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NA Apr 02. 2019

영어라는 평생의 넘사벽

배워도 배워도 모르는 것 투성이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영어가 교과목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국민학교 세대라고 하는 게 맞다. 6학년으로 올라가던 해 전국의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으니... 그렇게 영어는 알파벳만 알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단어 겨우 읽는 수준으로 9몬 영어를 하면서 스트레스 엄청 받았던 기억이 난다.  Goose가 여럿이면 Geese가 되고 Mouse가 친구를 만나면 그것은 Mice가 되고... 매우 귀찮고 어려운 법칙들이었다.

영어를 향한 나의 포효

그렇게 영어는 먼 나라 이야기였던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촌 언니 따라 종로에 있는 성인 영어 회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고 성인반에 앉아 수업을 듣자니 맏딸로 태어나 평생 막내 대접받아 본 적 없던 나는 순식간에 회화반 막둥이가 되었다.


그런 막내 취급이 나쁘지 않았다. 당시 스물 중반 서른 초반 즈음되던 회화반의 언니 오빠들은 내가 귀엽다며 맛난 것도 사줬다. 특히, 회화 초급반 수업을 하던 교포 선생님이 엄청 쿨하고 당시엔 꽤나 혁신적(?)으로 반 분위기를 압도해서 똑같은 회화반 수업을 매달 듣는 단골 학생 그룹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다음 카페도 만들어 활동하고 꽤나 재밌게 수업을 했더랬다.


시간이 흐르고 고3이 되어 더 이상 수능 외의 것들을 공부할 수 없을 때쯤, 학원을 그만두었다. 2년 남짓 꾸준히 학원을 다녔던 덕분에 나의 영어 실력은 쭉쭉 늘어 교내 영어 경시는 매번 본상을 휩쓸었고 모의고사 영어 능력 평가는 항상 1등급이었다. 영어가 재밌고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영어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오만해지기 시작한 것이...

대학 때도 딱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맨날 친구들 한테 떠벌렸던 것 중에 하나가 ‘난 졸업하면 미국으로 뜰 거야.’였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미국병(?)이 단단히 걸렸다고 핀잔 주기 일 쑤 였다.


졸업과 동시에 해외 인턴쉽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나는 영어가 너무 좋아서 미국에서 영어를 쓰며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처음 미국 오고 몇 년은 한국계 회사에 다니느라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미국 애들이랑 영어로 쏼라쏼라 하면서 세계 무대를 휩쓸려했던 내 포부와는 정반대로 회사에서 XX 씨 해가며 가뭄에 콩 나게 영어 했다. 사내 어중간히 영어 하는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한국에서 갓 온 FOB(퐙: Fresh Off the Boat-직역하면 배 타고 미국에 갓 도착했다는 의미로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특히 미국으로 갓 이민 온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이었지만 영어는 잘하는 김서현 씨였다.


돌이켜보면 갈증 나는 미국 생활이었다. 미국이지만 미국 같지 않은 생활에 나는 영어를 쓸 기회를 항상 갈구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의식 중에 깔린 ‘나 이 정도로 영어 잘해.’라는 오만함을 누리면서 영어라는 언어로 소통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을 원했던 것 같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공감할만한 그 느낌... 외국말을 알아듣고 대답하며 주거니 받거니 그런... 소통의 쾌감.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3년 전, 나는 완벽하게 영어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일단 주변에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한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동생 하나가 귀국하고 나서는 자주 만나 노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거기에 새로 옮긴 직장은 그야말로 미국인들만 일하는 직장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미국인들 사이에서 일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많이 익었다. 그래서 지금 고개가 땅바닥에 닿을 지경이다.


예전에 영어를 어설프게 잘했을 때는 주변에 다들 수준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에 뜻만 통하고 메시지만 전달되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국애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니 내가 영어를 잘하는 수준은 그래 봤자 외국인이 영어로 의사 전달할 줄 아는 정도였다. 내가 아무리 잘해봤자 얘네들은 네이티브인데... 'Fluent(유창한)'와 'Native(본토의)'의 경계에 넘을 수 없는 벽이 들어섰다. 예를 들어 정관사 the가 언제 오느냐와 같은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 혹은 인터뷰 시에 어떻게 하면 덜 직접적이고 있어 보이게 답변을 하느냐 같은 기술 차원의 문제까지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긴장했거나 화가 난 상태에서 영어로 내 의사를 전달해야 할 때는 웃픈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직업상 진상 고객 상대와 진상 직원 상대를 해야 할 때가 정말 많다. 한국말로 진상을 상대할 때도 말발로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데 나는 일단 흥분하면 한국말도 잘 못한다. 그런데 영어라고 오죽하랴. 그렇게 얼굴만 울그락 불그락 해져서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어... 음.. 아... 아... 어버버’만 오지게 반복하다가 결국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밤새 이불 킥을 한다. 왜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평상시 괜찮던 영어 발음도 화가 나면 갑자기 혀가 마비가 오면서 발음이 안 나오거나 꼬이기 일수다. 미팅을 진행할 때에도 정말 단순한 시제인데도 말하고 나서 이게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매일 이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3년 동안 주눅 많이 들었다. 영어를 예전보다 더 많이 말하고 듣고 쓰고 있는데 왜 더 퇴화하는 느낌이 드는 건지...


하지만 요즘 들어 내가 계속해서 상기하려는 것은 언어는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영어를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영어를 완벽하게 해야지만 그 목적이 완성된다는 생각으로 영어를 사용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영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생각했던 내용을 타인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결국 모든 언어라는 게 다 그런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한국인들 중에도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 언어를 쓰기 때문에 말을 잘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언어 능력 차이에 따라 말을 잘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서 미국애들이랑 동등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좀 덜었다. 하지만 아주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하고자 하는 로망은 아직도 있다. 외교부 장관 강경화 님 같이 차분하게 어려운 단어 섞어가면서 수준 높은 미팅을 진행하고자 노력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날은 올 것 같지 않지만 그에 가까워지도록 오늘도 머리 싸매고 모르는 단어 찾아본다.










작가의 이전글 화장실 보다 더러운 뉴욕 지하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