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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Sep 28. 2018

깜상

길양이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는 우리집에 요즘 길양이 한 마리가 정 붙이고 산다. 정주하는 건 아니지만 오며 가며 꼭 알은체로 야옹거린다. 그럴 때 모기장 현관문을 열고 나가 화답이라도 하면 발목 근처에 제 몸을 비빈다. 처음 본 게 제법 작고 동글할 때였는데 이제는 제법 커서 소년기쯤 되어 보인다. 아버지는 그 길양이에게 '깜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유명한 노래 속 검은 고양이 네로처럼 온몸이 검정색이어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깜상이 되었다.


첫 만남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깜상과 나는 꽤 친밀해졌다. 며칠 전부터는 염색할 때 쓰는 작은 빗으로 깜상의 몸을 정성스레 빗겨준다. 그러면 깜상은 발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갸르릉거리다가 이내 좋아지는 기분을 참지 못하는지 옆으로 픽 쓰러진다. 갸르릉거림은 깜상의 몸속에서 물방울처럼 구르고, 그 진동은 플라스틱 빗을 지나 손잡이를 꼭 쥐고 있는 엄지와 검지를 통해 내 몸 안으로 그대로 전해져 가슴께에 흐뭇한 감정을 일으킨다. 빗질을 한참 해주다가 한술 더 떠 두 손으로 깜상의 어깨 주변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주면 깜상은 ‘오, 여기는 천국인가?’ 하는 표정으로 좋아 죽는다. 그런 깜상의 흐뭇한 표정과 행복감을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만지면 나도 곧 행복해지고 만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기쁨이 이런 것인가 깨닫는다.




깜상이와 꽁냥꽁냥하는 시절을 보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베푸는 태도에 사랑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깜상에게 빗질을 해주는 행동 하나에서도 그 비밀은 드러나는 듯하다. 가령 빗질을 해주는 행위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 다만 빗질을 받으면서 행복해하는 깜상을 바라보며 충만한 몽글거림을 느끼는 것, 보상이라면 그 행복감이 전부인 것, 그렇게 사랑은 사실 거창하거나 대단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이라는 사랑의 공공연한 비밀 말이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어땠는가. 인간의 사랑은 시작부터가 일단 난관이다. 출중한 외모와 화려한 재력, 게다가 단정하면서도 다정한 성격 등 기본적인 세 조건 중 최소 한 개는 충족해야 보통 사랑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나는 속물이다). 세 조건 중 하나라도 없기가 사실 어려운데, 내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매우 칭찬해) 운이든 운명이든 계산적이든 어쨌든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서로의 사랑의 크기와 진실성을 재는 밀당을 거쳐야 하고, 성격과 취향, 그리고 가치관의 다름에서 오는 지난한 다툼과 밑도 끝도 없는 오해들도 겪어야 한다, 말로는 사랑해서 다 해준다면서 주는 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는 여섯 살 아이처럼 토라져서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불안에 강박증 환자처럼 초조해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하고, 저의 비루함을 감추기 위한 말과 행동은 위선과 위악으로 치닫는다. 그런 모습에 당황하고 받아주고 화를 내고 다시 받아주고 이제는 새롭지도 않다가 다시 분개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서로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 사랑은 마치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양 허망하게 끝이 난다.


사랑인지 전쟁인지, 사랑과 전쟁인지 아무튼 그런 사랑이 끝나고, 사랑의 휴식기 동안 사랑의 실패를 곱씹다가 이내 거기서 뭔가를 배웠다고 생각해 다음에는 더 나은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의지를 다져보지만, 우리내 사랑엔 학습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사랑은 언제나 어렵고 늘 같은 수순을 답습한다. 종국에 가서 사랑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더 이상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됐을 때, "사랑 따위 개나 줘버려!"라고 호기롭게 외칠 때, 개가, 반려동물이 눈에 들어온다. 반려동물의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사랑에 넋을 잃는다.


반려동물에게 밥을 주거나 산책을 시키거나 놀아줄 때, 우리는 반려동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바라지 않는다. 언어 구사를 통한 깊이 있는 대화나 여러 지적인 사회활동을 동물과는 공유할 수 없고, 반려동물과의 생활과 행동반경이 상당히 제한적인 것도 현실이니까. 그렇지만 부르지 않아도 나에게 다가와 꼬리를 마구 흔들거나, 누워 있는 곁으로 가만히 와서 말없이 제 앞발을 괴고 누워 함께 있어 주거나, 그 우주 같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응시해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인 우리들은 무한한 감동을 느낀다.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거창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사랑을 주고, 그것이 대상 내부에 일으키는 작은 반응들에 감응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 길양이 '깜상'에게서 사랑을 배웠으니, 자 이번에야말로 다시 인간을 사랑해보자. 어떻게? 가만히 곁을 지켜주고 무한한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동물의 사랑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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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꽃]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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