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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May 12. 2019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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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이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 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게 다가가 처음으로 두부 사세요. 내 마음을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주머니에 내 마음을 받아넣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아기에게 먹일 것이다.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뼛속까지 서늘하게 하는 말, 다행이다.

/시의 표면

이 시의 표면은 화자가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는 수기 정도로 읽힙니다. 여기서 화자를 시인과 동일시한다면 바로 시인 자신의 윤리를 내세우는 시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이 시의 형식처럼 역시 일기나 수기의 분류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시인은 그런 단순한 의도로 이 시를 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의 내면

이 시를 다르게 읽기 위해선 일단 시인과 화자를 분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1인칭 화자를 3인칭 시점에 위치시킨다면 시인과 화자에 거리가 생깁니다. 거리는 곧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시차입니다. 이제 시인의 의도는 복잡해집니다. 1인칭이 말하는 윤리는 정말 윤리일까, 화자가 생각한 다행은 정말 다행일까, 시인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윤리를 생각하는 윤리

윤리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특정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보편적인 도덕률이 하나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주체의 욕망 실현이 나머지 하나라고 합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이 두 가지 의미의 윤리에서 갈등하는 듯 보입니다. 아기를 업은 불구의 여자를 보았을 때 전통적인 윤리에 의하면 망설임 없이 여자를 위해 지갑을 여는 것이 옳은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윤리를 의심합니다. 여자를 도우려는 행동이 정말 자신의 순수한 욕망인지, 아니면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야 한다'는 학습된 도덕에 의한 조건반사적 반응인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후자일 경우 화자의 행동 원리는 동정심일 가능성이 큽니다. 화자는 또 한 번 망설입니다. 동정심은 과연 옳은 것인가. 불쌍한 사람을 도우며 나는 저만큼 불쌍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자위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다가 결국 그녀를 지나칩니다. 어느 날 화자는 또다시 그녀를 만납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그녀가 실은 불구인 척 연기를 하는 멀쩡한 엄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배신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쁨이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차라리 배신감이 들었다면 그 감정은 얼마나 순수한 것일까요). 그녀가 불구가 아니어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딜레마가 풀려서, 즉 그녀를 동정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화자가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데에는 그런 심리 요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뼛속까지 따스해야 할 '다행이라는 말'이 오히려 서늘할 까닭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마지막 문장은 시인의 목소리로 읽어야 할 듯합니다. "뼛속까지 서늘한 말, 다행이다." 생계를 위해 아이를 업고 거리에 나와 불구를 연기해야 하는 삶은 여전히 전혀 다행하지 않습니다.


/윤리를 의심하는 윤리

가장 윤리적인 윤리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의미의 윤리에서는 자신의 윤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윤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는 자신의 욕망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순수한 욕망인지 검열하는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윤리를 끝까지 의심하는 윤리가 가장 윤리적인 윤리는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의 중반까지 화자는 윤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때 화자는 도덕적인 인간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의심하는 것, 그것이 천양희 시인의 시의 윤리론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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