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Aug 04. 2022

빨간 수첩

“엄마! 안 돼!”

지니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은 바싹 말랐고 이마와 목에는 땀이 홍건하게 맺혔다.  충격을 받은  얼굴은 하얘졌다. 그는  손으로 거칠게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의 침대였다.

지니는 안심이 되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야~옹!”

하얀색 털에 노란색 점이 박힌 고양이 얀과 파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두 고양이는 나이가 많아 사람으로 치면 할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 지니는 어릴 때부터 키우던 두 고양이를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햇살이 암막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지니의 눈을 간질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리즈에게서 전화는 물론 문자도 열 통 정도 들어와 있었다. 휴대폰 시계는 벌써 오후 3시를 넘은 지 오래였다. 화들짝 놀란 지니는 얼굴이 노래졌다.

지니는 늦잠을 잔데다 악몽까지 꾼 것이었다. 그는 최근 들어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내용은 똑같았다. 어릴 때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던 장면이었다.

늦잠을 잔 이유 중 하나는 아빠였다. 휴일이지만 여행 가이드인 아빠는 일하러 가야 했다. 남들에게는 쉬는 날이지만 아빠에게는 손님을 관광지로 데리고 다녀야 하는 날이었다. 그는 토요일에 출근할 때에는 딸이 더 잘 수 있게 짙은 암막 커튼을 쳐주곤 했다. 그래서 해가 어지간히 높이 솟아도 지니는 그걸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있었다면 깨워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니도 가끔 엄마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지니 엄마는 5년 전 한국에서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지니 아빠는 원래 회사원이었다. 프라하에서 근무하다 한국에 돌아가는 바람에 아내를 잃은 것이었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그는 한국을 아예 떠나기로 했다. 친구들은 당혹해 하면서 만류했다. 고아여서 한국에 피붙이라고는 없었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가 항공 택배회사에 이삿짐을 맡긴 것은 벌써 4년 전 일이었다.

지니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슐티소바 거리 인근인 코페츠코헤 거리에 사는 리즈였다. 둘은 점심을 먹고 오후 1시에 서로 문자를 주고받아 ‘생존을 확인한’ 뒤 클라슈테르니 테라소바 정원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니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약속시간이 벌써 2시간이나 지나버린 것이었다.

지니는 쏙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정말 미안해. 어제 새벽까지 자료를 찾느라 너무 피곤했나 봐. 지금이라도 나올래?”

리즈는 문자 답변을 기다리다 지쳐 엄마와 함께 이모를 만나 저녁을 먹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는 타로에 푹 빠진 이모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모는 만나기만 하면 끊임없이 타로 이야기를 꺼냈다. 중세 시대 마법사 같은 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지니는 그럴 때면 투덜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모야말로 프라하의 유령이야.’

지니가 전화를 받지도 않고 문자를 보내지도 않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이모를 만나게 돼 리즈는 짜증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뒤늦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그냥 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화를 꾹 참고 마음을 다잡기로 결심했다.

리즈는 매우 현실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모와 식사하면서 타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신경질이 나더라도 지니를 만나러 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지니에게서 막 전화가 왔어. 아빠는 일하러 나가고 집에 혼자 있대. 내가 아니면 같이 밥 먹을 사람조차 없다는데 어떻게 하지?”

지니가 리즈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라는 걸 엄마도 잘 알고 있었다. 이모를 만나러 가기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이모 집에는 나 혼자 다녀올게.”

리즈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대학교 때 만난 동급생과 같이 살다 리즈를 낳았지만 10년 이상 혼자서 딸을 키웠다.

아빠는 어디 갔느냐고? 글쎄? 엄마는 리즈에게 아빠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리즈는 아빠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분명한 건 죽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리즈가 엄마에게 그다지 살갑게 굴지 않는 건 아빠 이야기를 안 해준 탓도 있었다.

