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덕에 마을이 살았구나

by leo



몸과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추운 겨울이 지나면 세상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봄이 옵니다. 산과 들에는 예쁘고 화사한 꽃이 피고, 추위를 피해 숨어 있던 동물들도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만약 1년 내내 겨울만 있고 봄이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먼 북쪽나라에 사람들에게 이런 심술을 부린 나쁜 마법사가 있었습니다. 아주 높고 험해서 보통 사람들은 올라가기 힘든 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뜻한 봄날이었습니다. 마법사는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착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습니다.


‘봄을 없애야겠어. 1년 내내 겨울만 되도록 만들어야지. 온 마을이 눈으로 덮이게 할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정말 괴로워하겠지?’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봄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시 겨울이 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모든 집의 지붕까지 덮여 있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인 탓에 마을에서 다 걷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옆집에라도 오갈 수 있게 힘을 모아 터널을 팠습니다. 이렇게 해서 겨우 길을 뚫은 뒤에는 회관에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마을 대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꼭대기에 사는 마법사에게 사람을 보냅시다. 제발 심술을 그만 부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마법사를 만나러 산꼭대기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 산으로 간다는 건 정말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다들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습니다.


“내가 다녀오도록 하지요. 아무리 심술 많은 마법사라도 나이가 많은 내 말은 들을 거요.”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말렸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빨리 걷지도 못하잖아요? 그렇게 걸어서 산꼭대기에 언제 가겠어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제가 다녀올게요.”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말에 깜짝 놀라서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안 돼. 너는 거기 가기에는 너무 어려. 게다가 따뜻한 외투는커녕 모자나 목도리, 장갑도 없잖아.”


소년은 이번에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소처럼 튼튼하고 산양처럼 빨라요.”


이웃집 할머니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얘야! 가다가 얼어 죽을지도 몰라. 추위를 피할 곳도 없을 텐데.”


소년은 이웃집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제게는 작지만 따뜻한 가슴이 있어요. 할아버지는 물론 마을 사람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찬 가슴이에요. 이 정도라면 추위를 견디고도 남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습니다.


“그래. 다녀오너라. 너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아이라는 걸 나는 알지. 너를 믿어.”


마을의 한 어린이가 앞으로 나오더니 소년에게 따뜻한 외투를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먼 마을에 가서 많은 돈을 주고 사온 것이어서 매우아끼던 옷이었습니다.


“이걸 빌려줄게. 입고 가렴.”


다른 어린이는 아주 두터운 장갑을 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산을 돌아다니며 힘들게 사냥한 곰 가죽을 팔아 사온 비싼 장갑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장갑이야. 정말 따뜻할 거야.”


다른 어린이들은 아주 예쁘고 하얀 모자, 여우털로 만든 푹신한 목도리, 양털로 짠 포근한 양말을 빌려주었습니다. 마지막 어린이는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든 긴 구두를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산꼭대기를 향해 집을 나섰습니다. 소년은 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옷과 장갑, 모자, 목도리, 양말, 구두를 빌려준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의 사랑이 나를 지켜줄 거야.”


소년은 산꼭대기를 향해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멀어 보이던 산꼭대기가 늦은 오후 무렵에는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났습니다. 산꼭대기에 쌓인 눈에는 햇빛이 반사돼 눈을 뜨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때 높은 산을 지키던 돌풍의 신이 갑자기 거센 바람을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힘이 센 어른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눈 덮인 높은 산을 어린 소년이 두려움 없이 오르는 게 그를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나의 영토를 침범하는 거지?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건가? 네가 어디로 가는지 잊어먹을 때까지 거친 바람을 계속 보내주도록 하지.”


돌풍의 신이 보낸 바람은 소년 주변을 거칠게 몰아쳤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외투 깃을 세우고 팔짱을 꼭 끼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 걸었습니다. 돌풍의 신은 결국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눈 위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정말 대단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여동생 눈보라의 여신을 불러야겠어.”


잠시 후 오빠의 목소리를 들은 눈보라의 여신이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오빠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눈보라의 여신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다.”


여신의 두 손에서는 세상을 다 뒤덮을 만큼 많은 눈이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입에서는 온 세상을 꽁꽁 얼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나왔습니다. 눈보라는 한 시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쓰러져 버렸을 것입니다.


소년은 거친 눈보라에도 전혀 굴복할 뜻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목도리를 꼭 두르고 양가죽 구두를 무릎까지 끌어당기더니 마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것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결국 눈보라의 여신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렸습니다. 그녀는 한참이나 숨을 헐떡이더니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습니다.


“헉헉! 나도 저 아이를 멈출 수가 없어.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돌풍의 신과 눈보라의 여신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겨울의 마법사였습니다. 세상에서 봄을 없애버리고 겨울만 계속 이어지게 한 그 나쁜 마법사였습니다. 그는 아들과 딸이 외치는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는 지체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미 모든 걸 다 보고 있었지. 내 말을 들어 보거라. 힘으로 항복을 받아낼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돼. 친절을 베풀면 되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뽀뽀를 한다는 건가요?”


돌풍의 신은 무슨 말인지 몰라 아버지 마법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아주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거지. 소녀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을 거야.”


겨울의 마법사는 돌풍의 신과 눈보라의 여신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바람과 눈을 더 이상 쏟아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신 다른 곳에 가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겨울의 마법사는 훌륭한 왕처럼 꾸미고는 소녀 앞에 나타났습니다. 눈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하얀 옷을 입었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왕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을 꽁꽁 얼게 만들던 추운 바람이 거세게 불었는데 지금은 따뜻한 바람이 몸을 녹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기적을 보고 있는 건가? 정말 따뜻해. 자장가를 불러주던 어머니, 아버지 목소리가 기억나. 한 번만 더 자장가를 들었으면. 여기 앉아서 잠시 쉬면서 듣고 싶어.’


