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독재자의 등장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로부터 로마 왕권을 물려받는 데 성공했다.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였다. 그때는 BC 532년이었다. 그는 평민뿐만 아니라 권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도 멸시했다. 여러 관습, 법, 정부 형태 등 이전의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여러 제도를 무시하고 철폐했다. 그리고 통치 형태를 독재로 바꾸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먼저 외국인이든 원주민이든 가장 용감한 수하들에게 칼과 방패를 주어 경호원으로 삼았다. 그들로 하여금 밤에는 집 주변을 지키게 했고 낮에는 어디에 가든 따라다니게 했다. 이렇게 해서 어떤 음모가 발생해도 보호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이어 수시로 또는 정해진 시간에 시민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주 가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만 나타났다. 그는 공공 업무를 집에서 처리했다. 그때에도 신뢰할 수 있는 부하들 외에는 아무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했다. 포로 로마노에는 가끔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누구에게도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사람을 불렀다. 접견 허가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우호적이거나 부드럽지 않았다. 그야말로 독재자처럼 잔인하고 화를 잘 냈다. 상냥하고 다정하기보다는 잔혹했다.
계약과 관련해서 생긴 논란에 결정을 내릴 때에는 법이나 정의가 아니라 기분에 따랐다. 이런 이유로 로마인은 그에게 수페르부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거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에게는 ‘노인’이라는 뜻인 프리스쿠스라는 별명을 달았다.
타르퀴니우스는 권력을 확고하게 굳혔다고 생각했을 때 지지자 중에서 가장 저열한 사람들을 매수해서 여러 저명한 인사들을 고발하게 한 뒤 재판을 통해 사형시켰다. 툴리우스를 권력에서 쫓아낸 걸 후회하면서 그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어 변화에 분노하는 사람들이나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했다. 고발당한 사람들에게는 엉터리 죄를 다양하게 뒤집어 씌웠다. 주로 왕에게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그는 직접 재판관 자리에 앉아 기소 내용을 들었다. 기소된 사람 중 일부는 사형 당했고 일부는 추방당했다. 이들의 재산은 모두 압수했다. 재산 대부분은 직접 챙기고 일부만 고발자에게 나눠주었다.
로마의 지도자급 인물들은 음모의 이유를 눈치 채고는 기소당하기 전에 로마를 독재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집이나 시골에서 붙잡힌 사람은 비밀리에 살해당했다. 그들의 모습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원로원 의원 상당수를 사형시키거나 종신 추방한 다음 그 자리에 지지자를 앉힘으로써 새로운 원로원을 구성했다. 이런 의원조차 그가 지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게 했다.
결국 툴리우스 치하에서 원로원에 등록했고 평민과 갈등을 빚었던 의원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 정부 형태의 변화가 그들에게 이익이 될 거라고 기대했던 사람은 더 이상 정부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그들뿐만 아니라 평민도 언론의 자유를 빼앗겨버렸다. 그들은 운명을 한탄하고, 지금보다 앞으로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막을 힘이 없다는 걸 걱정하면서도 현재 상태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은 처음에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귀족이 벌을 받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단순한 생각에 귀족의 불행을 기뻐했다. 독재자가 원로원에게만 부담이 될 뿐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평민에게 더 큰 고난이 찾아왔다. 툴리우스가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시행했으며, 계약과 관련해서 평민을 귀족에게서 지켜줬던 법이 있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법을 모두 폐기했다. 심지어 법을 기록한 명판도 남겨놓지 않고 포로 로마노에서 떼어내 파기하라고 지시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인구조사에 기초한 세금제도를 폐기하고 이전 방식을 부활시켰다. 왕에게 돈이 필요할 때면 가난한 사람도 부자와 똑같은 세금을 내야 했다. 이런 조치는 평민 상당수를 망가뜨렸다. 모든 사람은 무조건 200아세를 내야했다.
그는 또 어떤 종류의 집회도 열지 못하게 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 그를 몰아낼 비밀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로마에서는 부족 주민, 쿠리아 구성원, 도시나 시골의 이웃 사람들이 모여 종교의식이나 희생 제례를 공통으로 개최할 준비를 하는 게 상례였다.
타르퀴니우스는 여러 곳에 정보원을 보내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염탐하게 했다. 이들은 사람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때로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처럼 독재자를 비난하기도 했다. 정보원은 현재 상황에 불평을 갖고 있는 사람을 독재자에게 밀고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처벌은 매우 가혹하고 잔인했다.
타르퀴니우스는 평민 중에서 충성심이 강하고 전쟁에 적합한 자들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 평민은 공공사업장에서 일하게 했다. 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왕은 항상 큰 위험에 노출되는 자리이지요. 그런데 시민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낮고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게 놀고 있군요.”
타르퀴니우스는 할아버지가 미완성인 채로 물려준 일을 완성하고 싶었다. 배수구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모두 이 공사장에서 땀을 흘려야 했다. 그들은 빈약한 수준의 곡식을 임금으로 받았다. 일부는 석재를 채취하는 일을 했고, 다른 일부는 목재를 베는 일을, 또 다른 일부는 재료를 운반하는 마차를 몰았다. 각종 자재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일부는 하수관거를 파거나 그 위로 아치를 세웠으며 열주회랑을 만들기도 했다. 아니면 여러 목수, 석공, 대장장이 등 기술자를 돕는 일에 매달렸다. 기술자는 개인 가게를 꾸리지 못하고 공공사업에 묶여야 했다. 이런 일에 지친 사람들은 쉴 수도 없었다. 귀족은 그들의 고통은 생각하지도 않고 평민이 고통 받는 걸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중단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권력을 합법적으로 쟁취하지 않고 무력으로 장악한 사람에게는 원주민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구성된 경호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모든 라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힘센 사람의 호의를 얻으려고 했다. 바로 옥타비우스 마밀루스였다. 그는 율리시스와 키르케의 아들인 텔레고노스의 후손이었다. 투스쿨룸에 살고 있었으며, 정치력이나 군대 지휘력에 있어 독보적인 실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사위의 호의를 얻은 뒤에는 그의 도움을 받아 각 도시의 수장들과 교류했다. 마지막에는 사비니 족과 전쟁을 벌여 전쟁 지휘력을 발휘하기로 결심했다. 사비니 족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툴리우스가 죽었기 때문에 로마와의 조약은 효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