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부모를 잃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다행히 착한 주인을 만나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언덕에 양 수백 마리를 몰고가 풀을 뜯게 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소녀는 아주 정직하면서 성실했습니다. 호기심도 많아 무슨 일이든지 관심을 두곤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늘 칭찬을 들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천천히 떠나니고, 언덕 위에 선선한 바람이 불던 날이었습니다. 소녀는 평소처럼 양들을 언덕에 풀어놓고 나무 밑에 드러누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고, 그냥 바람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 보기로 했습니다. 숲에 불이 나서 나무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작은 뱀 한 마리가 불에 갇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뱀은 소녀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발 도와줘. 나중에 꼭 보답할게.”
소녀는 덜덜 떨고 있는 뱀을 쳐다봤습니다. 평소 뱀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왠지 불쌍해 보여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소녀는 양을 몰고 다닐 때 사용하는 기다란 지팡이를 불에 휩싸인 뱀에게 밀어 넣었습니다. 뱀은 재빨리 지팡이를 타고 오르더니 소녀의 팔을 지나 목을 감았습니다. 소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와줬더니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니?”
“그런 게 아니야. 기어다닐 힘이 없어서 그래. 너무 두려워하지 마. 나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줘. 그러면 아버지가 큰 보상을 주실 거야. 그분은 뱀들의 왕이거든.”
“하지만 양떼를 놔두고 갈 수는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없더라도 양떼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네 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나는 모르잖아.”
“내가 길을 가르쳐줄게.”
양치기 소녀는 뱀을 구해준 김에 아예 집에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습니다. 주인에게서 동물을 도와주면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양떼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 두기로 했습니다.
어린 뱀이 말하는 길을 따라 한참이나 걸은 끝에 소녀는 산 중턱에 도착했습니다. 뱀은 큰 문이 달린 동굴을 꼬리로 가리켰습니다. 동굴 입구에는 엄청나게 많은 뱀이 모여 있었습니다. 뱀은 그들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굴 입구의 문이 위로 올라갔습니다. 소녀는 뱀을 데리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린 뱀은 소녀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어보실 거야 그러면 동물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해달라고 해. 아버지는 다른 걸 주려고 하실 거야. 하지만 다른 건 절대 받지 않을 거라고 해.”
뱀들의 왕은 양치기 소녀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뱀이었습니다. 두 눈은 마치 보석이라고 박힌 듯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껍질은 빨간색과 노란색, 그리고 검은색이 섞여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머리에는 값진 보석 수백 개가 빼곡히 박힌 왕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들아! 어디에 다녀오는 거냐? 네가 나쁜 일을 당한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단다.”
“불에 휩싸여 타죽을 뻔 했답니다. 이 소녀가 저를 구해줬어요.”
어린 뱀은 아버지에게 언덕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왕은 놀란 표정으로 아들의 말을 아주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아들의 말이 끝나자 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소녀를 보고 말했습니다.
“너에게 큰 신세를 졌구나.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거라.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
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건 안 돼. 너무 위험해. 다른 걸 이야기해보렴.”
“다른 건 갖고 싶은 게 없어요.”
왕은 고민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소녀를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아주 똑똑하고 고집이 세 보여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이리 가까이 오거라. 네 입을 내 입에 갖다 대고 숨을 세 번 쉬도록 해. 나도 너의 입으로 숨을 세 번 쉴 거야. 그렇게 되면 너는 모든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양치기 소녀는 뱀들의 왕이 시키는 대로 그의 입에 숨을 세 번 불어넣었습니다. 왕도 소녀의 입에 숨을 세 번 불어넣었습니다.
“이제 너는 모든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명심할 게 있어. 네가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다른 사람에게 절대 이야기해서는 안 돼. 그 말을 하는 순간 너는 당장 죽고 말거야. 내 경고만 늘 기억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양치기 소녀는 산에서 데려와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던 양떼에게 돌아갔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엄청난 모험을 했기 때문인지 피곤했던 소녀는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소녀는 한참을 잔 뒤에야 추운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난 탓에 뱀을 구해주고 뱀들의 왕을 만난 게 꿈이었는지 진짜 있었던 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사실일 리 없어. 내가 꿈을 꾼 거야. 동물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이야.’
양치기 소녀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고 할 때 소녀가 누워 있던 나무의 높은 가지에 까마귀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둘은 서로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누워 있는 양치기 소녀는 이 나무 밑에 보물이 잔뜩 묻혀 있다는 걸 알면 정말 놀라겠지?”
“멍청한 인간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우리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할 텐데.”
한참이나 시끄럽게 떠들던 두 까마귀는 깔깔 웃으면서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나무 아래 누워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녀는 그제야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양치기 소녀는 다시 한 번 눈을 비볐습니다. 방금 까마귀의 대화를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니면 꿈결에 잘못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정말 두 까마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가? 내일 올 때 삽을 가지고 와야겠어. 나무 밑을 파보면 내가 꿈을 꾼 건지 아니면 진짜 동물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알게 되겠지.’
양치기 소녀는 두 까마귀가 말한 나무에 아무도 알 수 없는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다음날 소녀는 양떼를 몰고 언덕으로 올라가면서 삽도 가지고 갔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소녀는 나무 아래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약 1m 정도 파내려갔을 때 삽 끝에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계속 땅을 팠습니다. 마침내 나무 아래에서 금화가 잔뜩 들어 있는 큰 상자가 나타났습니다. 까마귀 두 마리가 나눈 대화는 엉터리가 아니었고, 소녀는 까마귀들의 대화를 알아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보물을 발견해 흥분한 소녀는 양떼를 언덕에 내버려둔 채 보물 상자를 주인에게 가져갔습니다. 주인은 정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착한 소녀라는 걸 하느님이 아시고 선물을 내려주신 거로구나. 이건 내 것이 아니야. 모두 너의 것이지. 이제 양치기 일은 그만 두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라.”
