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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Mar 24. 2019

나의 아저씨

바람 이야기로 읽어보는 [나의 아저씨]

장자의 바람 이야기

[장자] <내편> {제물론}에는 '바람 이야기'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대지의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 울부짖는다. 너는 무섭게 부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높고 깊은 산이 심하게 움직이면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 코처럼, 입처럼, 귀처럼, 병처럼, 술잔처럼, 절구처럼, 깊은 웅덩이처럼, 좁은 웅덩이처럼 생긴 구멍들이 각각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탁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낸다. 앞의 것들이 ‘우우’하고 소리를 내면 뒤에 것들은 ‘오오’라고 소리를 낸다. 산들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 거센 바람에는 큰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다가 사나운 바람이 가라앉으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해진다. 너는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하거나 살랑살랑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남곽자기와 안성자유라는 가상의 두 인물이 바람소리에 대해 나누는 대화 일부다. 대화에 앞서 남곽자기는 안성자유에게 질문을 하나 한다. “너는 '땅의 피리'와 ‘사람의 피리’가 내는 소리를 들어보았겠지만, 아직 ‘하늘의 피리’가 내는 소리를 들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간접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남곽자기는 모든 것을 피리로 보고 있다. 피리는 무엇일까. 음을 내기 위한 구멍들을 가지고 있지만 바람 없이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는 사물이다. 그렇다면 피리에서 나는 소리는 바람의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책 [망각과 자유]에서 강신주는 '바람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소리'가 가지는 존재론적 위상이라고 말한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것도 구멍의 것도 아니며, 바람과 구멍의 우발적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울림이라는 것이다. 피리는 바람을 만나 바람소리를 낸다. 이때 피리는 구멍(공 혹은 허)을 가진 존재, 바람은 타자, 바람소리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울림 혹은 소통의 은유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비움을 통한 '마주침의 미학'의 정수가 [바람 이야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장자의 철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울림이 음악이 되는 창조의 미학까지 나아간다. "장자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비움, 마주침, 그리고 울림의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창조로서 표현되는 것입니다."(강신주, 망각과 자유,갈라파고스)


지안

장자의 [바람 이야기로]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지안 관점으로 읽는다면 지안은 피리, 지안에게 동훈은 바람이다. 그런데 지안은 꽉 막힌 피리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의식, 그것을 감추기 위한 허세와 위악 등의 방어기제,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자신을 괴물로 만든 세상을 향한 불신과 적의 등의 자의식으로 가득 찬 '경직된 인간'이다. 그런 지안은 사람들에게 "소름 끼치는 낯섦"(애덤 코츠코)이다. 사람들은 그런 지안을 타자화하고 배제한다. 계속되는 세상의 편견과 멸시에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지안은 스스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다. 자폐적인 세계 안에서 세상과 사람을 냉소한다. 그런 태도는 또 다른 냉대와 따돌림으로 이어진다. 소외의 악순환이다.


이렇듯 지안은 자의식으로 꽉 막혔다. 그 어느 바람과 마주쳐도 묵음 말고는 어떤 소리도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현재가 지안만의 탓일까. '경직'된 지안은 잘못된 어른들이 만들어 온 부조리한 현실이 어린 지안을 관통한 후 남겨진 고장난 자아가 아닐까. 지안에게 세상은 자주 이렇게 묻는다. 너는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니? 하지만 지안에게 망가진 자아에 대한 책임까지를 묻는 것은 온당할까? 지안 스스로 비워낼 수 없는 마음 가득한 자의식을 덜어내주는 것,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건 부조리한 현실에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 어른 모두의 몫일 것이다.


동훈

동훈은 지안에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동훈을 망가뜨리기 위해 도청하는 휴대폰에서 그토록 자주 들려오는 동훈의 숨소리는 바람의 기표다. 하고 많은 타자 중에 왜 하필 동훈이 지안에게 바람이 되었을까. 그전에 바람은 무엇일까. 바람은 차별 없이 불어온다. 판단 없이 모든 대상을 스친다. 그런 후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라진다. 요컨대 바람은 '양심적'이다 동훈이 바로 그런 존재다.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항상 양심 쪽으로 확 기울어 사는 인간'. 동훈은 지안을 판단하지 않았다. 차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지안에게도 공평했다. 심지어 지안의 살인 전과를 알고서도 변함이 없었다. 지안을 살인자라고 섣불리 비난하지 않고 경위를 들어주고 헤아렸다. 단지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형 상훈을 무릎 꿇게 만든 건물주를 찾아가 "식구가 보는 앞에서 그러면 그땐 죽여도 이상할 게 없어."하고 위협할 때, 광일을 찾아가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들 패는 새끼들은 다 죽여."라며 죽도록 싸울 때, 지안과 동훈은 겹쳐진다. 그때 남성과 여성 청년과 중년 정규와 비정규 강자와 약자 범죄자와 일반인 따위 구분은 무색해지고 인간의 본질적 같음만 남는다. 이 닮음은 지안에게 위안이 된다. 진정한 위로는 그런 것이 아닐까. 우월한 다름이나 차이에서 비롯하는 아포리즘 말고 닮음에 연유하는 암묵적인 공감 같은 어떤 것.


묵음에서 화음으로

[바람 이야기]에서 장자는 울림과 소통을 위한 실천으로 비움을 가장 우선시했지만 처참히 망가진 지안에겐 스스로 자의식을 비워낼 여력이 없었다. 비움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지안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네 번의 도움을 넘기지 못하고 "나아질 기미가 없는 인생을 경멸하면서" 도망갔다. 그러다 동훈을 만났고, 그와의 마주침으로 인해 상처는 조금씩 아물고 자의식은 서서히 비워진다. 그렇게 서서히 비워지는 공간으로 바람소리가 조금식 차오른다. 바람소리는 장자의 선언처럼 피리의 것도 바람의 것도 아니다. 피리와 바람의 울림이다. 지안과 동훈이 함께 만들어내는 화음인 것이다. 그 공명이 지안을 변화시킨다.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지안은 마침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바람 이야기가 실려 있는 [장자] <내편>에 속해 있는 다른 챕터, {덕충부}에는 장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전언이 있다.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타자와 연결하여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여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타자와 마주쳐서 마음에 봄이라는 때를 생성시킬 수 있는 자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고 나비와 벌이 모여들어 서로 소통하고 조화하는 계절의 상징이다. 지안은 이제 타자와 마주쳐서 마음에 봄이라는 때를 생성시킬 수 있는 자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는 동훈의 물음에 지안이 "네. 네!"하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는 이유다. 우연의 일치일까. 극에도 기나긴 겨울의 끝에서 봄이 온다.


덧 : 바람 이야기를 통해 지안을 중심으로 동훈과의 관계로만 드라마를 읽었기 때문에 인물의 단순화와 비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안-동훈의 주 이야기 외에도 다른 인물들 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메세지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훌륭한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안 보시거나 망설이고 있는 분들에게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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