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빵치료와 꽃치료
작년 10월 초, 감사하게도 나는 별 증상 없이 생리통(인 줄 알았던 매우 아프고 매우 럭키했던 그것) 덕분에 암을 발견했지만, 정식으로 진단을 받고 내 몸에 암 덩어리가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증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피곤했다. 너무나 피곤했다. 그런데 우리 다들 피곤하지 않나. 안 피곤한 현대인이 몇이나 있을까. 내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암 환자들은 몸 안에 염증이 많고 호르몬이 변하는 등등의 이유로 보통 무척 피곤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사르르 아파왔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곧 나아졌기에 그러려니 했고, 나의 규칙적인 화장실루틴을 셀프 칭찬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커다란 암 덩어리가 대장을 누르고 있어서 자는 동안 눌린 장이 자극을 받아 아팠던 것 같다. 의사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각종 증상들이 올해 1월 들어서면서부터 갑자기 심해져서, 하루 종일 불편한 느낌과 함께 어느 날은 배가 아프기도 하고,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종양 때문에 엎드려 눕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졌고, 피곤함이 극에 달해 일 하다 말고 점심시간에 집에 와서 잠시 누워있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미 내가 스페셜리스트 시스템에 들어가 있던 후라 의사도 여러 번 만났고, 검사와 치료 계획을 착착 잡아가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경험자들 말이 뉴질랜드 의료는 시스템에 들어가는 게 힘들지 한번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괜찮다고들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나도 이제 이 느려터진 나라에 많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 정도 속도면 불만 없다 싶었다. 정말로. 내 암이 엄청 느리게 자란다는 것을 알기에 생긴 여유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만일 그 때 처음 발견해서 통증과 함께 1월부터 모든 절차를 시작해야 했더라면 마음이 훨씬 더 무거웠을 것 같다.
하지만, 몸 말고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아닌 마음이었다. 암 환자들이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
림프종은 면역 결핍이 주요 원인으로 꼽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정확한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터라 뭐든 갖다 붙일 수 있었기에 더 괴로웠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이야기 했다. 그 중 몇은 대놓고 대학원을 이유로 꼽았다. 한국에 있는 이쁜 동생 한 명은 전화너머로 내 소식을 듣자마자 울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러게 언니 왜 그 힘든 대학원 공부를 해가지고! 암 걸리게!!”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면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공부를 시작하고 처음에는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어느 정도 적응 하고 난 후에는 더 잘 하고 싶은 나의 높은 기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스무 살 철부지 대학시절에는 멘토도 없었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기에 마냥 놀고 먹고 시간낭비 했었는데, 마흔 두 살 이민자가 비싼 돈 들여 자의로 시작한 공부는 아무래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하다 보니 이 나라 애들은 그렇게 공부에 목숨 걸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네이티브들에 비해 스피킹은 좀 딸리더라도 학점은 대부분 리포트 즉 ‘글쓰기’로 받는지라 나에게는 해 볼 만한 게임이었다. 공부는 어렵기도 재밌기도 해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의 대 환장 콜라보의 연속이었지만 가끔은 공부를 더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적성에 아주 안 맞지도 않았다. 정말 많은 날을 밤 10시 도서관 문 닫을 때 까지 집중해서 앉아있었고, 결론적으로 나는 2년 all A 학점으로 졸업을 했다. 남들과 차별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게 성실함 밖에 없다고 생각한 지라 (all A를 받으면 졸업장에도 Honours가 따로 찍히고, 추후에 명함이나 회사 웹사이트의 본인 프로필 등 일 관련하여 학력 란에 Honours 졸업생이라고 명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름 보람을 느끼는 결과였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았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거기다 나는 한가지 질문이 더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암은 엄청 천천히 자라는 종류이고, 그런데 그 암이 9센치가 넘는다. 심지어 엄청나게 딱딱했다. 스페셜리스트는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족히 몇 년은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럼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팀 발표를 준비할 때 혹시나 내가 팀에 누가 될까 봐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연습하던 그때부터였을까? 잘 풀리지 않는 과제를 다시 붙들고 앉은 그 아침 도서관 5층 구석자리 그 순간 부터였을까? 아니면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필요한 Ielts 에세이 점수를 따려고 주어진 시간 안에 글을 빨리 쓰는 연습을 엄청나게하던 그 때 부터 였을까?
내 탓도 누구의 탓도 아니고, 왜인지 언제부터인지 알 수도 없고, 그러므로 굳이 곱씹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지만, 암환자가 되고 보니 그 질문이 마음 한켠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통에 마음이 참 소란스러운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친한 언니가 통보하기를, 화요일 저녁마다 밥을 먹으러 오란다. 그냥 우리 식구 먹는 거에 숟가락만 더 놓을 거니까 기대는 말고, 밥만 먹고 가란다.
이 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딸 한국인 친구의 엄마인데,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을 증명하는 고마운 가족이다. 검사차 병원에 입원했을 때 부터 언니는 남편 편에 도시락을 보내 왔다.
하지만 매 주 우리 네 식구가 가서 밥을 먹고 오는 것은 아무래도 많이 미안한 일이었기에 나도 남편도 주저했다. 그때만 해도 어떤 옵션의 치료를 할지 정해지지 않았을 때라, 항암치료라도 하게 되어 몸이 힘들어지면 아무래도 몇 번은 도움을 받아야지 생각을 하긴 했다. 근데 나 아직은 괜찮은데.
