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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ug 08. 2022

검은 문

클라슈테르니 테라소바 정원 맞은편의 브르제브노프 정차장에서 오후 4시 50분에 출발한 97번 트램이 성 니콜라스 성당 앞에 도착한 것은 20분 후인 오후 5시 10분 무렵이었다.

트램에서 내리는 지니와 리즈, 쿨의 이마와 콧등에는 아직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쿨의 입은 기다란 오이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뛰어다니고 도망 다니는 게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 남의 수첩 도둑질하다가 달아나기나 하고.”

지니와 리즈는 싱글벙글 웃었다.

“스릴이 넘치지 않니? 재미있잖아.”

“재미있다고? 할아버지가 학교에 우리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최소한 1주일 이상 화장실 청소 벌칙을 받을 거야.”

쿨은 전혀 예상하지도 않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학교도 문제지만 나중에 페테르카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곤욕을 치를지도 몰랐다.

“화장실 청소 정도야 유령을 만나는 대가치고는 싼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지니는 쿨의 걱정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성 니콜라스 성당 오른쪽 골목을 향했다.

“저쪽이야.”

지니는 골목으로 먼저 들어가 스트라호프 수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즈는 쿨에게 어서 가자는 손짓을 하며 뒤를 따라갔다.

세 아이가 달려간 곳은 네루도바 거리였다. 원래 오스트루호바로 불리던 곳이었다. 19세기 이곳에서 자랐던 유명한 시인 얀 네포묵 네루다를 기념하기 위해 나중에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프라하의 분위기처럼 아주 외롭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먼 옛날 이곳은 로열 루트 즉 ‘황제의 길’의 일부분이었다. 대관식을 치른 보헤미아 국왕 행렬은 카렐 다리를 건넌 다음 네루도바 거리를 지나 프라하 성으로 올라갔다. 아름다웠던 영광은 이제 돌 아래 까마득한 지하에 묻혀 버린 지 오래였다.

네루도바 거리의 가로등은 세월에 빛이 바랜 듯 그야말로 고색창연했다. 어두운 바다에서 외롭게 배를 모는 선장에게 항로를 일러주기 위해 설치한 등대 모양이었다. 늦은 오후의 햇빛에 반사된 까무잡잡한 보도석은 바닥에 은가루가 흘러 다니는 것처럼 반짝였다.

네루도바 거리는 프라하 성이나 스트라호프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길이어서 오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러 호텔이 줄지어 영업하고 있었고 식당이나 각종 상점은 끊어질 줄 몰랐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성모 마리아 성당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세 아이가 성모 마리아 성당 앞에서 검은 문을 찾기란 그야말로 보물찾기였다. 그게 어디 있는지는 고사하고 뭔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몇 시니?”

“5시 20분.”

성모 마리아 성당 앞에 골동품 가게가 보였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가 돋보기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지니는 길을 물어보는 역할을 자청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여기 근처에 검은 문이라고 있나요?”

할아버지는 안경을 벗더니 눈을 크게 뜨고 지니를 훑어보았다.

“검은 문을 왜 찾는 거냐?”

“유령을 만나러 왔어요. 거기 가면 유령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할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유령을 만난다고? 재미있는 아이들이구나. 하긴 그곳에 유령 전설이 담겨 있기는 하지.”

할아버지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검은 문이 뭔지는 아니?”

세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성당 주변에 기다랗게 선을 그었다.

“원래 네루도바 거리를 따라 성벽이 있었어. 프라하 성과 레서 타운을 갈라놓는 성벽이었지. 성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달려있었단다. 그걸 스트라호프 성벽, 또는 검은 문이라고 불렀어. 300년 전에 ‘30년 전쟁’이 벌어졌지. 전쟁 막바지에 카렐 다리를 사이에 두고 스웨덴 군과 체코 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어. 그때 스웨덴 기사 한 명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약탈하러 갔대. 주변 사람들이 그걸 보고 분노해서 그를 쫓아가 목을 잘라 죽여 버렸어. 달아나던 기사가 죽은 자리가 바로 검은 문 근처였다는 거야.”

골동품 가게 할아버지의 입에서도 목 잘린 유령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안드레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지니는 그 단어를 듣고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검은 문은 어디에 있어요?”