소년은 눈 위에 앉아 두 눈을 감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잠이 쏟아져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겨울의 마법사는 승리한 것처럼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자, 이제 잠들도록 해라. 아이야. 아무런 걱정 없이 여기서 영원히 편안하게 잘 수 있단다.”


겨울의 마법사는 쓰러진 소년을 그냥 내버려두고 산 위로 날아갔습니다. 아들인 돌풍의 신과 딸인 눈보라의 여신에게 고집 센 아이를 어떻게 제압했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눈 위에 쓰러진 소년은 행복하게 웃으며 잠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의 얼굴 색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분홍색이던 뺨은 처음에는 빨개지더니 나중에는 파래졌고, 맨 마지막에는 마치 초처럼 하얘졌습니다. 소녀는 눈 위에서 서서히 얼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소년 옆에서 눈이 꿈틀거렸습니다. 찍찍거리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눈 속에 있던 작은 구멍에서 작은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아주 작고 하얀 생쥐였습니다. 생쥐의 눈은 매우 검게 빛났습니다. 생쥐는 소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착한 아이에게 무서운 일이 생기겠구나.’


생쥐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잠시 후 눈 사이로 수많은 구멍이 생기더니 수많은 생쥐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들은 소년에게 달려가더니 팔과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하지만 생쥐는 덩치가 너무 작아서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친구인 토끼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토끼들아. 어디 있니? 너희들이 필요해.”


이번에는 눈 사이에서 조금 큰 구멍이 생기더니 하얀 토끼가 수없이 튀어나왔습니다. 토끼들도 생쥐들과 함께 소년을 주물렀습니다. 눈 덮인 소나무에 숨어 있던 다람쥐들도 아래로 내려와 소년을 주물렀습니다.


잠시 후 소년의 몸은 하얀색과 갈색 털로 덮였습니다. 동물들은 털을 이용해 열심히 소년의 몸을 데웠습니다. 소년의 얼굴은 다시 조금씩 분홍색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은 정말 기뻤습니다. 잠시 후 소년은 눈을 떴습니다.


“얘들아, 정말 고마워. 너희들이 나를 살렸구나.”


“이렇게 추운 산에 왜 온 거니?”


소년은 동물들에게 산 아래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왜 산 꼭대기에 올라왔는지도 이야기했습니다. 동물들은 한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끝이 없는 겨울 때문에 정말 힘들어. 함께 가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산꼭대기를 향해 걸었습니다. 동물들은 소년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마침내 소년과 동물들은 겨울의 마법사가 사는 ‘얼음 궁전’의 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소년은 문을 두들겼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겨울의 마법사에게 이상한 일이 생긴 건가?”


“들어가 보자. 문이 잠겨있지 않아.”


소년과 동물들은 힘을 모아 무거운 문을 열었습니다. 소년이 맨 먼저 들어갔고, 동물들은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얼음으로 만든 복도를 지나 아주 큰 유리방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정말 크고 멋있는 의자가 있었습니다. 얼음을 조각해 만든 의자였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화려한 은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람쥐 두 마리가 할아버지 무릎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꼬리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간질였습니다.


“애취!”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재채기를 했습니다. 소년과 동물들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을 뜨더니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꼬마 친구들.”


소년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내가 여기서 잠든 동안 겨울의 마법사가 봄을 없애버렸다는 거로구나. 그리고 1년 내내 겨울만 이어지게 했고. 그 녀석이 나를 속였군. 하지만 이제 모든 걸 알게 됐으니 이대로 놔둘 수는 없지. 나를 깨워줘서 고마워. 어린 친구들. 이제 자연의 질서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겠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아주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마치 봄바람에 날린 꽃씨가 온 세상으로 져나가듯이 휘파람은 천천히 궁전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이곳저곳에서 사슴들이 나타났습니다.


“겨울 마법사를 잡아와서 내년 겨울까지 감옥에 가두도록 해라. 그리고 하늘에서 모든 구름을 걷어내서 태양이 눈을 다 녹게 만들어라.”


굳게 닫혀 있던 ‘얼음 궁전’의 문이 잠시 후 활짝 열렸습니다.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은 환하게 웃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던 눈은 태양의 뜨거운 입김을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조금씩 녹아 내렸습니다.


소년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쉬웠습니다. 눈이 다 녹은데다 곳곳에 봄꽃이 예쁘게 피어 마치 즐거운 소풍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년은 산중턱까지 따라온 동물 친구들과 아쉽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오렴. 힘 닿는 데까지 도와줄게.”


마을에서도 지붕까지 쌓였던 눈이 모두 녹아내렸습니다. 산에서 녹은 눈과 얼음이 물이 돼 마을 옆의 개울로 졸졸 흘러갔습니다.


“다시 봄이 왔어. 소년이 겨울을 몰아냈구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저녁에 축제를 열기로 하고 집집마다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소년이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할아버지는 훌륭한 일을 마친 손자를 무등 태워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보다 더욱 기뻤던 것은 다시 세상에 돌아온 봄이었습니다. 겨울에 눌려 눈밑에 깔려 있던 봄은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더 반갑게 맞아주는 것을 보고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 해 봄에 높은 산은 물론 산 아래 마을에 핀 꽃은 어느해보다 예쁘고 향기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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