“언니, 근데 나 아직 치료 시작도 안 했는데.”
“그래. 그 치료를 아직 시작 안 했으니 밥치료를 먼저 시작해야지. 밥치료. 잔말 말고 와.”
고마워서 눈물이 퐁퐁 나왔다.
그 후로 우리는 화요일마다 밥치료를 했다. 딸은 친구 만나 좋고, 아들은 형들이랑 놀아서 좋고,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근황토크를 해서 좋았다. 알고 보니 이게 정말 나한테 필요한 거였다. 카톡으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 오는 분들에게 나누기는 했지만, 내 몸 상태가 어떻고 병원 일정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언니와 형부에게 매주 소소하게 나누는 자리는 너무나 특별했다. 밥이 중요한 게 아닌 거였다. 아, 밥도 중요하긴 했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남이 해주는 밥. 심지어 언니는 요리도 잘 한다. 덤으로 나는 설거지에서도 해방이다!
치료를 시작한 지금은 면역이 낮아져서 외출과 만남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기에 밥 치료를 중단했다. 하지만 몇 달간의 밥 치료는 정말 너무 따뜻하고 고마웠다.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면 본격적인 약제들을 몸에 넣기 전에 pre-med로 부작용 방지제 등등을 먼저 투여한다. 나에게 밥치료는 정식 치료 직전의 완벽한 프리메드였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은 이렇게 내 삶에서 증명이 되었다.
밥치료의 친구인 반찬 치료도 있다. 처음 병원에서 돌아온 날부터 현관문 앞에는 반찬이 놓여 있었다. 권사님이, 친구들이, 동네 언니가,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의 반찬들을 놓고 갔다. 밥치료와 마찬가지로 이 반찬 치료는 반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나를 생각하며 이 음식들을 만들고 배달해주는 분들의 마음과 시간과 정성이 나에게는 이미 좋은 치료였다. 치료를 시작하기 전부터 잘 먹어서 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사골국물이며 직접 빚은 만두며 기타 등등 정성이 가득한 반찬을 작년부터 계속 가져다 주시는 우리 교회 사모님이 계시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이 요리를 뚝딱뚝딱 하는 분이 아니라 그 정 반대로 요리를 힘들어 하시는 분이란 걸 알았을 때의 감사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치료를 시작하고 하루에도 엄청난 가짓수의 약을 먹는 요즘은 계속 속이 안 좋아서 친한 분들에게는 대놓고 원하는 반찬을 주문하기도 한다.
“권사님, 저 그때 만들어주신 물김치 또 해 주세요. 소화가 잘 되더라고요!”
받을 때가 있으면 베풀 때도 있겠지 싶어서 부담을 내려놓고 말씀 드리니 너무 좋아하신다.
나누어주신 음식을 먹을 때 마다 아이들과 이야기 한다.
“너희들, 우리가 왜 이 음식 받았는지 알지?”
“엄마 아프니까 잘 먹고 나으라고요”
받은 사랑이 아이들 두 눈에, 접시 위에 보이니 나중에 이 사랑을 누구에게 어떻게 돌려 주면 좋을지를 이야기 하기에 너무 좋은 타이밍이다.
정신없이 코박고 먹느라 사진을 못 찍은 음식들도 있지만, 기억하기 위해 있는거라도 살뜰히 올려본다. 이 기록은 미래의 나를 위한 거니까.
밥치료와 반찬치료의 자매품으로 빵치료와 꽃치료가 있다.
집 주변에 맛있는 베이커리가 없어서 차를 타고 한참 가야 살 수 있는 맛난 빵집의 식빵이 있는데, 밥치료 언니네가 늘 지나는 길에 두 개씩 사서 하나를 나누어준다. 두 개를 사면 할인이 된다는 점도 서로 좋지만, 우리 집 빵까지 늘 챙겨주는 그 수고로움은 어디 비할 수 없는 감사함이다. 이제 마트 빵은 못 먹는 고급 입맛이 되어버린 아들은 수요일 이른 아침마다 문 앞에 빵을 놓고 사라지는 형부의 3초 실루엣을 놓치지 않고 외친다.
“빵이다! 맛있는 빵이 왔다!!!”
어느 날은 꽃이 왔다. 아들 머리통만한 커다란 수국이 10송이나 탐스럽게 꽂혀있는 거대한 꽃다발이었다. 보낸 사람은 절망에 빠진 암환자에게 꽃의 역할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호주에 사는 플로리스트 언니였다. 꽃이야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되니 거리가 문제가 될 것은 없겠지만, 사실 나는 가끔은 며칠이면 시들 꽃 선물을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메마른 여자였는데 (팍팍한 이민생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자) 그 열 송이 수국은 정말이지 꽃 이상의 감동이었다. 나는 한밤중에 갑자기 거실에 나와 그 꽃들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꽃잎 하나 하나가 다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멀리서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힘을 내서 치료를 잘 받아야겠다 다짐했다.
암환자가 되고 나서 가장 좋은 것은 내 주변에 나를 위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다. 심한 암 환자에 비하면 내 상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암 환자가 아닌 분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나 ‘무엇’이다. 그 ‘무엇’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수렁에 빠진 채로 하루가 금방 가는데, 맛있는 음식으로, 꽃으로, 빵으로, 메시지로, 수렁에서 나를 건지는 손길이 참 많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