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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01. 2022

루드밀라

“경기도 구리에서 대형 싱크 홀 붕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지름이 20m나 되는 큰 사고였습니다. 싱크 홀이 발생한 지점은 지하철 8호선 공사구간이었습니다. 구리시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에게 임시 대피하라고 권유했습니다.”

다소 흥분한 TV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식당 안을 쩡쩡 울렸다. ‘속보’라는 글자가 붙은 TV 화면에는 ‘구리에서 대형 싱크 홀 발생…인명 피해는 없어’라는 내용의 자막이 흘러갔다.

아나운서는 상세한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다시 전해주겠다면서 알아듣기 쉽지 않은 경제 뉴스로 주제를 바꾸었다.

“요새는 안전한 데가 없어. 길을 걷다 재수 없으면 그대로 땅에 파묻혀 버리는 거잖아.”

식당 입구 쪽에 앉은 주인 할머니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루드밀라를 보면서 말했다.

상복처럼 까만 상의를 입은 그녀는 할머니 말에 동조한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조심해야지요.”

루드밀라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화면 맨 위에 자리 잡은 시계는 12시 40분을 가리켰다. 휴대폰에 카톡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10분 정도 늦을 듯. 미안!’

루드밀라는 하나뿐인 딸 지니와 함께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남편을 만날 일이 있으면 늘 가던 곰탕 식당이었다. 할머니가 친절한 데다 음식이 맛있어 남편은 물론 그녀도 좋아하는 곳이었다.

남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할머니는 여러 해 단골손님인 루드밀라를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특히 루드밀라가 국제결혼을 하는 바람에 고향인 체코를 떠나 먼 타향에 혼자 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마치 친딸처럼 대해주었다.

대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한 은석은 제법 큰 무역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주로 옛 소련권 국가에 물건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업무의 특성상 저녁에 일이 몰릴 경우가 많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일러도 밤 11시였다.

은석은 체코의 IT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하는 계약을 맺기 위해 회사 이사와 함께 프라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사는 먼저 귀국하고 그는 나머지 일을 정리하기 위해 혼자 1주일 정도 프라하에 남아 있었다.

루드밀라는 프라하 출신이었다. 그녀는 은석이 방문한 IT 대기업에서 매일 오후에 시간제로 일했다. 생활비나 용돈이 모자랐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 경험을 하고 싶다는 게 그녀 생각이었다. 둘이 만난 곳은 바로 그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였다.

“미안해. 많이 늦었지?”

은석은 1시가 넘어서야 식당에 도착했다. 둘은 원래 12시 30분에 만나 같이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11시부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갑자기 밀리잖아. 내일이 토요일이라서 유럽 쪽에서 메일이 막 들어오는 거야. 후배들에게 맡기고 올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해.”

루드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은석이 들어오는 걸 본 할머니는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곰탕을 세 그릇 가지고 왔다. 반찬은 깍두기와 김치, 그리고 지니에게 특별히 선물로 주는 계란 프라이였다. 할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배고플 텐데 어서 드시구랴.”

루드밀라는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은석과 지니에게 건네주었다. 그녀의 곰탕 그릇에서 고기 건더기를 덜어내 은석의 그릇에 담아주었다.

곰탕은 체코에서 즐겨 먹던 고기 수프비슷한 느낌을 주는 음식이었다. 곰탕을 좋아하는 것은  때문이었다. 그녀는 건더기보다는 국물을  좋아했다.

배에서부터 시작해 온 몸을 감돈 뒤 나중에는 손과 발까지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국물의 온기 때문이었다. 하지여서 약간 더워지는 날씨였지만 따끈한 국물이 배에 들어오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루드밀라가 은석과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은 쇼핑 때문이었다. 둘은 프라하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체코를 떠나 귀국한 이후 처음이었다.

프라하에 가자고 제안한 사람은 루드밀라였다. 결혼하고 8년 만에 처음 그녀는 부모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은석은 아내로부터 부모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한두 번 물어보기는 했지만 아내는 대답하기를 싫어했다.

은석도 부모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고아원에서 자랐던 그는 누구든 부모 이야기를 묻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아내가 불편하게 여기는 걸 보고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랬던 아내가 갑자기 프라하의 부모를 만나러 가자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프라하 외곽의 블라트체에 부모님이 살아 계셔. 평생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고 생각했어.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네. 그 분들을 만나러 가야겠어.’

루드밀라는 왜 갑자기 부모 이야기를 꺼냈는지, 왜 갑자기 그들을 만나러 가야하는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은석은 그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드밀라는 출발에 앞서 부모에게 줄 선물을 살 생각이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었지만 남편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백화점이 있었다. 쇼핑을 같이 한 뒤 루드밀라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은석은 회사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은석이 생각보다 늦게 회사에서 나온 탓에 시간이 촉박했다. 3시까지는 회사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루드밀라와 은석은 곰탕을 서둘러 먹어야 했다. 다행히 국물 음식이어서 급하게 먹어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무리 급해도 천천히 드시오. 체할라. 저승사자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부엌 입구에 서서 은석 일행이 밥 먹는 모습을 보던 할머니 등 뒤에서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멈, 여기 와 보시오. 갑자기 불이 꺼졌어. 그것 참 이상하네.”

할머니가 매일 식당에서 반찬을 만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사흘에 한 번씩 식당 안쪽 마당에 내걸린 큰솥에 소뼈를 넣어 고는 게 고작이었다.

할머니는 투덜거리면서 마당으로 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다투듯 나누는 이야기가 들렸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불 하나도 제대로 못 지켜요?”

