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3-4살 때쯤부터 나중에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했다. 아빠가 강요하거나 스리슬쩍 먼저 제안한 게 아니라 딸이 말한 게 분명하다. 아빠는 육아의 고충을 다 날려버릴 듯한 함박미소를 지으며 세상 흐뭇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본다. 가끔 고개도 끄덕이는데 '고롬고롬~ 내 새끼~' 하는 표정이다. 어깨에 뽕이 하늘만큼 솟아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다 몇 달 전(만 4세), 딸이 대성통곡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엔 내 사진을 본 게 시작이었다.어떤 연유로 나는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해외여행 사진을 뒤적이고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낯선 세계에서 설레는 경험을 쌓아가며 행복을 만끽하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 새로웠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맞아.. 나도 이런 때가 있었지. 지금은 마트에서 채소를 담으며 보람을 느끼는 나지만, 이 때는 정말 마트가 아닌 가슴 뛰는 곳을 다니며 버라이어티 하고 즐겁게 살았구나~'
딸이 뭐 하냐며 다가오자 엄마가 해외여행 다닌 사진들을 보여줬다. 엄마도 이렇게 세계를 누비며 자유롭게 날아다닌 때가 있었단다~ 후하하! 지금은 비록 집순이가 되었지만, 하하하.
- 우와~ 엄마 좋겠다~~~
- 여긴 무슨무슨 나라고, 여긴 무슨 나라란다^^
- 으잉~~ 엄마 좋겠다. 엄마 나만 빼놓고! 혼자 재밌는 데 다니고!!! 엄마 미워!!!! 혼자만 다 다니고!!!
갑자기 우는 아이. 당황해서 이런저런 말을 해보지만 소용없다. 아이는 본인을 빼놓고 갔다며 서럽게 울었다. 그러더니 얼마 후 갑자기 그 대상이 결혼사진으로 옮겨갔다. 며칠 전부터 결혼사진에 왜 자기가 없냐고 묻곤 했던 아이였다.
- 엄마 아빠 미워! 나만 빼놓고 결혼하고! 둘이만 결혼하고!!! 엉엉엉~~
- 아... 아니.. 엄마 아빠가 결혼을 해서 네가 태어난 거야~~
- 나도. 나도. 그래도 왜 나만 빼고 둘이만 결혼해~ 엉엉엉. 둘만 사진 찍고. 정말 너무 속상해. 엉엉
잠투정까지 더해져 아이는 우리 결혼사진을 들고20분간 엉엉 울었다.
사진을 갖고 집안을 휩쓸고 다니며 훌쩍이고 있다.
전해 들은 남편은 마냥 귀엽다며 껄껄대지만, 우는 아이와 긴 시간을 보냈던 나는 달래거나 대안을 제시할 방법도 없이 웃었다가 울었다가를 반복했다.
아빠는 아이가 고집부리고, 아이를 혼내서 아이가 아빠 밉고 싫다고 콧방귀 흥흥 뿜어댈 때도 가끔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 차 아이에게 묻기도 했다.
- 그래도 아빠랑 결혼할 거야?????
- 응!
아빠 win!
그런데 오늘, 대화중에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 정리 후 깔끔해진 수납장 위 결혼사진을 보더니)
- 저 결혼사진 보니까 나도 아빠랑 결혼하고 싶다.
- 아빠는 이미 엄마랑 결혼했는데?
- 엇? 그런데 아빠가 나랑 결혼한다고 했는데?
- 흠.. 그래??
- 나는 원래 아빠, 김리안(조카이름, 가명) 중에 누구랑 결혼할까 했는데. 음. 아 맞다
- 뭐???? 김리안???? 리안이랑 결혼을 생각했다고??
나는 마시고 있던 물을 뿜을 뻔했다. 조카는 1살 어린 동생인데 아이가 정말 친남매처럼 대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동생으로 100% 대하고,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또 잘 놀았다가 다투면 미워했다가 한다. 그리고 누나로서 역할도 잘 수행한다.
- 음, 아니 유치원에 박서준이랑 세명! 그중에 누구랑 결혼할까 했는데 박서준이는 너무 개구쟁이라서 안되고, 리안이랑 아빠 중에 아빠랑 먼저 결혼하기로 해서 아빠랑 결혼하는 건데?
뭐??? 후보가 또 있었어??? 너 그 친구 별로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 친구 얘기 꺼낸 적이 한두 번 밖에 없다. 그것도 딸을 자꾸 놀려서 싫다고 했었다. 오히려 놀이터에서 매번 같이 놀고싶어 하는 다른 친구가 있는데정말 의외였다) 으! 엄마는 유치원 그 친구 말만 들어도 별로던데! 아무리 후보 탈락이어도 결혼이라니! 오 마이갓!
- 아... 아아.. 그래.. 일단, 음. 친척끼리는 결혼을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넌 사촌동생인 리안이랑은 결혼을 못 하는 거야. 알겠지?
- 아.. 그렇구나? 친척끼린 결혼 못하는 거구나? 오케이! 알겠어^^! 그럼 아빠랑 하면 되겠다!
사실은 원래 가족끼리 못하는 건데, 가족이라고 아빠랑도 못한다고 말해버리면 아빠가 너~무 속상해할까 봐 엄마가 그건 당분간 비밀로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