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8. 05. 월요일
날씨 : 흐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맑아짐. 그러나 쾌청해지지는 않음.
어젯밤 심사숙고하여 오늘의 방문지를 정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재빨리 외출 채비를 마쳤다. 오늘 방문한 곳은 교토시 북동쪽 외곽에 있는 마을 “오하라”와 그곳에 있는 사찰 “호센인”과 “산젠인”이다. 대학원 선배가 교토에 가면 꼭 한번 방문해 보라고 추천해 주신 곳이라 흥미가 생겼다. 오하라 마을이 교토시 내에 있긴 하지만 교토 중심부에서 버스로 1시간이 넘게 걸릴 만큼 멀리 있어서 오늘의 오전과 오후를 모두 투자하기로 했다. 다행히 환승 없이 한 번에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힘은 많이 들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오하라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교토 시내와 마을의 풍경을 보며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교토의 이곳저곳을 여행할 땐 지하철보단 버스로 이동하면 여행의 재미를 훨씬 더해준다. 오하라 마을은 산속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치 한국의 산골 마을 같은 풍경이었고, 호센인과 산젠인 등 주요 사찰과 관광지들을 가려면 정류장에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더 숲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니 동화 속에 나올 법한 풍경이 펼쳐졌다. 계곡과 나무 터널, 작은 다리 등의 자연적인 요소와 그 속에 아기자기하게 섞여 있는 작은 집들과 가게의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한참 더워질 시간대였지만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었고, 숲 속이라 그늘과 계곡, 나무가 많아 더위를 조금 경감시켜 주었다. 한마디로 상상 속의 평화로운 여름 여행의 모습 그 자체였다.
호센인과 산젠인을 방문하기 전,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미리 알아둔 근처 작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할머니께서 운영하시는 우동 가게였고, 난 후기가 좋았던 카레 우동을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 평범하면서 괜찮았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연식이 느껴지는 좌식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선풍기 앞의 일본식 풍경종 ‘후링’이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밖에선 매미 소리가 들렸다. 일본 학생들은 여름방학에 시골에 내려가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상상이 될 정도로 정겨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둘 중 가까운 산젠인부터 방문하였다. 입장료가 다른 사찰에 비해 살짝 비싼 700엔이라 의아해하며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관람 동선을 따라 먼저 사찰 내부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자 본격적으로 정원이 펼쳐졌는데, 그야말로 말문을 막히게 하는 아름다움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일본 정원 중 최고로 여겼던 은각사에 맞먹는 감명을 받았다. 개인적인 시각으로 은각사와 산젠인을 비교하자면, 은각사는 입장하자마자 정원의 대부분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한 번에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정원이고 산젠인은 마치 전시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듯이 다양하게 아름다운 정원들이 길을 따라 여러 개 이어져 있는 형태여서 마치 숨겨진 비밀의 정원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요소들이 자연과 융화되어 완성시킨 산젠인의 정원은 일본식 정원 조경의 극한이라 봐도 무방했다. 안쪽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보이는 정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마치 다른 세계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이런 곳이라면 자연 속에 묻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속세와 멀어진 것에 대한 위안을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은각사와 산젠인의 정원은 둘 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일본식 정원을 풀어낸 모범 답안들이라고 생각한다.
산젠인을 나와 호센인으로 향했다. 호센인에도 산젠인과 같은 정원이 있지만, 산젠인과 같이 정원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것이 주목적이라기보다는 실내에서 내부 정원을 바라보는 모습이 유명한 곳이다. 이는 한국 전통 건축 개념 중 하나인 경치를 빌린다는 의미를 가진 “차경(借景)”과 유사하다. 호센인에서는 이를 “액자 정원”이라고 표현한다. 호센인의 입장료는 900엔이었는데, 입장 시 마지막에 액자 정원을 관람하는 마루에서 말차 한 잔과 작은 떡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입장료 자체는 크게 비싼 편은 아닌 듯하다. 호센인 건물로 입장하기 전 옆의 샛길로 연결되어 있는 정원과 액자 정원 조경의 분위기는 산젠인과 비슷했지만 규모는 조금 더 작았다. 액자 정원에 도착해 정원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본능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른 뒤, 앉아서 말차와 떡을 먹으며 액자 정원을 바라보니 마음이 몹시 편안해졌다. 오하라 마을과 산젠인, 호센인 등 이곳의 모든 요소들이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편안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듯하다.
호센인을 둘러본 뒤 오하라 마을에 있는 작은 카페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산조 거리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배가 애매하게 고픈데 저녁 식사 메뉴도 딱히 생각이 안 나서 어제 가려고 마음먹었던 신신도 베이커리 산조점에서 빵을 몇 개 구매해 카모강변에 앉아서 먹었다. 빵 하나를 다 먹고 두 개째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새가 뒤에서 나타나 내 빵을 통째로 들고 날아가 버렸다. 처음엔 갑자기 옆에서 퍼벅 소리가 나서 누가 날 급하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새였다. 나도 정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놀라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내가 흰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내 옷이나 팔, 손 등에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정확히 빵만 들고 날아가버렸다는 것이다. 시트콤의 한 장면 같아 어이가 없고 웃겨서 무섭지는 않았다. 그냥 다음 빵 이어서 먹을까 하다가 또 빼앗기면 돈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아 그냥 더위도 식힐 겸 숙소로 돌아와서 먹었다.
숙소에서 빵을 먹고 좀 쉬다가 저녁 8시쯤 밤 산책을 하러 다시 나왔다. 고조 거리부터 니조 거리까지 카모강변을 걸으니 목도 마르고 살짝 출출하기도 해서 타치노미 술집을 들르기로 하였다. 그냥 생맥주 마시고 싶어서 핑계 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고조 거리 강변부터 니조 거리 강변까지가 거의 왕복 4km가 조금 넘는 거리이고, 걷다가 산조와 시조 거리 쪽을 더 구경하는 것까지 합치면 5~6km 정도 되는 것이다. 어느 술집을 갈까 고민하다가 여행 첫 주에 갔던 곳을 다시 가기로 했다. 그때 잠깐이지만 이야기를 나눴던 점원분도 있어서 나를 기억할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술집에 들어갔더니 마침 그 점원분이 계셨고, 단번에 나를 알아보셨다.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고 생맥주를 주문한 뒤 그분과 다른 점원분, 이렇게 셋이서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분 다 교토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대학생이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어느 대학생이던 다 비슷한가 보다. 두 분과 한국 드라마, 대학교, 일본여행, 한국여행 등 여러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신기하게 여행 마지막주가 되니까 현지인들과 길게 이야기하는 상황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운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나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 속에 녹아 있던 긴장이나 어색함이 여행을 하는 과정에 조금씩 풀어져서가 아닐까 싶다.
내일은 무엇을 할지 고민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인 만큼 남은 시간을 보다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귀국 전날에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을 사는 데에 주로 시간을 쓸 것 같아서 내일 무엇을 할지가 중요할 것 같다. 어젯밤처럼 자기 전까지 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