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 본 브루클린 안내서
나와 브루클린의 인연은 힙합으로 시작된다. 고등학교 때 나는 힙합 마니아였다. 가사는 알아듣지 못할지언정 비트와 플로우를 느끼며 그렇게 힙합을 들었다. 당시 좋아했던 곡들을 요즘 들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가사에 뭐 이따위 노래를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곡들도 있지만 90년대 후반 2000년 초반은 가히 미국 힙합 전성기였고 그 속 많은 래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했던 나였다. (어이없게도...)그리고 그 많은 래퍼들 중 유난히 브루클린 출신 래퍼들을 좋아했다. 당시 브루클린은 나에게 가보지 않은 성지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성지에 살고 있다. 뉴욕으로 이사와 꼭 브루클린에 살아야지 한 것은 아니지만 이래저래 월세 비용이나 출퇴근 거리 감안했을 때 브루클린이 제법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맨해튼의 미친 월세보다 조금 싸면서 같은 값에 좀 더 넓은 면적을 얻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출퇴근 거리와 시간 절약면에서 맨해튼이 현저히 우월한 위치에 있지만 문화적인 면, 정서적인 면에서 브루클린이 나와 좀 더 맞았다.
뉴욕을 사랑하는 이들의 최고 지침서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면 마지막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 즈음에 미란다가 스티브와 결혼을 하며 브루클린으로 이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마지막 시즌이 2004년, 약 15년 전 이야기인데 실제로 그즈음 하여 브루클린 부동산 시세가 오르면서 많은 여피족들이 브루클린으로 이사하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빈민가의 고급 주택 지화, 우리나라의 비슷한 예로는 이태원을 꼽을 수 있다.)이 최고조에 이르러 현재 2019년 맨해튼과 지하철로 20분 거리 안에 있는 브루클린 주변지역의 월세는 사실 맨해튼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브루클린은 더 이상 못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아닌 너도나도 힙하다고 하는 애들이 다 모인 힙스터 동네다. 더불어 집값 상승은 덤. ㅜㅜ
입소문을 타고 유명세를 얻어 브루클린 곳곳에서도 관광객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덤보나 브루클린 브리지 외에도 동네 구석마다 슈트 케이스 들고 무리 진 관광객은 브루클린에서 이제 흔한 일상이다. 혹시나 뉴욕 여행 중 브루클린을 구경이 여정에 포함되어있는 분들을 위해 내 멋대로 브루클린 지침서를 만들었다.
(경고: 이 글은 철저하게 본인의 주관적이고 편협한 사고로 쓰인 글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
브루클린 메트로폴리탄 에베뉴(Metropolitan Ave)를 기점으로 남쪽 지역을 South Williamsburg라고 부르고 북쪽 지역을 North Williamsburg(사실, North는 잘 붙이지 않고 그냥 윌리엄스버그라고 부른다.)라 일컬으며 Bushwick Ave를 기점으로 동쪽으로 쭉 이어지는 동네를 East Williamsburg라고 부른다. 명칭상 West Williamsburg는 사용하지는 않는다. 서쪽 북쪽 윌리엄스버그를 통틀어 윌리엄스버그라고 부른다.
1990년대 후반 즈음부터 시작되었다는 윌리엄스버그의 젠트리피케이션은 아마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현재까지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윌리엄스버그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베드포드 에베뉴(Bedford Ave)를 걷다 보면 문득 신사동 가로수길이 떠오른다. 대학교 때, (그러니까 꽤 오래전...) 압구정은 이미 한물가고 신사동 가로수 길이 뭐 좀 안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를 때쯤, 작은 로드샾이 늘어서 있고 골목 사이 숨어있는 맛집을 찾아가는 것이 가로수길을 찾는 이유였다. 지금은 대기업이 너도나도 지점을 내서 가로수 길 만의 폼세를 잃었지만... 그런데 베드포드가 딱 그렇다. 예전에는 베드포드만의 폼세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대 상업 자본이 들어와 버리고 그렇게 진부한 도시 풍경으로 채워졌다. (사실, 4년밖에 안 살아서 진미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나 4년이란 짧은 시간 속에서도 윌리엄스 버그는 정말 빠르게 변해갔다.) 불과 삼사 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홀푸드(Whole Foods: 모든 물품의 값이 보통 슈퍼마켓보다 조금 더 비싼 여피족의 대표적 슈퍼마켓), 이퀴녹스(Equinox: 헬스클럽 체인 중에 연 회원비를 몇십만 원 이상 받고 한 달 회원권이 300불 웃도는 귀족 신분(?)을 상징하는 헬스클럽)가 베드포드 에베뉴에 들어섰고 주변 삼 마일 반경에는 새로 지은 콘도들이 우뚝 서있다.
