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쇼코의 미소』
당시에는 쇼코의 모순된 말들에 혼란을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게하는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모든 세부사항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모두 진실된 이야기였을 거라는걸. 아니,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더라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고, 내 편지에 썼듯이 자신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2016)
나는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을 단면적으로만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 사람은 허세가 있네.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은 나를 여러번 도와줬으니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냉정하고 배려가 없더라. 사회생활도 잘 못할 것 같아' 등, 하루에도 몇 번 씩 나에게 보이는 면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선입견을 만들곤 했다.
가까운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생각하면 부정적인 단어만이 떠올랐다. 나에게 무엇 하나도 양보하고 싶지 않아하는 욕심 많은 성격, 여린 성격의 엄마에게 제 내키는대로 성질을 부리면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겐 배려깊은 이미지인 강약약강의 표본, 혼자라면 절대 내리지못했을 무책임한 결정을 내리며 부모님을 힘들게하는 이기적인 자식, 원하는 게 있을 때만 사근사근하게 다가오는 여우. 우리 사이 감정의 골은 꽤 깊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심했다. 학교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고, 내가 가까워지지 않고 싶다고 판단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은 쉬웠다. 나는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되는 친구들과만 어울렸고, 단체로 왁자지껄하게 어울리는 과 술자리를 피했다. 팀플이나 동아리로 어쩔 수 없이 모두와 어울려야하는 경우에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만 예를 차리고 깊은 대화를 피했다. 학교에서 내 목적은 학점,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직업 찾기, 이 두 가지 밖에 없었고 좁은 인간관계는 내 목적을 이루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나는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졌고, 7년가까이 직장생활을 하였다. 커리어에서 나는 꽤 욕심이 있었다. 빨리 승진하고 싶었고, 일로써 인정받고 싶었다.
내 욕심을 채우기에 회사에서 좁은 인간관계는 독이었다.
일은 나 혼자 성실하기만 해서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팀원들과의 시너지, 상사와의 좋은 관계, 다른 팀과의 협력이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부정적으로 판단한 사람들과도 계속 만나야했고 함께 일해야했다.
처음에는 싫었다. 좋은 면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사람과 잘 지내고 싶지도 않았고, 시간을 오래 쏟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다. 나에겐 커리어적 성공이 우선순위였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협력하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너무 직설적이어서 부담스러웠던 사람은 윗사람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강직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지나치게 인간미가 없다고 판단되었던 사람은 사실은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돌보느라 여유가 없었을 뿐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정치적이고 실무는 하나도 모른다고 무시했던 상사가 일의 진행을 막던 다른 팀과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좋은 모습만을 본 건 아니었다. 친절해보이던 사람도 내가 막상 필요할 때는 등을 돌렸고, 성격 좋은 동기도 나와 승진을 두고 경쟁하게 되자 냉혈한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잘했고 못했고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에게 중요한 깨달음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다양한 면이 있어서 한 가지 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었던 쇼코도, 자신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쇼코도, 모두 다 진실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