지니는 클라슈테르니 테라소바 정원 입구에 서 있었다. 옆에 다른 아이가 한 명 더 보였다.  프랑스식 빵집을 운영하는 페테르카 할아버지의 손자인 쿨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건너온 이민 소년이었다. 부모는 지중해를 건너다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가 어떻게 프라하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페테르카 씨는 거리를 헤매다 쓰러져 굶어죽을 처지에 몰린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데려와 4년째 키웠다. 입양하려고 여러 차례 신청했지만 법 절차 때문에 아직 최종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난민 자격은 얻은 덕분에 프라하에서 쫓겨날 처지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페테르카는 쿨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신이 너를 프라하까지 데려와 내게 맡기신 거란다.”

쿨의 원래 이름은 이브라힘 케이타였다. 여기에 할아버지 성을 붙여 이브라힘 케이타 프루소바라고 부르기로 했다. 쿨은 별명이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다고 친구들이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행동부터 하는 덜렁이라는 뜻이었다.

쿨은 지니와 리즈보다   많지만 학교 입학이 늦어서 아직 5학년이었다. 셋은 같은 동네에서 친구 사이로  지냈다. 페테르카는 그 점에 대해  아이에게 매우 고마워했다.

지니는 쿨을 데려온 이유를 리즈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오늘 페테르카 할아버지 빵집이 휴일이래. 쿨이 심심할까봐 불렀어.”

리즈는 굳이 변명을 듣지 않아도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둘만 있으면 서먹서먹할까봐 그런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핀잔을 줬다가 토라지면 서로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말 한마디만 참으면 이익이 100배로 돌아온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자료는 찾아봤니?”

“응! 오늘이 맞아.”

지니와 리즈는 안드레이의 특별수업을 들은 뒤 목 잘린 유령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안드레이가 유령을 만났다면 그들이라고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30년 전쟁 막바지에 프하라에서 스웨덴 군과 체코 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대. 그때 스웨덴 기병 한 명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성 니콜라스 성당을 약탈하러 갔어. 주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분노해서 그를 목 잘라 죽여 버렸지. 그 자리가 바로 검은 문 근처였다는 거야.”

지니는 미안한 마음을 숨기려 조사한 내용을 아주 열심히 설명했다.

“안드레이 할아버지가 문 이야기를 했지? 이게 그 문이겠구나.”

리즈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맞아. 당시에는 말라 스트라나 지역과 프라하 성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였어. 스웨덴 기병은 문을 넘어가려다 죽고 말았대.”

“그 문이 어딘지 알 수 있어? 시간은?”

“그건 안드레이 할아버지에게 물어봐야 해. 그런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어.”

쿨은 지니와 리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아침부터 체코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프라하에 온 지 4년이나 됐지만 아직 미묘한 언어의 변화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오후 늦게 지니가 빵집 2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오더니 무조건 나가자고 했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싱글벙글하는 할아버지의 폭소를 느끼며 1층으로 끌려 내려온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니? 내가 붙잡혀 온 이유나 설명해.”

리즈는 주먹으로 쿨의 배를 툭 쳤다.

“유령을 만나러 갈 거야.”

“무슨 헛소리야?”

쿨은 리즈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헛소리라니?”

리즈는 이번에는 약간 화난 얼굴로 쿨의 가슴을 밀었다.

지니는 옆에서 키득거릴 뿐이었다.

“그럼 헛소리가 아니고 뭐야? 이 대낮에 유령을 만나러 간다니. 날 놀리려는 거냐?”

“농담이 아니야. 진짜야.”

리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제대로 좀 설명해 봐. 장난처럼 하지 말고.”

지니는 며칠 전 안드레이의 유령 특별수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5학년이어서 수업을 듣지 못했던 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오늘 유령을 찾으러 간다는 거냐?”

“그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유령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왜 말이 안 돼? 안드레이 할아버지도 봤다는데.”

“그 할아버지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동네에 소문이 난 걸 모르니?”

쿨은 두 소녀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드레이 할아버지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그런데 목 잘린 유령을 만나서 뭐하게?”

지니와 리즈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둘은 정말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쿨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유령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너는 빠져라. 우리 둘이 갈 테니.”

지니와 리즈는 몸을 휙 돌려 쿨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원 쪽을 향해 길을 건넜다.

쿨은 당혹스러웠다. 둘을 따라가면 멍청한 유령 사냥꾼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서면 삐친 둘을 한동안 만나기 힘들게 뻔했다.