“성모 마리아 성당을 짓느라 18세기에 성벽을 허물어버렸단다. 그때 검은 문도 없어졌어. 그래서 지금은 성벽은 물론 검은 문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무도 몰라.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거든. 나는 여기서 태어나서 80년이나 살았지만 그 문에 대해 묻는 사람은 너희가 처음이란다. 어디 한 번 잘 찾아보렴.”

이야기를 마친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만 남기고 골동품 가게로 들어갔다.

지니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드레이가 수첩에 적어 놓은 걸 보면 검은 문은 분명히 근처에 있기는 할 것이었다. 하지만 여든을 넘은 골동품 가게 할아버지가 모를 정도면 검은 문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 주변이나 바닥을 잘 살펴보자. 검은 문의 흔적이 분명히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야.”

리즈는 네루도바 거리의 인도에 깔린 보도석을 꼼꼼히 살폈다. 다 부서졌다고 해도 검은 문의 흔적이 어딘가에서는 보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보도석 하나하나를 꼼꼼히 봐. 평범한 돌과 다른 흔적이 있을지도 몰라.”

지니와 쿨은 돌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기서 뭘 찾고 있니?”

허리를 숙여 바닥을 살피는 세 아이의 등 뒤에서 낮으면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까만 사제복을 단정하게 입은 젊은 신부가 웃으면서 셋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돈이라도 떨어뜨린 모양이구나.”

리즈는 눈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대답했다.

“사실 목 잘린 유령을 찾고 있어요.”

지니는 기겁하면서 리즈에게 사나운 눈빛을 쏘았다. 왜 신부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는 질책이었다.

신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령을?”

“네.”

이번에는 쿨이 지쳐서 맥 빠진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니는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리즈와 쿨의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모 마리아를 모신 성당 앞에서 유령을 찾는다는 말이지?”

리즈와 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는 흠 하면서 오른손을 턱에 붙였다.

“왜 여기에 유령이 있다고 생각하니?”

“옛날에 이곳 근처에 검은 문이 있었대요. 스웨덴 기병이 목을 잘려 죽은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곳을 찾으면 유령을 만날 수 있다고 했어요.”

“검은 문이라고? 나는 여기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유령 전설은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성당 지하에 옛날 검은 문으로 불렸던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세 아이의 눈이 구슬처럼 반짝이면서 커졌다.

“지하에요?”

“내려가 보지는 못했고 그렇다는 이야기만 들었어.”

“우리가 가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네.”

신부는 세 아이의 얼굴을 다시 하나씩 살펴보았다. 악의적으로 사람을 놀리거나 장난을 치는 표정은 아닌 게 분명했다.

“유령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확인만 하고 나올게요.”

지니는 아주 간절한 표정으로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유령 따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세 아이가 애원하듯이 간청하는 걸 보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지하에 내려가게 해줄게. 대신 절대 무엇에라도 손을 대거나 훼손해서는  . 약속할  있겠니?”

“네!”

지니, 리즈와 쿨은 이미 보물이라도 찾은 듯 신나는 목소리로 합창했다.

신부는 세 아이를 데리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신도석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작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정면의 주 제단 뒤 벽에는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림이 달려 있었다. 주 제단 양쪽에는 성 네포묵과 성 노베르 목상이 서 있었다.

성당 지하실도 마찬가지였다. 지상 공간이 좁기 때문에 지하도 넓지 않았다. 지하실 한쪽 벽은 나머지 세 쪽과 달라보였다. 때가 묻어 시꺼먼 직사각형 벽돌을 쌓은 벽이었다. 곳곳에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부서진 흔적도 보였다.

“나는 잘 모르지만 대충 보아하니 이게 검은 문의 유적이겠구나. 이제 어떻게 할까?”

“여기서 6시까지만 기다리면 안 될까요?”

리즈가 특유의 귀여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6시까지? 그건 왜?”

“유령이 그때 나타난다고 들었어요.”

신부는 다시 껄껄 웃었다. 참 재미있는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려무나. 지금이 5시 50분이니 10분만 더 있으면 되겠구나.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 곧 저녁 미사를 드려야 하거든. 그리고 절대 검은 문에 손을 대면 안 돼. 너무 낡아서 무너질지도 몰라.”