“그게 아니라니깐! 방금까지 잘 탔는데 갑자기 꺼졌어.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은석은 노부부의 다툼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아내, 아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다시 회사에 들어가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루드밀라의 귀에는 불이 꺼진 걸 두고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주 크게 잘 들렸다. 그녀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루드밀라와 은석이 곰탕 식당에서 나온 시간은 1시 20분 무렵이었다. 대형매장은 식당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거기서 1시간 30분 정도 쇼핑을 한다면 물건을 골고루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미 집에서 구매목록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상점만 제대로 찾으면 물건 사기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매장으로 가는 도로에서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있던 깔끔한 인도는 사라지고 간단한 안전가림막이 세워졌다. 공사를 진행 중인 차도는 물론 인도에도 돌기가 우둘우둘하게 솟아나온 복공판이 깔렸다. 은석은 지니의 손을 꼭 잡았다.

루드밀라는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면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보, 조심해요. 미끄러질지도 몰라요.”

은석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왼손을 올려 흔들었다.

공사장 쪽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큰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루드밀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사장 지하에서 뿌연 먼지가 올라왔다.

“앗!”

먼지를 쳐다보던 루드밀라는 복공판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에 깔린 복공판이 갑자기 위로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발이 걸린 것이었다. 이런 길을 걷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앞으로 한 바퀴 구르고 말았다. 머리에 두르고 있던 띠는 복공판 틈 사이로 떨어져버렸다. 가슴에 달고 있던 배지는 부서졌다. 외국인지원센터 직원이라는 걸 알려주는 배지였다.

“여보! 괜찮아!”

앞에 가던 은석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돌아와 루드밀라를 일으켜주었다. 흙먼지에 긁힌 그녀의 손바닥에서 아주 미세하게 피가 흘렀다. 까만 상의에는 지저분한 흙이 잔뜩 묻었다.

은석 옆에 서 있던 지니는 엄마가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놀란 모양이었다. 엄마의 손바닥에서 피가 나는 걸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루드밀라는 딸의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괜찮아. 지니야. 손바닥이 약간 긁힌 거야.”

루드밀라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 물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았다. 검은 옷에 묻은 먼지도 말끔히 닦아냈다.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인지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루드밀라는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시간을 살펴보는 건 그녀의 습관이었다. 최근 들어 시간을 보는 일이 더 잦아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쫓기는 느낌이 그녀를 계속 졸라댔다. 휴대폰 시계에는 1시 24분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여보, 이러다 시간이 모자라겠어요. 어서 가요.”

“당신 괜찮아요?”

“네. 이제 조심할게요. 이번에는 내가 앞에서 지니를 데리고 갈 테니 당신은 뒤에서 따라와요. 내가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잘 지켜줘요.”

루드밀라는 말을 해놓고 금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지켜달라는 말을 꺼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뱉은 단어처럼 느껴졌다.

은석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아내의 말과 행동은 평소와 매우 달랐다. 어딘지 불안해 보였고 초조해 하는 것 같았다.

루드밀라는 작은 가방을 왼쪽 어깨에 걸고 오른손으로는 아들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이제는 한눈을 팔지 않고 복공판을 잘 살폈다. 100여m 앞에 매장이 나타났다. 그녀는 잠시  멈춰 은석이 잘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남편은 10여m 뒤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루드밀라는 지니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앞으로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른쪽의 공사장 구석에는 지하에서 파낸 것처럼 보이는 흙이 쌓여 있었다. 옆에는 지하 공사장으로 내려가는 통로 같은 계단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곁눈질로 흙더미와 계단을 힐끔 쳐다보았다.

“쿠르릉! 쿠르릉!”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산에서 흙더미가 쏟아지는 것 같기도 한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루드밀라는 발아래 복공판을 쳐다봤다. 굉음은 그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복공판은 끼익끼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툭툭 하면서 복공판을 연결한 볼트가 하나씩 둘씩 튀어나왔다. 루드밀라의 머리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지?’

루드밀라는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앞을 쳐다봤다. 이어 뒤를 돌아보았다.

깜짝 놀란 표정의 은석은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한 것 같았다.

루드밀라는 은석을 향해 달려가려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찌된 것인지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기는커녕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정용 볼트가 모두 빠진 복공판은 서서히 아래로 기울었다. 주변에 잡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어린 딸을 꼭 껴안은 채 소리를 질렀다.

“은석 씨!”

“쾅! 콰르릉!”

인도에 깔렸던 복공판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은 루드밀라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온 직후였다. 순식간에 인근의 모든 복공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 공사장 아래로 떨어졌다.

루드밀라와 지니도 밑으로 추락했다. 공포에 질린 그녀의 외침은 뒤늦게 떨어지던 다른 복공판에 부딪혀 반사되는 바람에 땅 위로 올라가지도 못했다.

루드밀라는 추락하면서 균형을 잃는 바람에 지니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조금씩 정신을 잃어갔다. 눈은 점점 흐릿해졌다.

은석은 루드밀라가 지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가 서 있는 바로 앞부분까지 복공판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 모든 걸 가려버린 그의 두 눈에는 어두운 땅 밑으로 떨어지는 아내의 두 발만이 보일 뿐이었다. 복공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너졌다. 불과 10여 초 뒤에는 그가 서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무너져 내렸다.

은석은 너무 무서워 두 눈을 감았다. 이제는 죽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더 이상 복공판이 무너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떠보았다.

은석 바로 앞에는 엄청나게 큰 구멍이 지하로 뚫려 있었다. 작게 잡아도 구멍의 지름은 20m가 넘어보였다. 그는 무너지지 않은 마지막 복공판의 끝 부분을 밟고 서 있었다. 불과 10㎝만 더 앞으로 갔다면 그도 루드밀라와 지니를 따라 땅 밑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은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덜덜 떨었다. 다리가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구멍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아내와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드…밀~라! 지…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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