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낯선 도시 프라하에서 그를 친구로 받아들여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건네주는 아이는 지니와 리즈뿐이었다. 꼭 그래서라기보다 그는 두 아이를 정말 좋아했다. 쿨은 둘을 따라 ‘멍청한 모험’에 합류해야 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니?”

“입 다물고 조용히 그냥 따라와.”

날씨가 맑은 토요일이어서 클라슈테르니 테라소바 정원에는 소풍을 나온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곳은 아담한 크기의 호수는 물론 잔디밭과 넓은 숲이 있어 가족끼리 나들이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아이들은 마음껏 공놀이를 할 수 있고, 어른들은 편안하게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추운 겨울만 빼고 봄, 여름, 가을에는 많은 사람이 이곳에 소풍을 갔다.

지니와 리즈는 싱글벙글 웃으며 정원 안쪽에 자리를 잡은 브르제브노프 수도원으로 곧장 갔다.

수도원 입구 앞 정원에 나무 벤치가 보였다. 그곳에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따뜻한 햇살을 즐기면서 앉아 있었다. 바츨라프 하벨 초등학교에서 특별수업을 진행한 안드레이였다. 그는 빨간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지니와 리즈는 특별수업 시간에 보여준 유령 수첩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소녀는 주저하지 않고 안드레이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안드레이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냐?”

“저 모르시겠어요?”

안드레이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기색을 보이며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바츨라프 하벨 초등학교에서 내게 질문을 던진 아이로구나.”

안드레이가 얼굴을 알아보는 척 하자 지니와 리즈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다.

“혹시 나를 만나러 일부러 여기 온 거니?”

“네.”

리즈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에서는 무슨 유령을 만나려고 기다리시는 거예요?”

안드레이는 조롱기가 섞인 웃음을 가볍게 터뜨렸다.

“내가 여기서 유령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거니?”

지니가 말을 덧붙였다.

“동네 할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여기 가면 유령을 기다리는 안드레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고.”

“멍청한 영감들 같으니. 이곳에 무슨 유령이 있다고. 유령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안드레이는 귀찮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셋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여기서 나와 함께 유령을 기다리려고 온 것 같지는 않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냐?”

지니는 안드레이에게 밤새 인터넷에서 찾아본 자료를 내밀었다.

안드레이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스웨덴 기병 자료예요. 그 사람이 죽은 날짜가 바로 오늘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정확한 시간이에요. 그건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아요.”

안드레이의 안색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성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나보고 시간을 알려달라는 말이냐?”

무안해진 지니의 형색이 주톳빛으로 변했다.

“네.”

안드레이는 수첩을 접고 눈을 치켜뜬 채 아무 말 없이 세 아이를 흘겨보았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숨을 죽일 정도로 긴장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내가 많은 책을 펴냈지만 아무도 유령을 만날 시간이나 장소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는 정말 유령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구나.”

“네.”

지니와 리즈는 마치 짠 듯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안드레이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멍청한 거냐?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거냐?”

지니와 리즈의 얼굴에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해치지 않은 걸 보면 유령이 꼭 무서운 존재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만나보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드레이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드레이는 한참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너희 말이 맞아. 유령이라고 나쁜 존재는 아니야.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 나도 유령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단 한 번도 해코지를 당한 적이 없어. 다만….”

지니와 리즈, 쿨의 머리에 호기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음 말은 무엇일까?

“유령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치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야.”

“무섭다고요?”

“잘린 목을 들고 다니는 유령이나 머리가 으깨져 피를 흘리는 유령을 생각해봐. 얼마나 무섭고 끔찍할지. 가끔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유령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 그러다 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지. 유령이 그들을 살해한 게 아니야. 너무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쓰러진 거였어. 평생 유령을 쫓아다닌 나도 놀라서 주저앉은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지니와 리즈는 침을 꼴깍 삼켰다. 두 소녀를 곁눈질하는 쿨의 얼굴에는 이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두려움의 흔적이 엿보였다.

“유령의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 어른도 견디지 못하는데 너희가 어떻게 그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겠니?”

