공간에서 그는 해종일 시를 읽고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태우며 책을 읽는다. 달이 뜨면 야행성 동물처럼 눈을 빛내며 글을 쓴다. 유유자적한 삶이다. 그의 일상이 마냥 부러웠다. 그러나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의 사정을 점차 알게 되면서 깨달았다. 지금 그의 무위도식적 생활이 실은 평생 악마적이었던 그의 삶이 잠시 내어준 한시적이고 위태로운 보상이라는 것을. 그에게는 너무 오래되어서 켜켜이 녹이 슨 꿈이 있다. 문학의 꿈. 그 간절한 바람은 운명의 악랄한 장난에 번번이 난파되었다. 그러나 그는 파선된 꿈의 조각들을 버리지 않았고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그 조각들을 생의 바닥에 펼쳐놓고서 파편의 귀를 하나 하나 맞춰가고 있다. 아직 등단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H는 이미 오롯이 행복해 보였다. 이제 그의 꿈은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꿈을 사는 것이고, 바로 지금 매순간 그 꿈을 살고 있는 까닭이다.


H를 보며 K생각이 났다. 내 가장 오래된 친구 K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무엇을 할 때 자신이 행복한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 K는 자주 방황했다. 삶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초조함에 자주 술을 마셨고 출구 없는 일상의 권태를 잊기 위해 얕은 연애를 했다. 그런 방탕한 일상의 반복은 우울과 절망만을 키웠으리라. 초봄의 연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안산역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체념 어린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나고 돌이켜보니 그 슬픈 미소가 전조였는데 그때의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며칠 후 K는 자살했다.


K, 너에게도 꿈이 있었다면... 네가 그 꿈을 살았다면... 그 꿈이 너를 살렸다면.


모두가 꿈을 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모두가 꿈은 이루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누구도 꿈은 사는(Live)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 괴리에서 오랜 세월 길을 잃고 헤맸다.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한쪽 벽을 짚으며 걷는 것' 어떤 미로에서든 빠져나오는 방법이라고 한다. 미로는 삶의 은유다. 벽은 꿈의 상징이다. 벽을 짚으며 걷는 것은 꿈꾸며 사는 일의 환유다. 누군가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K와 H를 떠올리며 평생 꿈을 사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고 소중한 것들, 가령 하늘, 수면에 부서지는 바람의 입자들, 구름의 낮은 이동, 비의 소리와 냄새, 해 질 녁 햇살의 알갱이, 낯선 이의 콧노래, 흩날리는 꽃잎, 노을의 계조, 부유하는 홀씨, 나비의 위태로운 날개짓, 별, 침잠하는 눈의 결정, 사막의 사구들, 한 잔의 믹스 커피, 거울 같은 호수, 여행, 여행자, 활자, 그리고 사람, 그런 것들을 관조하는 꿈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꿈은 생활이다.



부족한 글이지만 글의 저적권은 필자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류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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