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의 책략과 가이비 정복
로마에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알바인이 세운 라틴족의 도시가 있었다. 프라이네스테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 건설된 도시였다. 도시의 이름은 가비이였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 도로 주변에만 일부 살고 있다. 대부분 여관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크고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많은 사람은 오늘날 그곳에 서 있는 성벽과 건물 잔해 등을 보고 당시 얼마나 크고 중요한 도시였는지를 짐작한다.
타르퀴니우스가 수에사를 점령했을 때 그 도시에서 달아난 포메티니인과 로마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가비이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가비인에게 그들이 당한 일을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재산을 되찾는다면 엄청난 보상을 하겠습니다. 로마인이 도울 것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을 뒤집는 게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볼스키의 도움을 받아 타르퀴니우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입시다.”
이후 가비이와 로마는 서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상대 영토를 침공했다. 때로는 전군을 동원해, 때로는 소규모 부대만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비이군은 로마군을 도망치게 했고, 성벽까지 쫓아가기도 했다. 거꾸로 로마군이 가비이군을 내몰고 성 안에 가두기도 했다.
이런 일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양측은 성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병력을 파견해 농부들에게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성채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해 도적떼와 소규모 적군을 궤멸시키기도 했다. 양측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래서 공격에 취약하거나 사다리로 쉽게 넘어올 수 있는 성 주변에 해자를 파거나 성벽을 높이게 됐다.
타르퀴니우스는 미리 준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많은 일꾼을 동원해 해자를 넓히고 성벽을 높이고 감시탑 설치 간격을 줄이는 등 가비이 방면의 도시 방어를 강화하는 데 애썼다. 이전부터 가비이 방면 성벽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다른 쪽은 매우 튼튼해서 적이 침투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길어지면 모든 나라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특히 적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토지가 황폐해져 곡식을 수확할 수 없게 되면 더 그렇게 되듯이, 두 나라는 심각한 물자 부족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확산에 시달리게 됐다.
물자 부족은 가비이인보다 로마인에게 더 심각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심각한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어떤 조건이라도 전쟁을 끝낼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런 상황에 실망했지만 전쟁을 불명예스러운 조건으로 끝낼 수도, 더 이상 끌 수도 없게 됐다. 그는 모든 종류의 술책을 고안하고 모든 종류의 계략을 꾸미려고 애썼다. 그의 아들 중에 섹스투스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계획을 제안했다.
“네 제안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무모하고 위험하구나. 하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시도해 보아라.”
섹스투스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문제를 두고 아버지와 갈등을 빚은 척했다. 타르퀴니우스는 미리 짠 계획에 따라 포로 로마노에서 아들을 매질하고 여러 가지 모욕을 주었다. 이런 소문이 외국에까지 퍼지게 했다. 섹스투스는 친구 여러 명을 탈주자로 꾸며 가비이로 보냈다.
“다른 로마 도망자들과 함께 받아주십시오. 아버지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섹스투스는 이곳으로 도망쳐 올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전쟁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이비인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섹스투스는 도망자로 꾸며 가비이로 달아났다. 많은 친구와 클리엔테스도 데리고 갔다.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을 가비이인이 믿게 하려고 많은 금과 은도 챙겨갔다.
나중에 더 많은 사람이 로마에서 도망쳐 그에게 합류했다. 마치 타르퀴니우스의 독재정치에서 달아난 것처럼 꾸몄다. 섹스투스는 가비이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다.
가비이인은 로마에서 넘어온 많은 사람을 세력 증강이라고 생각했다. 단시간에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섹스투스는 수시로 로마에 쳐들어가 많은 전리품을 빼앗아왔다. 그래서 가비이인의 신뢰는 더욱 커졌다.
타르퀴니우스는 아들로부터 어디에 쳐들어가는지 미리 들은 뒤 그곳에 다른 장소보다 많은 물건을 가져다놓고 일부러 방비도 소홀히 했다. 시민 중에서 평소에 의심하던 사람들을 그곳에 보내 경비를 서게 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가비이인은 섹스투스를 진정한 친구이자 뛰어난 장수로 믿게 됐다. 게다가 많은 가비이인이 뇌물을 받아 그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게 했다.
섹스투스는 속임수와 책략으로 큰 권력을 얻었다. 그는 하인 중 한 명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버지에게 가비이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아들에게 보낼 지시 내용을 하인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는 하인을 데리고 정원으로 갔다. 정원에는 양귀비꽃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꽃 사이로 걷다가 작대기로 가장 큰 꽃을 내리쳐 꺾어버렸다. 여러 차례 질문하는 하인에게 어떤 대답도 주지 않은 채 가비이로 돌려보냈다.
