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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02. 2024

쇼팽의 장례식과 마들렌 성당


프레데렉 쇼팽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는 의식을 잃다시피 잠들었다가 가까스로 눈을 뜨는 일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침대 주변에 모인 지인 서너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쇼팽이 누운 곳은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 12번지의 대형 궁전인 ‘호텔 보다드 상잼(Hôtel Baudard de Saint-James)’였다. 파리 곳곳을 돌아다녔던 쇼팽은 1849년 9월 5년간 사용하겠다면서 이곳의 아파트 한 채를 연세 3500프랑에 빌렸다. 전실과 거실, 부엌과 식당, 침실 3개 그리고 집사들이 사용하는 방 여러 개로 이뤄진 대형 아파트였다.


러시아 대사관이 쇼팽보다 1년 앞서 연간 4만 5000프랑을 주기로 하고 건물 대부분을 빌릴 정도로 호텔 보다드 상잼은 고급스러운 궁전이었다. 쇼팽은 러시아 대사관의 이웃이 됐다며 즐거워할 때까지만 해도 계약기간을 마치지 못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쇼팽은 조국인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 이탈리아에 가려다 방향을 틀어 1831년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조국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목적지였지만 그의 훌륭한 음악적 재능은 파리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쇼팽이 침대에 드러눕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38년 스페인 마요르카 여행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추운 날씨에 시달리다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해가 지나도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1842년부터는 크게 악화됐다.


병에 시달리며 앓아눕는 날이 늘어나자 쇼팽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어졌다. 오빠의 편지를 받은 여동생 루드비카가 남편, 딸과 함께 바르샤바에서 파리로 달려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쇼팽이 지인에게 거액을 빌리면서까지 원래 살던 샤이오 궁전 근처의 작은 집에서 방돔 광장의 큰 집으로 옮긴 것은 이처럼 식구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주거환경이 좋아지고 여동생까지 왔지만 쇼팽의 건강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악화되기만 했다. 그는 집을 옮긴 지 한 달 만에 아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0월 15일 무렵에는 의사에게서 사실상 회생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쇼팽은 거의 하루 종일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한두 시간 정도 눈을 뜨곤 했다. 그는 그때마다 곁을 지키던 친구, 제자에게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폴란드에서 쇼팽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귀족 출신 여성인 델피나 포토차는 노래를 불렀고, 쇼팽의 제자나 마찬가지인 프랑스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촘은 첼로를 연주했다. 다른 친구들도 돌아가면서 밤새 음악을 반복해서 연주했다. 


독일 작곡가 아돌프 구트만은 쇼팽의 손을 꼭 잡고 수시로 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쇼팽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잠시 의식을 회복하자 친구인 프랑스 작곡가 샤를 벨롱탕 알칸에게 미완성 피아노 교본을 넘겨주면서 꼭 완성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인생의 끝이 다가온 걸 직감한 쇼팽은 죽기 하루 전 친구들에게 일일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프랑촘에게는 유언 같은 부탁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장례미사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해주게.”


쇼팽은 프랑촘에게 남긴 부탁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10월 17일 자정이 지났을 무렵 너무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는 계속 신음만 내뱉었다. 의사는 그의 입에 귀를 대었다.


“통증이 심한가요?”


쇼팽은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더 심해지는군요.”


결국 이 말은 쇼팽이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되고 말았다. 그는 새벽 2시 무렵 끝내 눈을 감았다. 당시 나이는 불과 39세였다. 그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여동생 루드비카와 폴란드 출신 사제이면서 작가였던 알렉산더 옐로비츠키, 폴란드 귀족이면서 피아니스트였던 마르셀리나 차르토리스카,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딸인 소설가 솔란지 뒤데방 그리고 친구 토마스 알브레흐트였다. 


상드는 쇼팽이 병들어 눕기 전 9년간 연인이었다. 쇼팽은 그녀의 딸 솔란지를 자주 만났는데 모녀가 다툴 때는 늘 딸 편을 들어줬기 때문에 솔란지는 쇼팽을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쇼팽이 눈을 감자 조각가인 남편 오귀스트 클레신저를 쇼팽의 집으로 불러 데스마스크와 왼손 본을 만들게 했다.


