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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03. 2024

나폴레옹 대관식과 노트르담 대성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의 일인자로 떠오른 뒤 목숨을 노리는 암살 시도를 여러 차례 겪었다. 1800년에는 마차에 설치된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아내 조제핀이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국가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떠올린 것은 프랑스대혁명으로 사라졌던 왕정을 넘어선 제정이었다.


나폴레옹은 직접 뽑은 상원에서 1804년 5월 18일 헌법을 개정해 프랑스의 통치 체제를 제정으로 바꾼 다음 ‘프랑스 황제’로 선출됐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6월에는 자신을 황제로 승격시키는 헌법 개정안을 승인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연히(?) 국민투표 결과는 사실상 만장일치로 ‘나폴레옹 황제 승인’이었다. 총 유권자 700만 명 중에서 과반수를 조금 넘는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해 350여만 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겨우 2569표였다.


나폴레옹은 황제 대관식을 같은 해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11세기 이래 역대 프랑스 국왕 대관식은 대부분 파리 동쪽의 라임스에 있는 랭스 대성당에서 거행됐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린 것은 1431년 영국의 헨리 4세 이후에는 나폴레옹이 유일무이했다. 


나폴레옹이 노트르댐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지만 실제 행사가 열리기까지 적지 않는 어려움이 앞을 가로막았다. 첫 난관은 교황 비오 12세의 거부감이었다. 교황이 대관식에서 새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줘야 종교적 정당성이 확보되는데, 프랑스대혁명 때 많은 성당이 파괴되고 많은 신부, 수도사, 수녀가 살해된 사실을 기억하는 교황은 대관식에 참가하기를 꺼렸다. 


나폴레옹은 교황의 참석이 단순히 종교적인 상징에 그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 추기경인 삼촌 조젭 페시에게 교황을 설득하라고 부탁했다. 삼촌이 로마에 가서 교황을 설득하는 동안에는 직간접적 방법을 통해 교황과 교황청을 협박하고 회유했다. 나폴레옹의 양면작전을 견디지 못한 교황은 결국 대관식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른 문제는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이었다. 두 사람은 1796년 방돔 광장 인근의 파리 3지구 구청사인 몬드라곤 궁전에서 결혼해 법적으로는 부부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정당하지 못한 관계였다. 신부인 조제핀이 프랑스대혁명 때 단두대에서 목을 잘린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둘이나 둔 데다 나이도 여섯 살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나폴레옹은 평소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진정한 신부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처녀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기준으로는 ‘자격이 부족’한 조제핀과 성당에서 종교적 결혼식을 치를 생각은 애시당초 하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은 조제핀과는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결혼식을 치르지 않았으면서도 오래전부터 가족의 모든 결혼식은 종교적으로 인정받는 방식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동생 캐롤린과 매제 조아킴 뮈라, 그리고 남동생 루이와 부인 조제핀의 딸 호르텐스의 결혼식도 종교적인 방식으로 성당에서 거행했다. 


대관식에 참가하기로 했던 교황은 파리에 도착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대관식의 종교적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두 사람이 종교적으로 정당한 결혼식을 치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다면 대관식에 갈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 나폴레옹의 삼촌이 다시 개입했다. 그는 교황에게 두 사람의 부부관계를 종교적으로 정리하겠다고 설득했다. 나폴레옹에게는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고 조언했다. 종교법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은 종교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교황은 어쨌든 형식이라도 갖췄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나폴레옹도 평소 신념과 다른 결혼식이었지만 황제가 되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두 번째 결혼식은 대관식 하루 전인 12월 1일 저녁 튈르리 궁전 안의 예배당에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마지막 난관은 나폴레옹 가족과 조제핀의 갈등이었다. 이때까지 가족 중 누구도 조제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 4명은 대관식에서 조제핀의 망토 자락을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대관식에 가지 않겠다고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다. 화가 난 나폴레옹은 여동생들에게 대관식에 오지 않으면 모든 작위와 금전적 혜택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한 뒤에야 참석하겠다는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 마리아 레치티아도 대관식을 보이콧했다. 표면저인 이유는 아들이 준 작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대관식에 가기 창피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받은 작위는 ‘황제의 어머니’라는 듯인 ‘마담 메르’였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둘째아들 루시앙이었다. 그는 형 나폴레옹이 반대한 결혼을 강행하는 바람에 사실상 파리에서 쫓겨나 로마에서 망명 중이었다. 둘째아들이 형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마리아 레티치아는 로마로 가 버렸다. 다비드가 그린 그림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는 마리아 레티치아가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참석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공식 절차는 오전 9시 교황이 튈르리 궁전에서 황제 부부보다 먼저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날씨는 정말 좋아 웅장한 대관식과 화려한 행렬이 더욱 빛나게 했다. 하늘에는 구름만 약간 낀 정도였고 겨울인데도 춥지 않아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는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지 않았다. 


