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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Feb 14. 2019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

내맘대로 영화 오독하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먹먹했다. 그 울림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의심-불안-분노-절망의 내밀한 감정선을 세밀하게 표현한 에밀리 블런트의 탁월한 연기와 극도의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연출과 음향 효과도 대단했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그 의문은 모호한 여운이 되어서 며칠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영화를 다시 보았고, 그제서야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웰 컴 투 후아레즈"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의 공간적 주 배경은 후아레즈인데,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위치한 이곳은 실제로 전 세계 살인율 1위를 여러 번 기록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도시이다. 마약 시장을 독점하려는 카르텔 간의 유혈 항쟁과 범죄조직들의 납치 살인 강간 매춘 인신매매 등 강력 범죄로 인해 인구 10만 명당 130건(2009년 CCSP 통계)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공권력이 마비된 지 오래인 무법지대인 것이다. 같은 해 한국 살인율이 0.88명인 것을 보면 경악할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사법권과 공권력을 우습게 넘어서는 범죄에 의해 매일같이 다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목이 잘린 시체가 거리에 효수될 만큼 폭력은 난무하고 희망은 전무한 도시 후아레즈의 실상은 영화 안에서 개개인의 정의감과 노력만으로는 손쓸 수 없는 구조적 폭력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이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는 아님을 암시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케이트. 그녀는 FBI에 발탁되자마자 현장으로 파견되어 실력을 인정받아 3년 넘게 아동 납치 전담반을 이끌고 있는 요원으로, 법을 수호하는 위치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끼며 그러기 위해 사회가 정한 원칙과 질서를 강박적으로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의 대척점에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매수된 부패경찰 실비오가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며 케이트는 자신의 원칙을 넘어서는 더 큰 권력(멧)과 구조적인 폭력(알레한드로)의 위협과 회유 속에서 지독한 내적 갈등을 겪으며 서서히 실비오와 닮아간다. 그 과정을 통해서 실비오가 어떻게 지금의 부패경찰이 되었는지 추체험이 가능해진다.


실비오는 최악의 도시 후아레즈에서 경찰 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내다. 후아레즈의 구조적 폭력 속에서 그는 무력하고 부패한 경찰이고, 과묵한 아내에겐 무능력한 남편이자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에겐 무기력한 아버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막 경찰이 되었을 땐 그도 (초반의 케이트처럼)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빛나는 눈빛을 가진 열혈 경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법권과 공권력을 압도하는 폭력에 의해 정을 나눈 동료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고, 믿었던 동료들이 변절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사라지는 끔찍한 상황들 속에서 케이트가 겪었던 심리, 의심-불안-분노-절망 등의 감정선을 차례로 지나 지금의 부패경찰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살아남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자살 당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후반의 케이트와 다르지 않다.


다음 날 아들의 축구 경기를 보러 갈 것을 약속한 실비오는 이튿날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와 아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죽음을 예감한다. 마치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이.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 세상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다. 실비오는 세계에서 이름도 없고 빽도 없는 엑스트라였다. 세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극도로 빈약한 존재감은 그대로 그의 짧은 분량으로 이어진다. 비중 없이 소비되다가 스치듯 죽는다. 심지어 '실비오'라는 이름조차 죽기 직전에야 알게 된다. 죽음의 위협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그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실비오의 진실이고 영화는 그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 편의 길고도 짧은 비극이다. 실비오는 이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건 비단 실비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심심파적으로 소비하곤 하는 범죄 스릴러에 속하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보고 그토록 먹먹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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