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지 않는 선택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by 렌토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정인을 짐작할 수 없도록 일부 설정은 각색되었습니다.




“너도 내가 잘 되길 바라잖아.

그래서 나를 도와주는 거잖아.“



보통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고마움과 함께 마음의 빚 비스무레한 게 생긴다.

그걸 꼭 갚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마음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팬의 진심에 자신이 무언가를 돌려줘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자신은 늘 도움을 받는 사람이고, 팬은 당연히 제공해야 하는 존재에 가까웠다.

고마움과 더불어 따라오는 부채감이나 책임감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 자체가 없으니, 이상하다고 느낄 리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는 늘 뒤에 물러나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갈등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책임이라는 짐을 져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모든 행동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당신이 잘 되길 바랐다.

그래야 당신의 음악을, 무대 위 당신의 모습을 더 오래 듣고 볼 수 있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늘 당신을 먼저 생각하며 애썼다.

팬이니까. 우리에게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그 희생을 방패 삼아,

당신이 비겁하게 뒤로 숨을 줄은.




외부 프로젝트 관련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지 않게 하려 항의했을 때도,

사적 친목을 공적인 팬덤 영역으로 끌고 온 점을 지적했을 때도,

진부해진 공연과 멈춘 성장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건넸을 때도,

본인만 믿으라고 큰소리쳐놓고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던 그 순간에도,


그는 늘 같은 선택을 했다.


설명하지 않았고, 책임지지 않았으며,

상황이 알아서 정리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대로 돌아왔다.

본인 때문에 이 모든 갈등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결국 회피한다.

그는 그렇게, 늘 안전한 뒤편에만 서 있었다.






그의 침묵은 특히 특정 팬들 앞에서 더 견고해졌다.

공적인 영역을 넘어 사적인 친분까지 깊게 쌓였던,

소위 말하는 ‘올드팬’들.

그들은 정보를 독식하고, 그를 독점하려 했다.

새로 유입되는 팬은 그들에게 견제의 대상이었고, 무시와 배척은 일상처럼 반복되었다.

그들과 척을 지는 순간 그와도 멀어질 게 분명했기에, 늘 억울함을 삼키며 참아야만 했다.


더 큰 문제는 그 역시 그 선을 확실하게 그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사적인 친분과 팬으로서의 공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았고, 그때그때 자신이 편한 자리에만 머물렀다.


중재도, 정리도 없었다.

그의 방관은 누군가에게는 권력이 되었고,

밀려난 다른 누군가는 계속 상처를 받았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예민하고 편가르는 문제 있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질문한 쪽이 불편한 사람이 되었고,

침묵한 쪽이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그를 망치려고 나선 게 아니었다.

그가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 사람은 그 어느 쪽에도 없었다.

우리의 영역에도, 심지어 올드팬의 영역에도 없었다.

다만 저 멀리서 그저 갈등이 끝나기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침묵은 몰라서가 아니었다.

피하는 게 가장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책임이 생기고, 입장을 밝히는 순간 선택을 해야 하니까.


그는 그런 피곤한 과정을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무대응.


그가 침묵하면 갈등은 팬덤 내 문제로 남게 된다.

침묵만 한다면 그는 언제나 ‘상처받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는 상황을 해결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스스로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 사이에 생긴 균열과 상처는, 늘 우리의 몫이었다.




결국 그의 회피는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알면서도 택한 계산적 결론이었다.


한때는 묵묵하게 인내하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하지만 외면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갈등도 상처도 계속 반복되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침묵을 깨고 나와야만 했다.


나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회피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뒤로 숨었지만, 나는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는 침묵을 택했고,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졌다.

적어도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지는 않았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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