쇼팽의 장례식은 방돔 광장 인근에 있는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하기로 결정됐다. 이곳은 여러 유명 인사의 장례식이 치러진 장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적 여배우 마들린 디트리히, 첼로곡 ‘재클린의 눈물’을 만든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 가곡 ‘아베마리아’를 작곡한 샤를 구노,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 등이 이곳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쇼팽의 장례식은 그가 숨을 거둔 다음날 바로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2주나 미뤄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조문객이었다. 많은 사람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유족 측은 장례식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참가 희망자가 넘쳐났기 때문에 성당은 사전에 배포한 입장권을 가진 사람 3000명만 입장시키기로 했다. 그런데도 또 다른 3000여 명이 성당 밖에 모여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눈물을 흘렸다. 파리 시민만 모인 게 아니라 영국 런던, 독일 베를린, 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른 이유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해달라는 쇼팽의 유언이었다. 레퀴엠에는 여성 가수가 등장하는데, 마들렌 성당은 여성이 성당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게 전통이었다. 이 때문에 쇼팽의 지인들과 성당 측은 격론을 벌였다. 결국 성당 측은 한 가지 조건을 붙이는 선에서 여성 가수 출연을 허용하겠다고 양보했다. 그들이 내건 조건은 ‘여성 가수는 마스크를 쓰고 커튼 뒤에 숨어서 노래한다’는 것이었다.


쇼팽의 장례식은 10월 30일에야 거행됐다.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렸고 장례식이 얼마나 성대하게 치러졌던지 일부에서는 ‘9년 전 나폴레옹 황제 유해 반환식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쇼팽의 유언대로 성당에서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솔로 가수는 소프라노 잔 아나이 캐스태롱과 메조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 테너 알렉시스 듀퐁, 베이스 루이기 라블라시가 맡았다. 레퀴엠에 이어 쇼팽의 피아노곡인 프렐류드 4번 E 단조와 6번 B 단조도 연주됐다. 연주를 맡은 사람은 프랑스 오르가니스트 알프레드 르페뷔르-웰리였다. 


장례식이 끝난 뒤 쇼팽의 관을 옮기는 운구 행렬은 파리에서 가장 큰 페레 라세즈 공동묘지로 향했다. 이곳은 19세기 아일랜드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 19~20세기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 20세기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마임배우 마르셀 마르소, 20세기 미국 가수 짐 모리슨과 미국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 등 유명 문화예술인들이 묻힌 곳이었다. 


맨 앞에서 운구 행렬을 이끈 사람은 당시 79세였던 폴란드의 노장 애국자이자 귀족 정치인 아담 차르토리스키였다. 관은 쇼팽과 친했던 화가 드라크루아와 프랑촘, 프랑스 작곡가 카밀 플레옐 등이 들었다. 플레옐은 ‘살레 플레옐’이라는 음악살롱을 운영했는데, 쇼팽이 파리 데뷔 음악회와 죽기 전 마지막 음악회를 연 곳이 바로 여기였다. 


운구 행렬이 공동묘지에 도착하고 쇼팽의 관을 묻기에 앞서 무덤 앞에서 마지막으로 쇼팽의 피아노 소타타 2번이 연주됐다. 그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두 귀로 들은 마지막 음악이었다.


한편 쇼팽은 죽은 뒤에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던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국가적 영웅인 시신 귀환이 불러올 파장을 우려하며 그의 사후 귀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들렌 사원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죽어서도 귀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쇼팽은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죽기 하루 전 여동생 루드비카와 오랫동안 치료를 맡은 의사 장 크뤼베이에를 비밀리에 불렀다. 


“루드비카, 나는 죽어서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게 두려워. 몸은 파리에 묻히더라도 마음만은 바르샤바로 돌아가고 싶어. 내가 죽거든 심장을 꺼내 바르샤바로 가져가 내가 늘 가던 교회에 묻어다오. 크뤼베이에 선생님. 부디 제 소망을 이뤄주십시오.”


루드비카는 오빠의 몸에 칼을 대 심장을 뜯어낸다는 게 끔찍하게 여겨졌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오빠의 소원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크뤼베이에도 루드비카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세계적 음악가가 고향에 묻히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나자 크뤼베이에는 루드비카만 빼고 침대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그는 서둘러 부검을 실시해 그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 알코올이 든 병에 넣었다. 


마들렌 성당에서 장례식을 마친 루드비카는 이듬해 1월 오빠의 심장이 든 병을 숨겨 고향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는 도중 프로이센과 러시아 병사의 검문에 들킬까 여자들이 치마를 불룩하게 보이도록 입는 크리놀린 안에 병을 숨겼다. 쇼팽의 심장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성 십자가 교회였다. 심장을 전달받은 신부들은 심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교회 지하묘지에 몰래 숨겼다. 


쇼팽의 심장이 성 십자가 교회에 묻혔다는 사실은 루드비카와 일부 교회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심장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것은 1879년 폴란드의 한 기자가 성 십자가 교회에서 심장을 발견한 사실을 보도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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