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얼마 전 작은 사이즈의 3단 책장을 구매했다. 안방에 나무로 된 옷걸이와 세트로 4단 장식장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곳은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이더니 볼품없고 지저분한 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매일 생활하는 곳이다 보니 책과 함께 나뒹구는 온갖 잡동사니가 점점 쌓여가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책더미들이 눈에 들어오자 지금 당장 청소기로 싹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그래서 당장 틈새에 놓을 수 있는 규격의 책장을 골랐다. MDF, 종이골판지 책장을 넘나들다 결국 원목 책장을 샀는데 배송기간이 무려 2주였다. 하지만 침실은 내가 잠자고 숨 쉬는 공간이니 이왕이면 좋은 원목을 택한 거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눈에 들어온 책더미와 선반장은 볼 때마다 청소본능을 일으켰다. 빨리 깔끔한 책장을 받아서 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선반장도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2주를 기다려야 하니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기로 했다.
며칠 후, 그보다 훨씬 뒤에 시킨 여러 가지 물품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아직 2주 안되었나? 족히 2주는 된 것 같은데? 택배사에서 내 것만 더 늦게 배달해 주는 거 아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만들어서 오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느려?' 체감 2주가 넘어가자 참지 못하고 배송현황을 조회했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날짜를 확인하니 이제 정확히 9일 차였다. 즉, 1주일이 갓 넘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전화를 걸면 조금이라도 빨리 챙겨주거나 답답함이 가실까 싶어 택배사 연락처를 받아 적으려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래, 그까짓 2주 기다려보지 뭐! 이런 일도 흔치 않은데.
어느새 1주일 배송, 3~4일 배송, 그리고 2일 배송을 넘어 다음날 배송과 당일배송이 가능한 시대까지 도래했다. 점차 빨라지는 배송의 속도감에 신기하고 놀라웠던 것도 잠시, 이제는 다음날 배송이 되지 않으면 느려서 속 터진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빨리 배송받는 게 당연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편리해진 것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이미 익숙해졌기에 며칠이라도 느리게 오는 걸 견디지 못하게 된 것만 같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모든 게 빠르게 흘러가는 만큼 우리의 인내심과 배려심도 함께 짧아진 건 아닐까? 호주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10+@ 년 전, 이미 인터넷 강국으로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인 나는 호주로 가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한국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전화와 이메일이 전부였다. 국제전화는 비싸기 때문에 거의 이용할 수 없었고, 부모님과 이메일로 가끔 안부를 전했다. 빠르게 자주 연결되지 못하는 만큼 이메일 한통에 우린 서로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썼고, 한국에서 매일 보던 때와 달리 처음으로 편지를 통해 서로의 애틋함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학교에서 인터넷을 활용하다가 처음으로 홈스테이집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나는 난생처음 복장 터질 만큼의 답답함을 느꼈다. 이메일에 접속하고 편지를 읽기까지 무려 2시간이 걸린 것이다. 첨부파일을 여는 건 엄두도 못 냈다. 한국에서 2분이면 끝날일이 1시간, 2시간이 걸리는 상상도 못 해본 일이 일어났다. 물론 학교의 인터넷은 그보다 훨씬 빨랐지만 한가로운 주택 단지 동네에서 인터넷은 '속 터질 만큼의 느림'이었다.
하지만 놀라웠던 건 인터넷 접속을 도와줬던 50대의 홈스테이 데디는 시종일관 온화한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에는 여유와 미소만이 넘쳐흘렀다. 짜증과 답답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긴 시간이 소요되는데도 그는 한결같이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매너와 평정심 있는 모습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토록 한국과 어렵게 접속된 만큼 한 번의 접속 기회가 내게 매우 소중하게 다가왔다. 온갖 노력과 인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지만 연결될 수 있는 만남! 그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귀했다.
택배가 도착할 날이 한참 남았지만 그로 인해 나는 택배가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더 애틋한 마음으로 기대심을 키우고 있다. 불편함을 겪은 만큼 소중함이 자라났다. 물건이 도착하면 반갑게 맞이해 주고 집을 깨끗하게 변신시켜야지!
모든 게 빠르게 변하고 흘러가버리는 시대, 재미없으면 1초 만에 채널이 넘어가는 시대, 1초 만에 시선을 잡지 못하면 스크롤이 넘어가는 무한 경쟁의 시대, 로딩이 몇 초가 넘어가면 쇼핑채널을 바꿔버리는 시대, 점점 더 빠르고 더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우리가 챙겨야 할 느림의 미학은 무엇일까? 빠르게 연결되는 것도 좋지만 때론 느리게, 때론 천천히, 그로 인한 불편함에서 오늘 또 다른 진귀한 가치를 찾아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