신부는 세 아이를 지하실에 남겨두고 계단을 올라갔다. 일요일 정규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서둘러 준비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그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정말이라도 유령이 나타나면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신부는 혼자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지? 하느님의 성소에서.’

세 아이는 신부가 나간 이후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뭘 어떻게 해야 목 잘린 유령을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니는 입을 꼭 다물고 옛날에는 검은 문 또는 스트라호프 문으로 불렸던 곳의 일부분인 벽만 바라보았다.

리즈는 무서운 듯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하실 곳곳에서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쿨은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이제 오후 6시까지는 불과 30초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유령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다.

“이제 5초 남았어.”

“다섯, 넷, 셋, 둘, 하나. 제로!”

쿨은 나지막하게 긴장한 목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시계는 오후 6시를 막 지났다.

쿨은 약간 겁에 질린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벽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실 천장도 올려보았다. 그곳에도 유령은 매달려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발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바닥에서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여러 가지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리즈는 무릎을 구부려 바닥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이곳이 벽이라면 기병이 쓰러진 장소는 이쯤일 거야.”

리즈는 무릎을 구부려 바닥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옛날에 벽이 서 있던 흔적이 흐릿하게 보였다. 흔적은 바닥을 가로질러 반대편 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벽의 바깥은 아까 셋이 성당 앞에서 보도석을 살펴보던 곳이었다.

“이쪽은 아닌 것 같고…. 안과 바깥에 몸이 걸쳐서 죽었을 수도 있지. 아니면 벽 너머일 수도 있겠어.”

검은 문 앞에 선 지니는 아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벽에서 갑자기 싸늘하고 오싹한 기운이 새어나와 바람처럼 지하실을 감돌았다.

“지하실이 추워진 것 같아. 한겨울에 난방기를 틀지 않은 교실에 냉기가 도는 것처럼 말이야.”

지니는 추운 듯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입에서는 하얀 김이 나왔다. 리즈도 몸을 떨면서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지하실에서는 공기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생길 리가 없지. 게다가 지금은 봄이야. 아무리 지하실이라도 이렇게 싸늘한 냉기가 나오지는 않아. 그렇다면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유는 뭘까?”

입술이 시퍼렇게 변한 지니는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문 앞의 바닥에는 돌이 약간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그걸 확인하지 못한 지니는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비틀거리다 엉겁결에 벽에 손을 짚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니는 벽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가 버렸다. 고함을 치거나 도와달라고 하소연할 틈도 없었다.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리즈와 쿨은 기겁한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니가 벽 안으로 사라졌어.”

“어떻게 하지?”

“우리도 따라 들어갈까?”

“안드레이 할아버지에게 가서 솔직히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좋겠다.”

리즈와 쿨은 얼굴이 노래진 채 지하실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할머니 서넛이 신도석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리즈는 할머니들을 곁눈질하면서 밖으로 뛰어갔다.

늦은 여름 오후의 흐릿하면서 은은하게 노란 빛이 네루도바 거리의 좁은 돌 골목길에 흐르고 있었다. 리즈는 뛰어가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쿨! 잠깐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억누르며 달려가던 쿨은 뒤를 돌아보았다.

“안드레이 할아버지에게 다녀오려면 적어도 2~3시간은 걸릴 거야. 그 사이에 지니는 어디로 사라질지 몰라.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공포에 시달릴 수도 있고.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몰라. 우리가 함께 있으면 조금이라도 나을 거야. 그리고 들어간 길이 있으면 나오는 길도 있을 거야. 우리가 들어가서 길을 찾아 함께 나오면 돼.”

쿨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얼른 여기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너는 안드레이 할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를 전하도록 해. 나는 지니를 따라갈 거야.”

리즈는 다시 몸을 돌려 성당 안 지하실로 뛰어 들어갔다.

쿨은 한참 동안 지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뒤를 따라갔다. 이미 리즈는 벽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쿨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이구나. 들어가려니 무섭고, 안 가려니 나중에 두 아이에게 놀림당할 것 같고.”

쿨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벽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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