리즈는 목 잘린 유령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엄마 몰래 TV에서 본 공포영화나 좀비영화 장면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안드레이가 설명하는 것은 그 수준을 넘어서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거라. 너희는 유령을 직접 보기에는 너무 어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시 찾아오너라.”

안드레이는 수첩을 접고 벤치에서 일어나 수도원 맞은편에 있던 카페에 들어갔다. 세 아이가 따라붙는 게 귀찮다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지니는 카페에 들어가는 안드레이의 뒷모습을 끝까지 주시했다.

“어떻게 하지?”

리즈는 한편으로는 가슴이 떨리면서 한편으로는 이대로 끝낸다는 게 아쉽기만 했다.

“일단 따라가 보자.”


안드레이는 카페 가장 안쪽의 외진 테이블에 앉았다. 직원은 물어보지도 않고 시원한 생맥주를 담은 유리잔을 가져다주었다. 주문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 걸 보면 안드레이는 단골인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볼펜을 꺼내더니 수첩을 펼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세 아이는 카페 창 너머에서 안드레이를 계속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자리를 비우는 틈이 생길 거야. 그때 들어가서 수첩을 뒤져보자. 저 수첩에 유령을 목록별로 정리해두었다고 했으니 정답이 있을 거야.”

지니의 머리에는 이미 계획이 선 듯했다. 쿨은 계속 하늘을 올려보았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해가 부담스러웠다.

안드레이는 수첩을 정리하는 데 깊이 빠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30분 동안 맥주를 연거푸 석 잔이나 들이켰다. 직원은 말없이 네 번째 잔을 가져다주었다. 똑같은 잔에 든 똑같은 색깔의 맥주였다. 안드레이는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볼펜을 테이블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는 모양이야.”

지니의 두 눈이 반짝였다.

“쿨! 너는 화장실로 가. 할아버지가 볼일을 다 보고 나오려고 하면 말을 붙여서 시간을 최대한 끌어. 그 사이에 나와 리즈는 수첩을 뒤져볼게.”

지니는 말을 마치자마자 카페로 들어갔다.

안드레이는 테이블 정반대편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저하던 쿨은 테이블로 다가가는 지니와 리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 안드레이 뒤를 따라갔다.

“안드레이 할아버지 오셨어요?”

지니는 카페 직원에게 눈웃음을 쳤다.

“누구니?”

“여기서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어요.”

직원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턱으로 구석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리즈와 지니는 종종걸음으로 테이블에 뛰어갔다. 리즈는 앉자마자 수첩 맨 앞쪽부터 펼쳤다. 번호를 붙인 목록이 보였다. 그는 손가락을 대고 목록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지니는 글자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얼마나 날려 썼는지 제대로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둘이 끙끙대며 입을 맞춰야 겨우 하나를 알아낼 정도였다.

“정말 어렵구나. 시간이 제법 걸리겠는데.”

안드레이는 알파벳 철자 순서대로 목록을 정리해 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목 잘린 유령을 찾기는 매우 쉬웠을 것이었다. 그는 유령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직접 목격한 순서대로 목록을 만든 모양이었다.

지니와 리즈는 안드레이가 네루도바 거리의 목 없는 유령을 언제 발견했는지, 또는 언제 만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이름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곧 나오실 거야. 서둘러야 해.”

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안드레이는 속이 불편해 변기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유령 스트레스 때문에 가볍지 않은 변비에 시달렸다. 속이 좋지 않은데도 손쉽게 일을 마치지 못하는 것은 변비 때문이었다.

쿨은 안드레이가 앉은 변기 칸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언제 일을 끝내고 물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 화장실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이상하다는 듯 쿨을 힐끔 쳐다봤다. 그때마다 쿨은 눈을 깔거나 고개를 돌려야 했다.

“여기 있어.”

지니가 두 손을 번쩍 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카페에서 조용히 소곤거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들을 쳐다봤다.

리즈는 당황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죄송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카페 직원은 둘을 힐끔 노려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베즐라비 흐르티슈. 목 없는 기사!”

지니가 발견한 것은 목록 중간쯤에 적혀 있는 체코어였다.

“아냐! 이건 아닌 것 같아.”

리즈는 애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왜?”

