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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Feb 11. 2019

스카이캐슬

욕망의 대안

소문이 무성했다. 그 드라마 재밌다더라. 요즘 난리 라더라. 시청률이 몇 퍼센트 라더라. 하지만 꾹 참았다. 뭔가에 한 번 빠지면 기어이 규칙적인 일상을 파탄지경까지 몰고 가는 병적인 기질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는 일이란 얼마나 따분한지. 뭔가에 미치지 않으면 미쳐버릴 만큼 일상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미치지 않기 위해 신선한 자극이 필요할 즈음, 유혹은 기어이 매혹이 된다. 절제심 없는 나란 인간은 홀랑 넘어간다. 글쓰는 지인의 말이 강력한 한방이었다. '대중이 열광하는 것에는 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걸 흡수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요컨대 “봐야 한다.”였다. 나는 어느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떨리는 마우스 포인터로 (여전히 주저하며 그러나) 작심한 듯 재생버튼을 꾸욱 누른다. 마침내 판도라의 뚜껑이 열린다. 일상의 패턴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괜찮다. 파괴는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까 창조적 일상의 시작이다. 자기합리화 한번 오달지다.(눈물)


1회를 보면서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 높은 곳에 지어진 성채. 그래서 보통의 평민들은 닿을 수 없고 입장할 수 없는 까마득한 하늘 성. 게다가 S K Y는 국내 일류 대학들의 이니셜이 아닌가. 그곳 출신들과 그들의 금수저 자녀들에게만 대물림되는 엘리트만의, 오직 엘리트에 의한, 오로지 엘리트를 위한 철옹성. 이 모든 함의들이 제목 [SKY 캐슬]에 담긴 듯하다.


잘 지어진 제목만큼이나 초반부의 만듦새도 매끈했다. 고풍스러운 저택과 고가의 실내장식들, 귀부인들의 고급진 의상과 소품 같은, 부를 상징하는 외적 요소들이 미려하게 배치된 배경으로 그들의 봉건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삶의 방식과 욕망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들이 흥미롭게 펼쳐졌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캐릭터는 저마다 독특했고 매력적이었다. 그들의 언행이 다분히 연극적이긴 했지만, 상류층의 허영과 허세와 허풍, 위선과 위악, 속물성 같은 것들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연출이라고 이해했다. 리얼 풍자 코믹 장르를 표방한 드라마의 정체성에 꼭 맞는 옷처럼 잘 어울린다.


[SKY 캐슬]의 주 소재는 계급사회적인 대한민국의 입시교육의 현실이다. 그 안에 이 나라의 갖가지 부조리와 모순들이 압축되어 있다. 하지만 드라마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조준하는 타켓은 욕망이다. 극 중 인물들에겐 저마다의 욕망이 있고 그 욕망에 주도적인 인물들과 피동적인 인물들이 있다. 그 사이에서 권력이 발생하고 위계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관계 역학 속에서 저마다의 욕망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간섭하고 충돌한다. 촘촘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드라마는 중후반까지 서사를 밀도 있게 밀고 간다.


그러나 [SKY 캐슬]은 욕망만을 말하진 않는다. 어쩌면 욕망이 아닌 것, 욕망과 다른 것을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쉬운 결말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욕망의 묘사는 세밀했지만 해결로서 제시한 대안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구성도 치밀하지 못했고 설득력이 부족했으며 그리하여 성급한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의도는 분명했기에 수긍의 여지는 남았다.


[SKY 캐슬]이 욕망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사랑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욕망과 어떻게 다르고 사랑의 어떤 면이 욕망의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욕망의 만족'을 주장하고 ‘욕망을 욕망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욕망을 순수 욕망과 그 외의 욕망(아닌 것)들로 분류했다. 라캉은 자신의 부재를 타자에게서 이상화하고 타자의 본질은 부인한 채 그 환상에만 목적을 둔 욕망을 '도착'으로, 타자의 본질과, 부재와 결핍 즉 공백'의 있는 그대로의 인정과 수용을 순수 욕망으로 분리하면서, 이 순수 욕망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욕망은 (정신분석학적으로)윤리적이라고 단언했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이건 사랑의 정의이기도 하다. 자캉의 이론을 빌리자면, '도착'이 '욕망'이고 '순수 욕망'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도착으로서의 욕망은 자기 회귀적이다. 타자를 경유해서 자신에게 돌아온다. 처음부터 자신이 목적이었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에서 욕망은 타자를 도구화하고 파괴한다. [SKY 캐슬]의 부모들이 자녀를 대하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허명과 허영, 출세욕과 인정 욕구에 타자들을 악용한다. 겉으로는 상대를 위한 선의로 포장하지만 구조적인 위선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자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디즘에 가깝다. 사디즘, 어쩌면 이것이 욕망의 악마적 본질이자 속성이 아닐까. 간사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 냉소적이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언술, 유혹하는 듯한 과장된 몸짓, 그리고 블랙을 고집하는 주영이 온몸으로 악마를 암시하는 이유일 것이다.


반면 순수욕망, 즉 사랑은 타자 지향적이다. 자신의 부재와 결핍에서 출발하지만 그걸 채우기 위해 타자를 이용하지 않고 타인에게서 자신과 같은 부재와 결핍을 확인하고 긍정하며 그 안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한다. "타자의 정신적인 것이 자기의 충심의 내면성과 밀접히 결합하여, 바로 이 타자에서만 주체의 마음이 자기 자신과 친밀히 융합하여 살고 있는 관계. 이러한 타자 내에서의 '자기 내 삶'이 사랑이다"라고 헤겔이 자신의 책 [미학 강의]에서 정의한 것도 사랑의 이러한 본성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공존을 추구한다.


극의 판도를 바꾸는 결정적 '사랑'은 예서를 통해 나타난다. 오로지 자기 자신, 자신의 장밋빛 미래만을 위해 부모마저도 배척할 만큼의 야욕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예서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를 전부 포기하면서 우주를 위해 진실을 자백(에 동의)하는 행동의 결정적 원인이 사랑이다. 예서의 결정은 사회 정의가 당연하게 요구하는 도의적인 선택 같지만, 이기적인 욕망만으로는 불가능한 결단이다. 사랑은 이렇게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예서의 각성을 시작으로 사랑은 주변 인물들에게 퍼져나간다. 이 과정에서 모든 인물들이 작심한 듯 동시에 선해지고, 긴장감을 유지하던 전개는 한 순간 맥이 탁 풀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드라마를 애정했던 많은 이들의 실망과 질타를 받았다. 차라리 욕망의 극단적 파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나, 22부작 정도로 기획해서 욕망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후반부를 더 치밀하게 그렸다면 완벽한 드라마로 오래도록 회자될 수 있지 않았을까. [SKY 캐슬]의 밋밋한 결말은 아쉽지만,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의 과욕이 초래하는 문제들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책이 사랑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한 문제들 대부분은 사랑의 부재와 결핍에서 나오니까 말이다.


욕망의 유일한 대안, 그것은 사랑뿐이다. 그러므로 라캉의 정언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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