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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Oct 03. 2018

도그빌

스포일러 주의

도그빌을 보았습니다. 긴 러닝타임과 독특한 형식 때문에 보기 힘들 수 있다는 지인의 말에 잠수 직전 심호흡을 하듯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았습니다만, 영화는 예상한 만큼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와 철학적인 메세지들이 담긴 대사와 나레이션을 아둔한 머리로 정신 없이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엔딩크레딧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영화의 내용과 분량 때문에 두 번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도그빌' 이 단어를 직역하자면 '견촌' 정도가 될 것입니다. 모국어에서 '견' 혹은 '개'가 대상을 모욕하고 업신여길 때 사용하는 접두어라는 건 두 말하면 사족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아버지의 대사를 통해 제목의 도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는 유추가 가능합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 'ville'에 도그가 붙었으니 '도그빌'은 주민들 즉 인간에 대한 회의론이자 비관론 그 자체일 수 있고 그래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의 축소판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이 작은 마을에는 세계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직업군이 있습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 의술을 담당하는 의사, 경제를 담당하는 가게, 유통을 담당하는 운송업자, 그리고 놀이의 영역인 예술을 담당하는 작가가 그것입니다. 한 가지 특이할 점은 종교에 관련된 시설과(폐목사관이 전부) 종교인이 없다는 점인데, 준비된 결론을 위해 종교를 통한 인간의 사후적 교화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한 듯 싶습니다. 이렇게 중생들의 사바 세계를 상징하는 제목 '도그빌'은 영화의 엔딩을 이미 어느 정도 암시합니다.




도그빌의 지형적 특징은 들어오는 길은 있고 나가는 길은 없는 폐쇄적 구조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도그빌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밀폐된 실험실처럼 여겨집니다. 일반적인 영화와 사뭇 다른 연극무대와 같은 세트가 실험실의 미쟝센을 완성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막 사이사이에서 탑뷰로 무대를 내려다볼 때는 흡사 게임화면처럼 보이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러한 연출은 이것은 실제가 아니라 가상 현실(실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효과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를 끌고 가는 전체적인 담론은 '수용'인 것 같습니다. 수용은 대상을 도덕적 윤리적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지식백과 찾아봄). 이 수용을 설파하는 인물이 작가지망생 톰입니다. 톰은 매일 같이 마을 회의를 열어 주민들에게 수용의 미덕과 도덕의 중요성 등을 주창하는 자칭 지식인이자 계몽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소크라테스의 그것처럼 예리하지 못하고 엉성하기만 합니다. 그의 어설픈 설교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마을 주민들에게조차 번번히 반박당하는 꼴이죠. 그런 톰이 자신의 주장을 주민들에게 설파하기 위한 수단은 '실제 사례'입니다. 그러나 새로울 것 없는 이 촌구석 마을 주민들의 낡은 정신을 깨부술 만한 완전히 신선한 실례를 찾기 힘든 까닭으로 톰은 하늘에서 '선물'이 뚝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선물이 바로 그레이스입니다.


그레이스의 시의적절한 출현으로 톰은 마침내 기회를 얻습니다. 그레이스를 마을 회의에 데려가 '수용'을 주민들에게 강제로 수용시키려고 그레이스를 '실례'로 이용합니다. 그렇게  2주간의 ‘그레이스 실험’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그레이스를 실험하는 도그빌 주민들을 실험하는 액자 형식을 갖춥니다. 주어가 목적어가 되고 목적어가 다시 주어가 되는 이 액자 형식은 도그빌 주민들이 그레이스의 진실성을 실험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도덕성과 양심을 폭로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2주간의 실험이 시작되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 막일을 자청하지만 마을은 이미 오래도록 그레이스 없이 잘 돌아갔으므로 그레이스가 해야할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그레이스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해 놓으면 좋은 일'을 겨우 찾아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주민과 그레이스의 관계가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레이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되면서 이전의 도그빌에 필요 없던 직업이 생겨납니다. 가정부, 간병사, 상담사, 가정교사, 공장근로자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직업군이 출현하면서 주민들의 일상에 미묘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이전에는 별로 불편함을 못 느꼈었던 일상의 상당부분을 점차 그레이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왠지 그레이스의 등장이 자본 출현의 빌미처럼 보였고, {주민 : 그레이스=고용인 : 피고용인} 이라는 자본논리적 관계에서의 인권 침해와 노동착취를 통해 자본의 민낯을 풍자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자본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인간성은 메말라가고 사회적 소수자와 경제적 약자를 향한 일상의 폭력이 난무하는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도시화의 썩은 골조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한다면 억지일까요?




아무튼 영화는 도그빌에 그레이스를 출연시키면서 인간의 본성을 실험합니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영화는 성무선악설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도그빌 주민들이 마치 '스탠포드 감옥실험'의 피실험자들이 그러했듯 환경과 상황에 따라 악화일로로 치닫는 전개를 통해서요. 그런데 과연 그레이스는 선한 인물이었을까? 그레이스 역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았습니다. 도그빌 주민을 돕는 행동들은 자신의 진실성을 인정받아 마을에 체류하기 위한 일종의 거래였고, 자신이 당한 것을 끝끝내 학살이라는 잔혹한 응징으로 보복하는 그레이스는 갱단 두목의 딸이자 악으로 기울어진 또 한 명의 도그빌 주민일 뿐입니다. 그렇게 도그빌 실험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실험에는 또 다른 피실험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말입니다. 감독은 도그빌을 리트머스 시험지로 해서 최종적으로 영화 바깥의 사람들을 연극의 관객석으로 끌어들여 실험하는 듯합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굳이 연극의 형식과 벽이 없는 세트를 취해야 했던 많은 이유들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이 연극을 불편해하는 정도에 따라 지금 당신의 성향이 염기성인지 중성인지 산성인지 판별하기 위한 실험. 푸른색으로 변한 리트머스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붉은색으로 변한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합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많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가 도그빌 같은 세계일지라도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족으로, 도그빌에 있는 개의 이름을 아시나요? 모세입니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은 모두 죽고 개만이 '모세의 기적'처럼 살아남았습니다. 도그빌의 아이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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