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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과 무례함, 그리고 짝사랑

최은영, 『쇼코의 미소』

by 랭모닝
엄마는 살엄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닿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2016)


어디까지가 솔직함이고, 어디까지가 무례함인건지.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배려인건지.

살면 살 수록 헷갈린다. 서로를 너무나 배려해 멀어졌던 엄마와 언니와는 다르게, 나는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릴 적 나는 솔직한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서로간의 솔직하고 투명한 의사소통만이 인간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말하지 않으면서 혼자 속으로 끙끙 앓거나, 털어놓고 이야기할 생각 없이 멋대로 오해해서 관계가 틀어지는 건 질색이었다. 괜히 배려한답시고 본인이 생각하는 배려를 해줘봤자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게 그들이 원하는 배려가 아닐 수도 있기에,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솔직하게 물어보고 그대로 해주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나 라고 생각해왔다. 그 마음이 바뀌게 된 계기는 꽤 최근 일이다.


3년 전,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A는 사교적이면서 입담이 좋아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성격이었고, 나는 말보다는 생각이 많은 편이었다. 우리는 다른 성향이었지만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했고, 꽤 잘 맞아 둘이서든 여럿이서든 종종 만나곤 했다. A는 매력적이었고, 내 마음은 멋대로 커졌다. 1년을 혼자 끙끙 앓은 후 어떻게든 결론을 내고 싶어졌다. 여느 때와 같이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한 날, 집으로 함께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내 마음을 고백했고 A는 당황했다. 잠깐 횡설수설하였지만 요는 나를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바라본 적이 없기에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거절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정말 아니라며 진심으로 본인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다.

사실 거절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고백이었기에, 아예 그냥 빨리 거절을 당하고 잊고 싶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실낱 같은 희망에 설레기도 했다. 단 하루를 기다린 후, 난 A에게 전화를 걸어 카운터 제안을 하였다. 일단 몇 번 만나보고 결정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꽤 논리적인 척 회사에서도 상품 출시 최종 결정하기 전 베타 버전 출시하지 않냐며. A는 잠시 생각하더니 일단 세 번 정도 만난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첫 만남은 즐거웠다.

나는 파인 다이닝 겸 바의 조용한 자리를 예약했고, 우리는 몇 시간이나 먹고 마시며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A는 평소처럼 대화를 이끌어갔지만 중간중간 뚝딱거렸고, 나는 오히려 그 모습에 기대를 걸었다.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보니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서로간 친구 이상의 끌림이 부족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삼각형 이론 따위를 찾아보며, 친밀감은 있지만 열정은 없는 게 우리 관계의 문제라고 혼자 결정지었다. 그래서 혼자만의 고민 후 두 번째 만남은 우리 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A는 선선히 수락하였다.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나 저녁을 먹으며 첫 만남처럼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그 당시 난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는 경험이 많지 않았다. 첫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첫 타지생활을 시작했을 때라 초대할 만한 친구가 없었고, 그 다음은 코로나였다. 내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본 건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A를 집으로 초대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계획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 보통 어떤 걸 하는지 경험적 지식조차 없었다. 우리는 함께 요즘 핫하다는 드라마 한 편을 보는둥 마는둥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내 냉장고에는 A가 좋아할 만한 아이스크림과 디저트, 술이 가득했지만, 우리는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게임을 같이하던, 집 앞 산책을 하던, 집 앞 수영장에서 와인을 한잔 까던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 당시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A는 조금 지루했는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나는 A를 지하철역으로 바래다주면서 이제 마지막 만남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또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 정리가 조금 되었냐고 물었고, A는 난감하게 웃으며 아직 모르겠다는 대답과 함께 역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로 A는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절의 표현인데, 그 당시 나는 A가 연락을 하지 않을만한 이유를 혼자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솔직함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믿었기에, A의 입으로 거절을 하기 전까지 내 멋대로 거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고, 그제서야 받아들였다. 거절의 의미였구나.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A가 거절을 할 수 있도록 몇 번이나 물어봤으며, 솔직하게 거절해줬다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우리는 다 털고 다시 친구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회피와 잠수로만 끝나야했을까. 그 다음엔 A가 미웠다. 내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나. 회피형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그 후 2년이 지났다.

내 롤러코스터 같던 감정은 사그라들었고, 이 에피소드는 좀 지독했던 짝사랑이자 내 흑역사 정도로 남았다. 과거를 돌아보니 내 잘못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솔직함이라는 이름 하에 내 감정을 무작정 들이밀었던 것.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조급하게 답을 요구했던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내 환상 속에 밀어 넣어 내 멋대로 생각한 것. 이 모든 것이 A를 부담스럽게 만들었겠지.


이제는 조금 더 잘 보인다. 솔직함이 무례함이 될 수 있고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관계란 두 사람이 일방적으로 각자의 감정과 의견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평행선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진심으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건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비언어적인 표현도 의견 표명이라는 것. 솔직함과 부담스러움의 경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그들의 선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도 배려라는 것.


솔직함과 무례함, 거짓말과 배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법을 배우는 건 쉽지 않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계속해서 실수한다. 솔직함을 무기로 무례하고 부담스럽게 대하면 안되지만, 그와 동시에 소중한 사람이라면, 너무 멀어지기 전에 터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대에게도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들도 내 솔직함이 부담스럽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로 풀어나갈 용기를 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요령껏 강약조절을 하는 것은 앞으로 차근차근 배워나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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