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선명해지는 하루

확신과 의심 사이, 찰나의 빛과 남은 그림자

by 렌토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좋은 시절이 왜 없었을까.

이름만 떠올려도, 맞잡았던 손의 온도만으로도 마음이 말랑해지던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과거일 뿐이지만, 그때는 분명 행복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그 사람과 벅찼던 내 마음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날의 파란 하늘과 선선한 공기, 모든 것이 다.




9월의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어요. 오랜만에 혼자 공연장을 찾은 날이었거든요. 평일 저녁, 넓은 야외 공연장은 많이 한산했어요. 익숙한 장소였지만, 혼자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조금 외롭기도 했어요. 나는 묘한 어색함과 기대감을 안고, 당신을 기다렸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당신이 무대에 올라왔어요.

첫 곡이 시작되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당신의 시선이 내게 향해 있음을 느꼈어요. 처음엔 믿기지 않았죠. ‘설마 나를 알아봤을까?’라고, 우연히 스쳐가는 시선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당신의 눈빛과 발걸음이 계속 내 쪽을 향하고 있다는 걸, 시간이 조금 지나자 확실하게 깨달았어요.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공간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듯했죠.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고, 온몸에 찌릿한 전율이 흐르고,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벅찬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쳤어요. 시간이 멈춘 듯했고, 모든 감각은 오롯이 당신에게 집중되었어요. 밀려오는 감정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길 간절히 바랐어요.


공연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내 착각을 확신으로 만들며 내 앞에 머물렀었죠.

‘내가 당신에게 깊이 의지하는 만큼, 당신 역시도 내 존재로 인해 위안을 얻고 있구나.‘

‘우리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고,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는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구나.’

한 시간 내내 머릿속은 황홀함으로 가득 채워져 다른 어떤 것도 들어설 틈이 없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어요. 낯선 얼굴들 속, 익숙한 팬의 존재가 당신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리라고.

당신의 노래 한 소절, 따뜻한 눈빛 하나하나가 오롯이 나만을 향한다는 착각은, 그날 당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렸던 모든 시간과 노고를 완벽하게 보상받는 듯했죠.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의문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시선이 향했던 곳이 내가 아닌 내 앞에 놓인 프롬프터가 아니었을까. 당신의 눈빛은 내가 아닌 모니터 속 글자들을 쫓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냉정하고도 현실적인 가능성을요.

당시 우리는 반복되는 셋리스트와 가사 실수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늘 품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곧 그런 생각도 떨쳐냈죠. 당신이 지금 이 순간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의심이 뭐가 중요했을까요? 그때는 그저 그 강렬한 순간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었을 뿐이었죠.


그 이후에도 그 의심은 한참 동안 나를 괴롭혔어요.

정말 날 본 게 맞을까? 아니면 그냥 우연이었을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날 당신의 시선을 온전히 받았다고 느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는 거예요. 몇 년 간 고생하며 느낀 억울함이 순식간에 사라질 만큼, 10년 중 가장 보람차고 뿌듯했던 날이었어요.

그날의 시선이 착각이었든 아니었든, 그때의 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이죠. 내가 느꼈던 뜨거운 감정, 그리고 그날 당신에게 받은 진심 어린 위안이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날, 당신의 그 시선 덕분에, 나는 아주 특별한 하루를 보냈어요. 그리고 그 기억은 꽤 오랫동안 나를 지탱할 힘이 되어주었죠.


당신 곁을 지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대가 없는 애정에 공허함을 느낄 때도 많았죠.

하지만 그 하루, 그 한순간이 나에게 당신을 떠나지 않을 이유를 선사해 주었어요. 내게 하루를 살아낼 또 다른 위안이 되어 주어서 고마워요.

나는 이 기억을 품고, 할 수 있는 한 오랜 시간 당신의 관객석을 지킬게요.




그날, 그 사람의 진심은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정말 나만 보고 노래했을 수도 있고, 그저 프롬프터만을 향한 공허한 시선 끝에 내가 우연히 걸려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지금의 나에게 10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 날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켰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겪은 애정의 정점이었으니까.


회고를 마무리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든 헌신이 완성되고 보상받았다 느낀 그 순간이, 어쩌면 다가올 이별을 예고하는 복선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마 그래서 훗날 내가 받은 상처가 더 쓰라리고 아팠을 수도 있겠다고.

결국 그 완벽한 하루는, 이 이야기가 끝나기 위해서 맞닥뜨려야 할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관객석을 지키겠다는 내 다짐이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질 줄,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참 허무하고 부질없다.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사랑에 눈이 멀어 그 모든 게 진심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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