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관문
스페셜리스트와의 다음 만남에서, 나는 임상 실험에 참여하겠다는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사실 딱히 고민의 여지가 없었다. 임상 실험의 그룹 안에 기존의 표준 치료인 항암치료도, 내가 원하는 신약으로 하는 면역치료도 모두 다 있었다. 실험의 포인트는 신약이지만, 대조군도 필요하니까. 임상 실험에 참여하면 어느 그룹에 뽑히게 되어도 병원에 오가는 교통비 및 주차비 등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로써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이 네 개의 선택지 중 두 개 그룹은 신약을 사용하는 옵션이었고, 나머지 두 개 그룹은 기존의 항암치료제 옵션이었다. 각 그룹별로 쓰는 약물과 뽑힐 가능성, 그리고 치료 기간이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A 그룹은 엡코리타맙 Epcoritamab과 리툭시맙Rituximab, 레날리도마이드 Lenalidomide를 쓰는 옵션으로 이 그룹에 뽑힐 가능성은 38%, 치료 기간은 2년 6개월.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그룹이 내가 뽑히고 싶은 그룹이었다. 하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작위 추첨에서 뽑혀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스페셜리스트는 정확히 한달 후인 2월 16일부터 치료에 들어갈 것이고, 그 동안 몇 가지 스크리닝 screening 을 해서 임상실험에 참여할 수 있는 컨디션인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남았다고 했다. 이는 골수검사, 뇌MRI, PET-CT, 그리고 심장 초음파였다.
골수검사는 정말 너무 아팠다. 시작과 동시에 수면마취를 해줘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너무 아파서 중간에 깨버렸다.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는데, 그 손 당장 놓으라고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단다. 한국어니 당연히 자기에게 한 말인 줄 알고 놀란 남편이 손을 놨더니 내 손이 엉덩이 뼈에서 골수를 채취하고 있는 사람의 손 쪽으로 잽싸게 갔다나. ‘그 손’이 남편 손이 아니었던 거다. 다행이 노련한 의사가 내 손이 거대한 주사기를 뽑기 전에 내 손목을 턱!낚아 챘단다. 뭐,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만.
치료를 시작하면 빠르면 3달, 늦어도 6달 안에는 암세포가 관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골수검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 괜찮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하는 검사인데도 사실 벌써 두렵다. 지금부터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 아는데. 걱정을 가불하지 말자!
PET-CT는 두 번째 촬영이었기에 잘 지나갔다. 이런 거에 익숙해 진다는 게 일견 슬프기도 했지만 나는 현실을 씩씩하게 받아들이기로 진작에 다짐했으니까 능숙하게 잘 넘어갔다. 검사관 헤미쉬와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심장초음파도 괜찮았다. 내 심장을 뛰게 하려고 내가 노력 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 심장이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구나 확인하니 너무 고마웠다. 뱃속에 첫 아이를 가졌을 때, 그 초음파를 하며 심장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신비로웠다.
뇌 MRI는 많이 기억에 남는다. 림프종의 뇌 침범 여부를 확인하고 치료 전의 몸 상태를 기록해 혹시 나중에 신경학적인 증상이 생겼을 때 처음과 비교하기 위해 찍는다고 했다. 아픈 검사도 아니고 방사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티비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라 별 걱정 하지 않고 갔다. 다만 스캔 과정이 시끄럽다는 정보를 미리도 알고 있었고, 당일에도 주의사항으로 들었다. 그리고... 정말 정말 시끄러웠더랬다.
방사선사는 스포티파이가 있으니 노래를 골라보라고 했다. 다만, 잘 안 들릴 수도 있다고. 나는 아무 CCM 이나 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꾹 꾹 눌러 귓구멍에 맞게 넣는 주황색 귀마개를 한 후 다시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약 20분 동안 귓전을 때리는 여러 가지 소음과 저 멀리 희미하게 들리는 CCM 사이에서, 나는 어느 소리에 집중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강제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 다양한 소음이 들렸다. 내 머리 위에서 지붕을 고치느라 땅땅땅 치는 소리, 콘크리트 공사 현장을 지나갈 때 들리는 두두두 땅 파는 소리, 엘리베이터에서 정원이 초과될 때 나오는 삐삐삐 소리, 아기 낮잠 잘 때 느닷없이 울리는 띠띠띠 구식 벨 소리… 이 외의 모든 다양한 소리가 아주 크게 귀 바로 옆에서 쉬지 않고 울리는데 저 멀리 어디선가 찬양이 들리긴 들린다. 예상 외의 큰 소음이 끊이지 않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컸던지 나는 필사적으로 찬양에 집중을 했고, 세상의 소리와 내가 원하는 소리 사이에서 어디에 포커스를 둘 것인가를 정말 느닷없이 진지하게 묵상했다.
모든 스크리닝 결과는 정상이었다. 다만 암 세포의 골수 침범이 약10% 정도 확인 되었는데 이는 골수 안의 세포들 중 약 10%가 암세포로 보인다는 말이고, 나의 병기가 3기에서 4기로 올라가는 기준이 되었다. 4기 암 환자라니! 하지만 현재 나의 몸 상태에서는 사실 예상한 수치였고, 여포성 림프종은 3기나 4기나 진단과 치료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걱정하지 말라니 걱정하지 않아야지. 때로는 단순함이 사람을 살린다.
앞으로 살면서 세상의 소리와 내 내면의 소리 사이에서 갈등이 생길 때,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에 대한 이슈가 생길 때, 나는 늘 뇌 MRI 를 생각하게 될 것 같다. 필사적인 의지로 원하는 바에 집중했던 그 순간을 말이다. 이런 저런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건 이토록 좋은 일이다.
What doesn’t kill you makes you stronger.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
치료 부작용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제 날짜에 글을 발행하지 못했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