일단 베드포드 에베뉴를 기점으로 맥캐런 파크까지의 윌리엄스 버그를 살펴보면 돈 많은 젊은 이삼십 대 젊은이들이 많이 산다. 이들은 소의 말하는 'Trust fund baby'로 집에 돈이 많아 부모가 은행 계좌에 돈을 빵빵하게 넣어놓고 자식들 일 안 해도 먹고살게끔 해놓은 혜택 받은 아이들을 가리킨다. 물론 모두가 부잣집 자식들은 아니고 계중에는 맨해튼에 위치한 잘 나가는 회사에서 억대 연봉받는 월급쟁이도 많다.(여하튼 부유한 동네) 이전 우리나라 강남 땅값이 십원도 안되었을 때 부동산 붐이 일어 떼부자가 된 사람이 많듯이 이곳 윌리엄스 버그도 급작스러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날벼락 부자가 된 케이스가 많다. 일례로 낡고 허름한 하우스 한 채가 십 년 전에는 한화 팔천만 원도 채 안돼 던 것이 그 값이 삼십 배쯤 뛰어 지금은 약 20억 정도 한다. (금액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실제 은행에서 일하던 시절 한 고객이 윌리엄스버그의 하우스 한 채를 매입하면서 대출받은 서류를 검토하다 발견한 사실임.) 뉴욕에 오래 살았던 나이 드신 분들에게 브루클린의 90년대를 물으면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넘어가면 무조건 총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사실 70프로 이상이 사실이기도 했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를 들을 수 있다. 거기에 한 수 더 떠 윌리엄스 버그는 다리 밑에 약쟁이들도 많았고 이스트 리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떠다녔다고 한다. 상상이 안 간다.
본인은 뉴욕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일주일에 한 번은 윌리엄스버그에 가서 놀았던 것 같다. 논다는 것이 딱히 할 일없이 돌아다니면서 술 마시고 사람 구경한다는 것이지만 그만큼 윌리엄스 버그의 young하고 hip 한 분위기가 좋았다. 뉴욕에 한 4년 정도 살아보니 이제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이상 잘 가지 않는다. 그만큼 너무 뜨내기들의 동네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하지만 나도 뜨내기..) 갈 일이 있더라도 번화가 베드포드 역 근처를 벗어나 사우스 윌리엄스 버그 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나마 관광객도 적고 로컬들이 자주 가는 술집들이나 레스토랑이 훨씬 많다. 관광객들이나 뜨내기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사우스 윌리암스를 배회해 보시길...
윌리엄스 버그에 와서 로컬들이 많이 있는 술집을 찾으신다면 아래 두 곳을 가보길 추천한다.
(이하 음슴체)
(1) George and Jack's Tap Room
주소: 103 Berry St.
딱히 이 집만 유명한 뭐가 있는 것은 아닌 데 갈 때마다 분위기가 좋음. 특히, 이 술집을 찾는 사람들이 매우 훈훈함.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제 멋대로 술 마시고 있음. 이 술집에는 반려견도 데리고 올 수 있기 때문에 가끔 테이블에 앉아있으면 모르는 강아지가 테이블 밑에서 어슬렁 거릴 때도 있음. 소시지 비스므레 안주를 파는데 절대 시키지 말길. 맛없음. 아, 그리고 여기 가게 안쪽으로 가면 팝콘 기계가 있음. 팝콘 공짜로 무한대로 먹을 수 있음. 또한 아케이드 게임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음. 동전 넣어야 함.
(2) The Commodore
주소: 366 Metropolitan Ave.
치킨 좋아하는 사람은 꼭 가보길. 물론 한국이 치킨 강국이어서 어지간히 튀긴 닭은 성에 안찰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여기 버펄로 치킨 샌드위치를 애정함. 그리고 그냥 치킨도 맛있음. 여기저기 먹어본 치킨 샌드위치 중에 단연 으뜸임. 내부는 약간 레트로 분위기. 여기 또한 로컬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라 주말에는 엄청 바쁨. 치킨은 오후 5시부터 먹을 수 있음. 점심시간은 안 하니 가실 분은 시간을 잘 찾아보고 가야 함.
