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배운 '신뢰의 온도'

가장 위태로운 곳에서 피어나는 가장 단단한 믿음

by 김정교
two-egrets-quiet-connection-on-branch-m-005.jpg 봄빛 속에서 서로 교감하며 날개를 펼친 두 마리 백로의 아름다운 순간


뷰파인더 속에 담긴 하얀 춤


며칠째 머릿속에서 도돌이표처럼 재생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주말, 우연히 카메라에 담은 백로 두 마리의 사진이에요. 가느다란 나뭇가지 끝에서 두 녀석이 동시에 날개를 활짝 펼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잘 짜인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그냥 "와, 잘 찍었다" 하고 넘겼는데, 퇴근하고 돌아와 모니터로 다시 열어보니 기분이 묘해지더라고요.


햇살을 받아 은박지처럼 반짝이는 흰 깃털, 서로의 날개 끝이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찰나의 순간... 그 프레임 안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깊은 침묵과 여백이 가득했습니다.


경쟁이 아닌, 옆자리를 내어주는 공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은 게 있어요. 이 녀석들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전혀 없더라고요. 보통 새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쪼거나 밀어내기 바쁜데, 얘들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좁은 가지 위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맞추는 느낌이랄까요. 여러분은 혹시 누군가와 아무 말 없이 같이 앉아만 있어도 편안했던 경험 없으신가요? 굳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억지로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 말이에요. 이 백로들이 딱 그래 보였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공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란히 머무는 관계요.


불안정한 가지 끝, 그래서 더 빛나는 신뢰


제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아둔 건 사실 백로가 아니라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발밑'이었습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툭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나뭇가지 끝이었거든요. 누가 봐도 아슬아슬하고 불안해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위태로운 곳에서 녀석들은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데 부러움이 확 밀려오더군요. 우리는 보통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되고 안전할 때만 마음을 열잖아요. 통장 잔고가 넉넉하거나, 내 위치가 좀 안정적이거나 할 때만 사람을 들이려고 하니까요.


하지만 백로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흔들리는 곳에서도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어." 가장 불안정한 자리에서 피어난 신뢰라니... 어쩌면 진짜 믿음은 평온한 거실 소파 위가 아니라, 휘청거리는 벼랑 끝에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화는 요구가 아니라 여백에서


사진 속 두 마리는 마치 한 몸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기가 막히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관계에서 참 요구가 많은 사람입니다. "내 마음 좀 알아줘", "네가 좀 더 이해해 줘"라며 상대방을 내 식대로 바꾸려 들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며 반성했습니다. 진짜 조화는 상대를 쥐어짜서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줄 때 생겨난다는 걸요.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함, 그 여백 속에서 관계는 비로소 춤이 되니까요.


이 사진 한 장이 며칠째 제 마음을 흔드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삶이 자꾸 흔들리고 관계가 버거운 저에게 백로들이 건네는 위로였나 봅니다.


"삶의 가지 끝, 가장 위태로운 곳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


퇴근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붐비네요. 이어폰 꽂고 조용한 노래나 들으면서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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