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잊고, 즐거운 캠핑

현재에 집중하기

by 혜원

임상실험에 참여할 것인지를 상의하는 미팅을 앞두고, 가족 캠핑을 가야 한다는 중차대한 사유로 스페셜리스트와의 약속을 호기롭게 미루어 달라고 한 나는, 막상 날짜가 밀리자 조금씩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운 좋게 전이가 안 되었지만, 당장 오늘부터 전이가 시작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높은 가능성은 아니지만, 여포성 림프종과 같은 저등급 림프종 아형에서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과 같은 고등급 아형으로 형질이 바뀌기도 한다는 말도 지난 번 스페셜리스트를 만났을 때 분명히 들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날짜를 물러달라고 할까? 말까? 할까?


캠핑장에서 병원까지 왕복 8시간 걸리는데, 날짜를 다시 돌릴 수 있다고 하면 남편이랑 하루만 병원에 다녀 올까? 그럴까?


사서 고민을 하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자동으로 자꾸 생각이 났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지내려고 해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머릿속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항상 “나는 암 환자다” 였으니.


그때 였다. 도서관에 대출 신청을 해 놓은 책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왔다.

사진을 한 장도 안 찍어놨네. 구글에서 찾은 책 이미지.


ACT (Acceptance Commitment Therapy 수용 전념 치료)의 이론에 기반한 이 책은 힘든 감정과 생각을 없애려고 노력하기 보다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목이 Happiness Trap인데,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픈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정상인 우리 삶에서, ‘늘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덫이라는 것이다.


사회복지사가 상담사는 아니지만, 사실 상담을 많이 한다. 나 또한 일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돕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가 하는 말 한 마디가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을 잘 하고 싶고, ACT는 내가 주로 쓰는 기법 중 하나였기에 이 책을 빌린 것이었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재에 집중하라고, 남들한테는 잘만 적용하면서 막상 나에게는 잘 되지 않던 마음들이 Happiness Trap을 읽으며 정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즐겁게 캠핑을 가기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늘 함께 캠핑을 다니는 가족이 있는데, 나의 상황을 잘 아는 터. 이번 캠핑의 목표는 첫째도 둘째도 ‘휴식’이 되어야 했기에 그들은 내가 쉬어야 하는 오만 가지 이유를 만들었고, 4박 5일 캠핑 동안 나는 설거지 한 번을 안 했다. 미안하니까 나도 설거지를 하겠다고 옥신각신 하는 대신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와중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걸 했다. 책을 읽고, 수영장에서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맛난 음식을 해 주는 대로 먹고, 저녁마다 이야기 꽃을 피우고, 많이 웃고, 밤에는 별을 실컷 보았다.

캠핑장이 외딴 지역이라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캠핑장 안 수영장. 아이들은 종일 놀아도 부족하다.
귀요미 아들들
캠핑을 여기저기 멀리로 다니는 것의 장점 중 하나는 아이들 역사 공부의 기회가 있다는 것. Russell에 위치한 뉴질랜드 최초의 교회.
요트를 바라보고 앉아 멍도 때리고
가죽을 다듬고 인쇄술을 발전시켜 뉴질랜드 최초로 성경책을 만들던 곳
대문자 소문자가 왜 Upper case, Lower case인지 알게 되었다. 윗 칸에 대문자, 아랫칸에 소문자 활자 스탬프를 넣었단다.
프린팅 기계
몽글몽글 아이들의 뒷모습
각자의 베프와 설거지 타임
다들 카약을 타러 떠나고
우리 부부의 여유로운 발가락
그 와중에 지나칠 수 없는 헌책방
꽤 진지한 공사현장
나의 명랑한 암 투병기 표지 사진이 된 그 날의 풍경
어디서든 책 읽는 시간이 꼭 필요한 우리 딸내미
아 시원하다
캠프 파이어의 밤
우리 어린이들 땔감 구해 오는 스케일 보소...
형광 스틱으로 장식한 파이어핏
대충 찍은 하늘. 어느 밤이나 별이 빼곡했다.
카약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엄마도 꼭 해야 한다는 아이들 성화에 다음 날 못 이긴 척 나섰다. 사진은 아빠와 딸.
남성팀 vs 여성팀. 우리 부부는 편하게 둘만 탔다.
카약을 타고 근처 섬으로 가서 한참 놀다가 또 다른 섬으로 이동하길 반복했다.
친구가 하라케케를 뜯어 손질해 왔다. 난생 처음 바구니 만들기에 도전!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졌다.
캠핑 마지막 날. 한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다가 별 구경을 한참 하다 말고 별자리 앱을 켰다가 Cancer에서 잠이 확 깼다.

오래 전 히포크라테스가 처음으로 암을 발견했을 때, 가운데 종양이 있고 주변으로 혈관이 뻗어 나가는 모양이 꼭 게(Cancer) 같아서 cancer 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아니 근데 한밤중에 예쁜 별들을 보며 황홀해 하다가 발견할 단어는 아니지 않나. 왜 하필 저기 게자리가 있어가지고!


좋다 말았다... 라기 보다는, 그냥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내가 암 환자지.

이제 치료해서 나으면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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