“베즐라비 흐르디슈 뒤의 글자를 봐. 공화국 광장이라고 돼 있어. 유령이 나타난 위치를 적은 것 같아. 우리가 찾으려는 건 네루도바 거리의 목 없는 기사야. 공화국 광장 유령이 아니잖아.”

“그렇구나.”

안드레이가 앉은 변기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쿨은 기겁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윽고 덜컥 하면서 문이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쿨은 일단 인사부터 했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기는 웬일이냐? 아직 안 돌아간 거냐?”

안드레이는 쿨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로 쿨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그게.”

“내게 볼일이 더 남았니?”

안드레이는 벽에 걸린 티슈를 꺼내 손을 닦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살갗이 오그라들고 좁쌀이 돋는 것 같았다. 그는 일단 안드레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보았다.

“왜 이러는 거냐? 이 비좁은 화장실에서.”

쿨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기로 했다.

“저는 수단에서 왔어요.”

안드레이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쿨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아빠, 엄마는 배를 타고 오다 바다에서 익사했어요.”

“그것 참 안 됐구나.”

쿨은 아무리 급해도 왜 아빠, 엄마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금세 바보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기왕 말을 꺼낸 김에 아무 말이나 해서 시간을 더 끌어야했다.

“옛날에 수단에서 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물에 빠져죽은 사람은 유령이 돼 떠돌기 때문에 위령제를 열어줘야 저승에 올라갈 수 있다고.”

“그래서?”

“그게 그러니까….”

“네 아빠, 엄마를 위한 위령제 이야기를 화장실에서 내게 하는 이유가 뭐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구나.”

안드레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엄지손가락으로 쿨의 머리를 꾹 눌렀다.

“그, 그게….”

안드레이는 화장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화들짝 놀란 쿨은 다시 그의 소매를 힘껏 잡아당겼다. 안드레이는 이번에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화장실에서 터져 나온 큰 소리를 들은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안드레이와 쿨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왜 그러세요?”

안드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쿨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이 나를 붙잡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직원은 무슨 영문인지 잘 몰라서 얼떨떨하다는 듯 쿨을 물끄러미 보았다.

“방금 안드레이 씨를 찾아온 아이들과 함께 들어온 애로군요.”

안드레이는 화들짝 놀라며 직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누가 왔다고?”

“여기서 만나기로 했다던데요. 지금 안드레이 씨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안드레이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화장실 문을 거칠게 밀어제쳤다. 정반대쪽 그의 테이블에 두 아이가 머리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게 두 눈에 들어왔다. 수도원 앞 벤치로 뜬금없이 찾아와 햇살을 가리더니 목 없는 기사가 죽은 시간을 알려달라던 아이들이었다. 둘은 테이블에 펼쳐진 그의 수첩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그제야 왜 쿨이 화장실에서 그의 옷자락을 계속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뒤를 휙 돌아보았다.

쿨은 안드레이의 일그러진 얼굴과 열린 문틈으로 드러난 지니, 리즈의 모습을 보고 들킨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질겁하며 황급히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얘들아, 들켰어. 달아나.”

쿨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니는 고개를 들어 화장실을 바라보았다. 안드레이가 성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여기 있네!”

리즈가 희열이 넘치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카페 안의 손님들은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어린 두 소녀를 흘겨보았다.

“파니 마리아 우 카헤타누, 성모 마리아 성당이야. 그리고 네루도바.”

“시간을 찾아봐. 어디 있지?”

안드레이는 눈을 치켜뜬 채 씩씩거리며 테이블로 걸어오고 있었다. 직원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리를 긁으며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오후 6시!”

리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목록 번호 98번 ‘베즐라비 흐르디슈, 파니 마리아 우 카헤타누, 네루도바’ 항목 뒤에는 이런 숫자가 적혀 있었다. ‘4월 25일 오후 6시.’

“이제 가자.”

지니는 스프링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안드레이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리즈의 손을 잡고 카페 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리즈는 환하게 웃으며 안드레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쿨은 벌써 정원 입구를 향해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지니와 리즈는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쿨을 따라 달렸다.

안드레이는 씩씩거리며 테이블에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흐릿한 눈으로 목록 98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전 03화 루드밀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