타르퀴니우스는 밀레투스 사람 트라시불루스를 흉내 낸 것처럼 보인다. 코린트의 독재자 페리안데르가 그에게 사람을 보내 권력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트라시불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페리안데르가 보낸 사람을 데리고 밀밭으로 가더니 이삭을 꺾어 땅에 던져버렸다. 페리안데르는 저명한 시민 여러 명을 죽여 버렸다.
섹스투스는 아버지가 한 행동의 의미를 이해했다. 가비이의 유명 인사들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한 걸 눈치 챘다. 그는 민회를 열어 이렇게 하소연했다.
“저는 친구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도망 왔습니다. 여러분에 저에게 했던 약속을 믿었지요. 저는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일부 가비이인이 저를 붙잡아 아버지에게 넘겨주려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권력을 모두 내려놓고 가비이를 떠날 생각입니다.”
가비이인은 섹스투스의 말을 듣고 분노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는 평화로운 시기에 매우 훌륭한 조치를 많이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여러 차례 나서 시민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안티스티우스 페트로의 이름을 댔다. 페트로는 당황했다.
“저는 결백합니다. 어떤 조사라도 받겠습니다.”
“사람을 보내 안티스티우스의 집을 수색해보십시오.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저는 여기서 안티스티우스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이 제안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집을 얼마든지 뒤져 보십시오.”
섹스투스는 이미 안티스티우스의 하인 여러 명을 뇌물로 구워삶아 조작한 편지를 집에 숨겨 두라고 했다. 이 편지에는 타르퀴니우스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사람들이 수색을 하러 갔을 때 편지 여러 통이 발견됐다. 편지들은 민회에 제출됐다. 그 중 타르퀴니우스의 문장이 찍힌 편지를 들고 섹스투스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문장은 제 아버지의 것입니다. 제가 모를 리 없지요.”
섹스투스는 편지를 뜯어 비서에게 건네주었다. 비서는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아들을 산 채 내게로 보내시오. 불가능하다면 머리를 잘라 보내시오. 이미 약속한 보상을 보내겠소. 당신은 물론 힘을 보태준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리다. 그들을 로마 귀족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뿐만 아니라 로마에 집과 땅을 나눠주고 다른 선물도 주겠소.’
편지 내용을 들은 가비이인은 안티스티우스에게 분노했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놀라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가비이인은 그를 돌로 쳐 죽이고 섹스투스를 공모자 색출 조사관으로 임명했다. 섹스투스는 로마에서 데려온 동료들을 성문으로 보냈다.
“공범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성문을 잘 지키도록 하라.”
섹스투스는 가비이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들의 집으로 병사들을 보내 즉석에서 목을 베게 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런 일이 진행되면서 가비이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아들이 보내온 편지로 상황을 다 알고 있던 타르퀴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가비이로 진격했다. 그는 한밤중에 성문 근처까지 접근했다. 약속한 대로 성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성 안으로 들어가 아무런 희생도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자 가비이인은 앞으로 닥쳐올 운명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독재자에게 붙잡힌 사람들이 흔히 겪는 비극처럼 대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운이 좋아도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노예가 될 거라고 한숨만 지었다.
그런데 성격이 잔혹하고 적을 처벌할 때 냉혹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타르퀴니우스는 가이비인이 걱정하던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가비인 중에서 누구도 사형시키지 않았고 추방하지도 않았다. 재산을 빼앗지도 않았다. 그는 민회를 소집해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원래 로마의 것이었던 도시를 로마에 회복했을 뿐이오. 모든 가비이 시민에게 재산을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하겠소. 모든 사람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겠소.”
타르퀴니우스가 이렇게 한 것은 선의 때문에서가 아니었다. 로마인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는 최선의 방책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목숨을 구제받고 재산도 지킨 사람들의 충성심이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가비이인이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런 양보 조치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가비이인은 로마의 친구다’라는 조약을 문서로 만들어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또 희생제물을 바치고 신에게 맹세했다.
로마의 유피테르 피디우스 신전에 이 조약의 기념물이 남아 있다. 로마인은 유피테르 피디우스를 산쿠스라고 부른다. 이 기념물은 조약을 체결할 때 희생제물로 바친 소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나무 방패다. 타르퀴니우스는 가비이 문제를 해결한 뒤 아들 섹스투스를 가비이 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귀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