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는 것도 괜찮아

흔들려도 결국 나를 다시 찾을 테니까

by 렌토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관심이 식다니.

그동안의 고민이 무색할 만큼, 생각보다 더 조용하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

유예기간 동안 마음정리를 잘해둔 덕분일까.

그렇게, 잔잔한 날들이 이어졌다.


모든 루틴이 달라졌다.

시간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옮겨왔다.

그의 일정으로 빼곡했던 달력은 텅 비어 있다.

약속을 잡을 때 공연 일정과 겹치는지부터 확인하던 일들도 더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인생에서 그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허전함은 생각보다 컸다.

우리는 팬 한 명 한 명이 소중했던, 아주 소규모 팬덤이었다. 적은 인원이 팬덤을 움직였고, 몇 명 되지 않는 만큼 각자의 역할도 아주 명확했다.

나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기에,

팬 활동 내내 사명감과 책임감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졸업 후 소속감을 잃은 것처럼 후련함과 공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혼자 있는 시간마다 습관처럼 그를 떠올렸다.

10년 간 매 순간 곁에 있던 얼굴과 목소리를 한순간에 끊어내는 건 아주 힘겹고 버거웠다.

이별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내 판단이 틀린 건 아닐까 매번 흔들렸다.

그 사람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이별이었기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나를 괴롭게 했다.

후유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이별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습관적으로 찾던 그를 지우기 위해 SNS를 삭제했고,

팬들과도 연락을 줄이며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마음 한켠에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쓸데없는 걱정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내가 없어도 괜찮을까?

혹시 나를 찾지는 않을까?

내 빈자리를 느끼지는 않을까?

나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떠오르는 생각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감정은 스위치처럼 한 번에 꺼지지 않으니까.

한없이 따스했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문득 그리워지기도 했다. 나만 바라보고 노래하던 순간, 무대 위에서 함께 웃던 순간, 무대 아래서 나눈 다정한 대화까지.

이렇게 좋은 기억들이 아직도 선명한데, 내 결정이 정말 옳은 것일까 스스로에게 계속 되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제넘게 죄책감도 느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고,

나만큼은 영원할 거라 감히 확신했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약속을 어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남았다.

조금만 더 견뎌봤다면 다른 결말이 있지 않았을까.

내 사랑이 부족해서 버텨내지 못한 걸까.

후회가 남기도 했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은 대가는 통증으로 돌아왔다.

수술과 입원, 두 달간의 병가로 처음으로 오랜 휴식을 맞이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오로지 몸의 회복에만 집중했다.


다른 생각을 꺼낼 틈이 없었다.

수술 후 떨어진 체력을 회복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소박한 밥을 차려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그저 하루를 보냈다. 움직임이 제한된 탓에 최소한의 활동만 하며, 단순하게 먹고 자고 쉬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단조로운 날들에 익숙해질 무렵, 마음속에 얽혀있던 복잡한 응어리들이 나도 모르게 하나둘 풀려가고 있음을 느꼈다.


직장에 복귀한 뒤에도 평온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즐겁고 행복했지만 늘 쫓기듯 달리던 시간에서 벗어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사람을 떠올리는 횟수도 점점 줄고, 요동치던 감정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이 잔잔함이 의외로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런 날들도 나쁘지 않다.






아직 모든 게 완벽하게 정리된 건 아니었다.

굿즈와 티켓들은 상자 속에 고이 담겨 있고, 사진과 영상도 아직 다 지우지 못했다. 모두 다 지워버리면 10년의 기록 전부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제 그 모든 걸 추억으로 남겨두고

나는 지금을 살아가려 한다.


어쩌면 나는 그 사람보다 그 시절의 내가 더 그리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도 결국은 시절인연일 뿐이었다.

적당한 시기에 만나 원 없이 좋아했고, 잘 떠나보냈다.

그거면 됐다.

때맞춰 찾아온 긴 휴식 덕분에, 이제야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치열하게 사랑했고, 치열하게 이별하는 중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기에, 지금의 잔잔함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다.

내 방식대로 잘 마무리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어렵게 되찾은 삶의 균형은,

뜻밖의 소식에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