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8. 04. 일요일
날씨 : 오전의 나라는 매우 맑음. 오후 교토에 도착하니 조금 흐리다가 이윽고 장대비가 내림. 그러다 저녁때부터 다시 갬.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
나라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떠날 시간이 왔다. 짐을 싸고 긴테쓰 나라역으로 향했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날은 맑고 무더웠다. 숙소에서 역까지 갈 때도 어김없이 사슴들과 함께였다. 사흘간 사슴들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사람보다 사슴이 훨씬 더 느긋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먼저 사슴에게 다가갈 땐 만지거나 함께 사진을 찍는 등 사슴과의 접촉이 자연스러운데 반해, 사슴이 먼저 사람에게 다가가면 사슴을 정말 무서워한다. 마치 사슴 공원에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니고 사람 공원에 사슴들이 놀러 온 느낌이다. 사슴 입장에선 사람 구경이 참 재미있을 듯싶다.
다행히 긴테쓰 나라역에서 교토역까지 한 번에 가는 기차가 있었다. 오사카에서 올 때도 그렇고, 교통편만 보면 나라가 은근 다른 지역에서 오고 가기 편한 도시인 것 같다. 기차를 타고 40분여쯤 오니 교토역에 도착하였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덕에 교토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원래 교토역 코인 락커에 캐리어와 백팩을 보관해 놓고 “교토 타워”에 가려 했는데, 이미 코인 락커가 만석이었다. 결국 숙소까지 가서 짐을 맡기고 교토 타워로 다시 오기로 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나 이상하게 크게 배가 고프지 않아 교토역 “신신도 베이커리”에서 빵을 몇 개 사 들고 와서 숙소 로비에서 먹었다. 신신도 베이커리가 교토에서 역사가 오래된 유명한 빵집이라 언젠가 한번 가 보려 하긴 했는데, 교토역에도 그 체인점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빵 맛은 아주 훌륭했다. 달콤함과 담백함의 조화가 딱 적당했다. 시간 날 때 미리 찾아놓았던 산조 카와라마치 지점에도 꼭 방문해 봐야겠다.
빵을 먹으며 잠시 더위를 식힌 뒤 교토 타워로 향했다. 일본에서 오래 살다 온 대학교 친구에게 물어보았을 땐 교토 타워는 굳이 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들었기는 했지만 그래도 교토에만 2주 가까이 있었는데 교토 타워는 한 번쯤 가보고 싶어 가 보기로 결정하였다. 교토 타워 전망대는 100m 높이에 있었고, 11층으로 올라가서 다시 전망대 엘리베이터로 갈아타는 형식이었다. 전망대로 올라가니 바로 전망 공간이 보였다. 우메다 공중정원 옥상처럼 도넛 링 형태로 된 공간이었는데, 완벽한 실내 공간이었고 확 트여 있는 느낌도 별로 나지 않았다. 고도도 우메다 공중정원보다 낮은 셈이다. 여러모로 좋은 전망대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가 보았던 주요 관광지들의 방향과 거리가 표시되어 있어 망원경이나 육안으로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친구 말 대로 필수 관광 코스는 아니지만 교토 타워 전망대를 가게 된다면 여행 마지막 날 한번 들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교토 타워를 다녀오니 거의 오후 3시가 되어 딱 맞게 체크인을 했다. 이전에 머물렀던 숙소에 나흘 만에 다시 돌아오니 진짜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처음 이 여행을 계획할 때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다른 곳에 있다가 교토에 다시 돌아오면 진짜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까?’였는데 정말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한결 익숙하게 짐을 풀고 곧장 밀린 빨래를 하러 갔다. 오사카 숙소처럼 또 세탁기 3대 중 1대가 고장 나 있어서 세탁기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타이밍을 놓쳐 한참을 기다린 끝에 4시가 넘어서야 겨우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진짜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을 꼽으라 한다면 첫 번째가 빨래고 두 번째가 지역 이동이다. 귀국하기 전에 한 번 더 빨래를 할 생각인데, 그때까지는 고장 난 세탁기가 고쳐져 있었으면 좋겠다.
세탁기를 돌리고 방에 돌아오니 갑자기 밖에서 천둥번개와 장대비 소리가 들렸다. 1층으로 나가보니 하늘에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큰일 났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까 캐리어를 끌고 이동할 때 장대비가 내리지 않았음에 큰 안도감이 들었다. 빨래가 끝날 때까지 방에서 쉬다가 빨래가 끝난 뒤 옷들을 가져와 캐리어에 개어 두고 6시 반쯤 되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밖을 나가니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어 노을이 조금씩 지고 있었다. 나왔을 때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정말 여행 날씨는 항상 내 편인 것이 맞는 듯하다.
비도 그친 김에 또다시 카모강변을 따라 걸어 산조 거리로 향했다. 개어가는 하늘과 노을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낮과 밤, 맑고 흐림을 개의치 않고 항상 내 눈을 감동시켜 주는 카모강이다. 공격적으로 매력을 뽐내는 카모강에 반한 나는 다시 한번 교토를 좋아하게 되었다. 시조 거리 쪽에 도달하니 시조 거리부터 산조 거리 사이의 카모강변에서 무언가 행사를 한 듯, 강을 따라 현수막과 텐트들이 쭉 쳐져 있었고 간간히 차량도 다녔다. 무슨 행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끝나고 철수 중인 듯했다. 카모강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행사를 하는 것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다만, 텐트들이 강가 쪽에 설치되어 있어 강의 풍경을 가리고 있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오랜만에 산조 거리의 마츠야에 가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미리 알아둔 근처의 칵테일 바에 갔다. 일본에 와서 이자카야와 타치노미는 자주 갔지만 칵테일바는 처음이었다. 첫 방문인 만큼 가장 무난한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칵테일을 주문하려 했는데 메뉴판에 없었다. 바텐더에게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없냐고 물어보니 웃으면서 메뉴판엔 없는 메뉴라며 만들어 주셨다. 안주는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생선 아보카도 육회’를 주문하였다. 칵테일과 안주 둘 다 맛있었다. 점원분들께 아주 맛있다고 말씀드리고 혼자 맛있게 먹고 있는데 바텐더와 이야기하던 옆자리 손님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얼마나 여행 중인지, 교토 어디를 가 봤는지, 음식은 무엇을 먹어 봤는지, 교토가 왜 좋은지 등등을 물어보셔서 짧은 일본어와 영어로 열심히 대답해 드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은 나고야 사람이고 교토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라 이 칵테일바에 종종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손님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중간에 안주를 하나 더 주문하려고 메뉴판을 봤는데 “Korean Spicy Cucumber”가 있길래 혹시 오이소박이 말하는 건가 궁금해서 주문했더니 그냥 오이 썬 것 위에 초고추장 뿌린 것이었다. 가격이 저렴한 안주여서 당황스럽기보단 웃겼다. 나고야 타치노미만큼 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현지인들과 길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다시 카모강을 따라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밤에 숙소에 오니 정말로 여행이 끝나간다는 것이 실감되는 듯하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행의 시작이 될 4박 5일의 첫날밤이지만, 내게는 마지막 숙소에 왔다는 느낌이 더 강해서인지 괜히 씁쓸하다. 나에겐 안 좋은 버릇이 하나 있는데 바로 걱정을 당겨서 한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여행 마지막날 밤이 상상되어 괜히 아쉽고 섭섭하다. 자고 일어나면 이런 생각은 그만 잊고 마지막 교토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