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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나팍 Sep 13. 2024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만난 신데렐라

삼성 퇴사 후 유럽여행기 4

독일 뉘른베르크는 선물 같은 도시였다. 100년 전통의 크리스마스마켓을 실컷 느끼고, 뉘른베르크 성과 박물관을 구경하고, 소시지를 싫어하는 나도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환상적인 소시지도 먹었다. 소시지 파는 집도 100년 된 맛집이었는데, 이곳에선 100년이란 숫자가 이렇게 자주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매일이 다르게 빠르게 바뀌는 우리 사회에서, 100이란 숫자를 영위할 수 있는 힘이 놀라웠다. 놀랍도록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선 10년만 유지해도 대단한 일인데 말이다. 앞으론 그 기간이 100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워낙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더 자극적이고, 더 좋아야만 하는 인스턴트식 문화 속에서 100년 전통이 주는 소시지의 맛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놀라웠다. 전통의 깊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식감과 적당히 담백하면서도 짭조름한 맛, 그리고 너무 뜨겁지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까지, 완벽함을 선사했다. 1년에 1번 소시지를 먹는 나 같은 사람도 ‘매일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맛있었다. 게다가 로컬 독일 맥주와 독일식 김치인 사우어 크라우트와 환상의 궁합이었다. 한 동안 잊을 수 없는 먹는 즐거움과 맛의 향연을 만끽한 도시였다.


게다가 뉘른베르크에서 진짜 선물도 받았다. 한인 민박집을 운영하며, 본업은 뉘른베르크 발레단 소속인 민박집 사장님이 내게 발레 공연 티켓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티켓이 생기는 기회도 흔치 않고, 먼저 온 손님들도 제치고 내게 주신 거라 ‘내게 운이 좋다’고 했는데, 공연을 보고 나자 이 말에 공감수밖 없었다. 예정에 없었던 갑작스러운 공연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고, 날 밤, 오페라하우스에서 본 ‘신데렐라’ 공연은 최고라는 찬사도 아까울 만큼 내게 최고의 공연이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한국 시차로 새벽 5시를 향해갔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한 장면도 놓칠세라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며 빠져들었다. 다채로운 무대연출, 화려한 무도회, 장면별 획기적으로 바뀌는 분위기, 그리고 작은 몸짓으로 무대를 압도하는 신데렐라의 안무와 몸동작이 감동과 전율이 흐르게 했다.


무엇보다 신데렐라역의 발레리나에게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일본인이었다. 주인공을 맡은 그녀는 동양적인 작고 아담한 몸을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재투성이가 되어 작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무대를 미끄러지듯 넘나드는 모습을 보는 동안 주인공은 그녀만이 소화할 수 있는 딱 맞는 배역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타국에서 그녀가 주인공 배역을 맡기까지 얼마나 고단한 인고의 시간이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을까? 최고의 공연을 펼친 만큼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열정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관객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무대를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내 일을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모든 열정을 쏟아 일에 미쳐본 적이 있는가?

일이 재밌어서 밤새워 몰입한 적이 있는가?

내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보았는가?



이 질문에 내 대답은 모두 '아니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일하고 싶었다. 간절히 일에 몰입하고 싶었다. 내 일이 재밌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열정을 뿜어내고 , 일에서 보람과 가치를 느끼며 신나게 일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한 사람이었다.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내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일이 주는 성취감을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신데렐라처럼 당당하고 멋지게 공연을 펼쳐 보인다면 정말 좋겠다. 나의 강점과 역량이 발휘되는 나만의 멋진 무대를 만들어 싶다.


어느 무대에 서야 할지 몰라 일단 큰 무대를 선택했더니 영원히 무대에 설 날이 오지 않을 것이 보였다. 운이 좋게 발끝을 내딛을 수도 있겠지만 확률적으로 낮아 보였고, 주인공은커녕 무대 가장자리 구석에서 존재감 없는 역할을 할 것 같았다. 내 인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굴러갈 것이고, 그렇게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난 막상 무대끝자락에서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한 채 우울한 그늘에 가려져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삶은 싫었다. 내게 어울리는 무대를 선택하고, 멋지게 배역을 따 내고, 누구보다 최선으로 노력해 나날이 발전해 가는 직업인으로 살고 싶다. 마음껏 일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 기쁨과 희열, 고난과 역경, 성취와 보람, 소명 의식을 느끼며 감동과 여운을 주는 공연을 펼쳐 보이고 싶다.


지금은 어떤 공연의 어떤 배역을 맡을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공연을 보며 다짐했다. 언젠가 나도 신데렐라처럼 내게 꼭 맞는 배역을 찾을 것이라고 말이다. 미운오리새끼가 백조가 되듯이, 재투성이로 구박받던 신데렐라가 화려하게 변신하듯이, 나의 직업을 찾아 반짝이는 빛을 뿜어낼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모두가 반대했던 대기업 퇴사의 선택이 옳은 결정이었음을, 나는 반드시 증명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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