주인은 소녀의 행운을 정말 기뻐하면서 보물을 모두 소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소녀는 금화로 농장을 사고 집도 샀습니다. 그래서 금세 부자가 됐습니다. 여러 해 뒤에는 아주 잘 생긴 청년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소녀가 결혼한 다음 해의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습니다. 소녀는 과거에 자신처럼 추운 날씨에도 언덕에서 양떼를 몰고 다니느라 고생하는 목동들이 불쌍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목동이었을 때 정말 외로웠어요. 집에서 포근한 난로 옆에 앉아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받는 다른 아이들을 늘 부러워했지요. 우리를 위해 일하는 가여운 목동들에게 깜짝 선물을 줘야겠어요. 고기와 음식을 만들어 언덕에 가지고 가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눠 주는 거예요. 당신이 목동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동안 양떼는 내가 돌보도록 할게요.”
소녀는 하녀들과 함께 서둘러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말에 고기와 음식을 잔뜩 싣고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소녀는 목동들이 남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밤새 양몰이 개들과 함께 양떼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자정 무렵 무서운 늑대들이 양떼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늑대들은 양떼를 지키는 개들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리를 안에 들어가게 해줘. 양들을 죽여서 우리랑 고기를 반씩 나눠먹는 거야. 어때?”
양몰이 개들은 대부분 어렸고 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늑대들의 나쁜 유혹에 쉽게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늙은 개 한 마리는 으르릉거리며 반대했습니다.
“내게는 이빨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아. 하지만 늑대가 안으로 들어오면 한 마리 정도는 물어뜯을 수 있어.”
늙은 개는 다른 개들과는 달리 밤새 혼자서 양떼를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소녀는 늑대들과 개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다만 모른 척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녀는 목동들에게 젊은 개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새로 개들을 데려와 훈련시키라고 했습니다. 목동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주인은 정말 대단해. 겨우 하룻밤 만에 젊은 개들이 쓸모없다는 걸 다 알아챈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일 거야. 일을 제대로 안 하면 금세 들통 나겠지.”
소녀와 남편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녀는 말을 아주 부드럽게 몰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채찍을 연이어 날리며 말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말은 울부짖으며 하소연했습니다.
“주인님, 제발 자비를 베푸세요. 채찍은 그만 날리세요. 저는 더 이상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옆의 말은 가벼운 안주인만 태우고 가지만, 저는 무거운 주인님 외에도 항아리와 빵 바구니, 고기 바구니도 싣고 간답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한 달 전에 비해 두 배는 무거워졌답니다.”
소녀는 말이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남편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터져나온 소녀의 웃음을 보고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왜 웃는 거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남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소녀의 말에 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살이 쪄서 말이 힘들어한다고.”
“아니에요. 그냥 혼자 웃고 있는 거랍니다.”
남편은 더 화를 내면서 소녀를 내버려두고 혼자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는 방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소녀와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토라진 남편을 달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제발 화를 푸세요.”
“왜 웃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당신과 이야기하지 않을 거요.”
“그 이유를 말하면 저는 바로 죽게 된답니다. 그래도 괜찮나요?”
“죽는다고?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남편은 터무니없는 소녀의 말을 듣고 더 궁금해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녀가 왜 웃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어서 말해주시오.”
소녀는 남편의 재촉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알겠어요.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먼저 제가 누울 관을 하나 만들어 오세요. 제가 왜 웃었는지 이유를 설명하면 저는 바로 죽을 테니까요.”
남편은 지체하지 않고 목수를 불러 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의 어두운 곳에 관을 가져다놓았습니다. 소녀는 아주 슬픈 표정으로 관 안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소녀에게 벌어진 일은 금세 동물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언덕에서 양떼를 돌보던 늙은 개는 날아가는 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는 주인을 지켜야한다면서 집으로 달려가 주인이 누운 관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으르렁거렸습니다.
“나는 주인님과 함께 갈 거야.”
언덕에서 달려온 늙은 개의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마음이 정말 따뜻해졌습니다.
“너는 정말 충실한 나의 친구로구나. 네게 마지막 선물을 줘야겠어.”
소녀는 늙은 개에게 고기와 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늙은 개는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때 헛간에 있던 암탉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뛰어나와 개 대신 고기와 빵을 뜯어먹었습니다. 개는 암탉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너는 정말 염치없는 동물이구나. 네 주인이 이제 곧 바보 같은 남편 때문에 죽게 됐는데 너는 빵이나 뜯어먹고 있다니.”
하지만 암탉은 개를 보고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늙은 개 할아버지. 내가 왜 저렇게 어리석은 주인에게 동정심을 가져야 해요? 남편이 협박한다고 해서 벌벌 떠는 아내는 그런 꼴을 당해도 싸요. 남편이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시킬 수 있겠어요?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면 거절하고 집에서 쫓아내는 게 당연하지.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잖아요.”
늙은 개와 암탉의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암탉의 말이 맞아.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왜 비밀을 남편에게 이야기해주고 죽어야 해? 헤어지면 그만이지.’
소녀는 관에서 나온 뒤 바로 관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불러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저를 죽이려 하는군요. 이제 내게는 남편이 필요 없어요. 내 집에서 나가세요.”
소녀는 그날로 당장 남편을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충실한 늙은 개와 함께 새로 사랑하게 될 청년이 나타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