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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Mar 18. 2021

가보지 않은 길은 정말 가시밭길일까?

"내 친구 녀석이 회사 퇴사하고 자영업을 하거든. 근데 아주 죽을 맛 이래. 회사가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거야, 지옥!! 그러고 보면 월급 받고 사는 게 가장 편한 것 같아"    


내가 입사 2년 차 일 때, 후배들을 잘 챙기기로 유명한 40대 과장님이 해준 이야기이다. 이 말은 몇 년 후 미생의 명대사가 되었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같은 백반집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점심을 먹는다. 내일도 아마 달라지는 건 없겠지. 매일같이 다채로운 반찬이 바뀌어 나오지만 그렇다고 맛있는 식사가 되는 건 아니다. 가장 싫은 것은 같은 백반집에서 점심과 저녁까지 먹는 날이다. 내 하루 중 유일하게 허락된 외출이 이 쓰러져가는 식당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지금의 내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3년 차 직장인, 나는 허울 좋은 한낱 미생일 뿐이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적당히 반응하며 웃어주는 것도, 매월 반복되는 업무에 익숙해진 것도, 적당히 분위기 파악하며 할 말 안 한말 가리는 것도, 가급적 튀지 않고 그레이톤으로 무장한 채 조직에서 살아남는 것도, 이제는 어느 정도 능숙해진 딱 그맘때 즈음이다.    


'회사 밖은 정말 지옥일까? 회사 밖을 나가서 과장님 친구분처럼 되면 어떡하지?'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텐데, 매일 내 선택을 후회하며 살면 어떡하지?'

'지금처럼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순한 양처럼 시키는 일 하고 여물만 먹고살까?'


네임밸류로 치면 이보다 좋은 곳을 갈 순 없었다. 이보다 튼튼한 울타리는 없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몰라도 내 회사명을 알아주는 곳에 다닌다는 것은 생각보다 편하고 안전했다. 그런데 그 울타리 안은 내게 형형색색의 꽃밭이 아니었다. 초록의 싱그러움이나 새싹은 볼 수 없는 지긋지긋한 겨울을 견디어내는 황량한 벌판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말라버린 나뭇잎이 나뒹구는 무채색의 흙밭에는 뿌연 안개만이 자욱했다.


이 튼튼한 울타리를 힘껏 박차고 나오는 일, 그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불도저 같은 강한 힘이 아니면 어지간해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울타리 사이사이로 건너편에 새들의 노랫소리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 밖이 궁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보고서 줄 맞추고, 엑셀의 현란한 솜씨를 구사하고, 매출을 올리는데 일조하고, 수많은 서류더미와 업무 요청들을 스케줄대로 착착 처리하는 일들 외에 나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찾고 싶었다. 당장 하루짜리 휴가도 눈치 보며 자리 비우기 어려운 처지지만, 내가 그 자리에 없더라도 회사엔 아무 지장이 없다. 또 다른 사람을 채우면 그만이다.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 빛깔과 내 색깔에 맞는 그런 일을 찾고 싶었다. 점점 나만의 색을 잃어가기 전에 말이다. 그 길이 가시밭길 일지언정, 황량한 사막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민과 갈등 속에 여러 날을 보내던 중, 갑자기 다리 저림 증상이 지속되었다. 마비가 되는 것도 같았다. 2주 정도 지속되고 주사를 맞아도 별 차도가 없어 별 뜻 없이 조금 큰 정형외과를 찾았다. 의사는 다짜고짜 엑스레이며 MRI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MRI는 큰 병일 때만 찍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여기 5번과 1번, 척추 사이에 까만 거 보이세요? 이게 디스크입니다. 보통은 우유빛깔을 띄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아주 까매졌어요. 게다가 옆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추간판 탈출증입니다. (흔히 말하는 디스크이다) 이 정도면 상당히 경과가 진행된 겁니다, 디스크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네?? 수... 수술이요?? 저 그냥 다리 저려서 온 건데... 허리디스크 수술이라뇨? 다른 방법은 없나요?"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수술해야 할 만큼 심각합니다."


갑작스러운 수술 소식에 일면식도 없는 의사를 앉혀두고 펑펑 울었다. 20대의 창창한 내가 허리디스크 수술이라니? 의사를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수술을 해야 하는지, 고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매달리고도 싶었다.


"젊은 양반, 뭐 그렇게 우세요? 암 진단받고도 웃으며 나가는 분도 있어요. 자자, 진정하시고 수술만 하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터벅터벅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 모든 게 허무했다.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 같았는데 허리디스크란 날벼락 소식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아파서 똑바로 걸을 수도 없었다. 모든 걸 가져도 건강하나를 잃으면 다 잃는 다는데 그런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러기엔 내가 너무 젊은데,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회사에는 뭐라고 말하지? 며칠 자리 비우면 싫어할 텐데.. 그래도 아픈 사람이 먼전데 위로는 해 줄까? 위로한다고 한들... 위로가 될까? 이런 절망감 속에서도 회사를 걱정하고 있는 내 처지는 뭘까?    


선배의 조언을 받아 3주간 병가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가 치료에 집중했다. 다행히 그 병원에서는 수술 대신 통원치료를 제안했다. 주 3회, 꼼작 없는 환자가 되어 병원과 집을 오가며 하루 종일 누워서 치료를 받았다. 허리디스크는 서 있어도 앉아 있어도 누워도 아프다. 거기에서 오는 깊은 우울과 절망감을 이겨내는 것도 내 몫이다. 할머니들과 함께 병상에 누워 고주파 치료와 도수치료를 받았다. 허리 근력 강화를 위해 윗몸일으키기도 했다. 병원에서 이 병을 이겨내고 반드시 탈출하고 싶었다. 여기가 내 끝이 아님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병원의 작은 창문 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마다 파란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그러나 나는 새장 안에 갇힌 파랑새다. 이 문을 열고, 저 넓은 하늘로 훨훨 날아갈 것을 다짐했다.


모든 게 선명해진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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