부시윅은 L트레인을 타고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동네로 윌리엄스 버그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된다. 제퍼슨 에베뉴(Jefferson Ave) 역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면 허름한 공장지대 같은 분위기의 동네를 만날 수 있다. 부시윅은 옛날부터 공장, 화물창고, 쓰레기 수거 차고 등 이 있는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었다. 해가 지고 나면 길거리에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고 골목을 잘 못 들어섰다가는 강도를 당하거나 다신 살아서 나올 수 없는 뉴욕 빈민가의 대표적인 동네였다. 부시윅이 트렌디한 동네로 변하게 된 데에는 90년대 말, 돈 없고 배고픈 아티스트들이 집값이 싸다는 이유로 몰려들면서부터 였다. 그런 아티스트들이 닥치는 대로 공장지대나 화물 창고 등의 밋밋한 벽에 그라피티나 뮤랄(Mural: 벽화)등을 그리면서 동네가 알록달록해졌고 그 벽화들이 현재는 부시윅의 대표 감성이다.
부시윅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동네로 이제는 돈 좀 있고 센스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부시윅으로 이사 오고 싶어 한다. 전반적으로 그런지(Grunge)하면서 자유롭고 예술적인 느낌 때문에 이삼십 대 미혼들이 살기 선호하는 동네 중에 하나다. 그래서 부시윅 근처를 배회해 보면 개성을 한껏 살려 패셔너블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첫 뉴욕 아파트는 부시윅에 있었다. 아파트는 신축 건물이어서 집안 내부는 최첨단 가전제품과 번지르르한 가구들로 세팅이 되어있던 반면 문 밖을 나서면 우중충하고 낡디 낡은 허름한 주변 건물들이 극한 대조를 이루었다. 부시윅에 위치한 아파트들이 대부분 그렇다. 백 년도 더 된 낡디 낡은 공장 건물을 콘도미니엄으로 개조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주거건물 형태)
부시윅에서 가볼 만한 클럽, 맛집 두 군데를 소개해 볼까 한다.
(이하 음슴체)
주소: 261 Moore st.
피자가 유명한 뉴욕. 개인적으로 피자를 좋아라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피자맛에 대한 전문가적 평가는 내릴 수 없지만 먹어본 뉴욕 피자 중에 괜찮았다고 느꼈음. 하지만 역시나 개인적으로 뉴욕 피자라고 딱히 더 맛있고 그런 건 모르겠음. 피자는 피자임. 여긴 워낙 유명해서 일단 가면 웨이팅은 기본임. 피자로 너무 유명해져서 뉴욕 곳곳에 작은 체인이 존재하는데 부시윅에 있는 게 본점임.
피자 말고도 뭐 잡다구리 많이 파는데 따른 건 별로였음. 그리고 또 개인적인 생각인데 양에 비해 비쌈. 저 작은 피자 한판에 17불에서 20불 정도. 일 인 분임. 보통 일인 일 파이. 둘이 가면 먹고 마시고 팁까지 60~70불 나오니 피자 먹는 셈 치고는 좀 과한 편. 하지만 한번 가볼만한 피잣집.
주소: 1271 Myrtle ave.
클럽 좋아하시는 분들, 특히 하우스나 일렉 좋아하시는 분들은 여기 한번 가보길. 일단 클럽 첨 들어가면 안에 드라이아이스 기계 켜놔서 막 뿌연 연기가 막 나옴. 그러면서 불빛도 무슨 야광 조명 막 써서 외계 느낌남. 음악도 가끔 되게 실험적인 외계인 음악 틀어줌. 술값은 매우 싼 편. 여기 가면 애들 막 벽보고 혼자 춤추고 있고 좀 신기한 광경을 많이 보게 됨. 혹시나 본인이 매우 바르고 음주 가무나 외국애들 레크리에이션용 마약(소위 말하는 대마나 몰리 등의 강도가 조금 약한..)에 대해 굉장한 거부반응을 갖고 있다면 가지 말길. 아마 50% 이상 약을 복용하고 오는 애들임. 그렇다고 위험하거나 하진 않음. 얘네들 만의 문화라서 난 갔을 때 그런가 보다 했음. 단, 모르는 사람이 주는 술이나 뭐 이상한 사탕 같은 건 절대!!! 절대!!! 받아먹지 말길.(이건 외국이건 우리나라건 무조건 조심해야 함.) 여기 오는 애들은 대부분이 그냥 음악 즐기러 오는 애들이라 분위기는 건전한 편임. 막 여자한테 해코지하고 그런 애들 의외로 없고 되게 진지충 같은 음악 마니아들이 많았음.
내용이 너무 길어진 관계로 지루할까 세편으로 나눠 각색하였다. 2편에서는 Greenpoint와 Bed-stuy, 3편에서는 Dumbo와 Gowanus, Park Slope를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