당나귀를 탄 사제 한 명이 교황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든 채 교황의 마차 행렬을 이끌었다. 용 모양으로 장식한 마차 수십 대가 먼저 앞서갔고 교황의 마차가 맨 뒤에 따라갔다. 교황 마차를 끈 것은 갈색 말 여덟 마리였다. 금박으로 반짝인 교황의 마차 지붕에는 삼중왕관이 장식됐고, 네 모퉁이는 도금한 비둘기 네 마리 장식이 붙여졌다. 이전에 조제핀이 사용하던 마차였지만, 나폴레옹은 마차를 새롭게 재단장해 교황에게 내줬던 것이었다. 


마차에는 창문이 여덟 개나 달려 외부에서도 교황을 잘 볼 수 있었다. 교황은 하얀색 교황복을 입고 금실로 수놓은 하얀색 벨벳 의자에 앉았다. 교황은 마차 안에서 연도의 많은 사람에게 축복을 내렸고, 신도들은 교황에게 고개를 숙여 깊은 신심을 보였다. 교황은 대성당에 도착하자마자 대제단에 설치된 의자로 걸어가 엉덩이를 걸쳤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행렬은 교황이 대성당에 도착하고 1시간 뒤인 10시쯤 튈르리 궁전에서 출발했다. 행렬은 말 152마리가 이끄는 마치 25대와 기병 여섯 연대로 이뤄졌다. 나폴레옹, 조제핀 부부의 마차는 행렬 가운데에서 움직였다. 나폴레옹은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스페인풍의 보라색 벨벳 옷을 입었고, 조제핀은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망토와 하얀색 드레스를 입었다. 황제 부부가 출발했다는 소식은 축포를 통해 온 파리에 알려졌다. 


황제 부부의 행렬을 지키는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제복을 입은 군인 8만여 명이 튈르리 궁전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도로 양편에 세 줄로 서서 구경꾼의 무단 접근을 막았다. 그런데도 사람이 너무 많이 몰린 탓에 가는 도중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져 행렬은 수차례 멈춰야 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노트르담 대성당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관식용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두 사람이 대성당에 입장한 것은 낮 12시 15분이었다. 그들이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 신도석을 포함한 대성당은 축하객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두 사람이 등장하자 대성당에서는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황제 폐하 만세!”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조제핀의 시누이 4명은 올케의 망토 자락을 들어 옮겼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은 대제단으로 올라갔다. 


대관식은 합창단이 찬송가 ‘어서 오라, 창조주의 성령이여!’를 합창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합창에 이어 사제들이 ‘하느님, 성령을 보내소서’라는 교독문 등을 낭독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교황이 황제 부부에게 도유하는 순서가 잇따랐다. 샤를마뉴의 아버지 페팽이 751년 대관식에서 처음 도유를 한 이후 프랑스 대관식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신의 축복을 상징하는 순서는 관을 머리에 얹는 대관이 아니라 성유를 바르는 도유였다. 교황은 두 사람의 머리와 두 손에 차례로 기름을 발랐다. 


나폴레옹은 황제 대관식을 과거 프랑스 국왕 대관식과 다르게 거행했다. 과거의 전통에 그가 원한 새로운 내용을 덧붙였던 것이었다. 먼저 역대 프랑스 국왕뿐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에서 국왕 부부의 공동 대관식이 거행될 때에는 국왕이 먼저 도유, 대관을 하면 와이는 나중에 간단하게 도유, 대관하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나폴레옹 부부의 경우 두 사람이 차례로 도유, 대관했다. 


과거 국왕과는 달리 황제는 대관식 내내 어느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것도 나폴레옹의 요구에 따른 새 절차였다. 교황은 그의 요구가 못마땅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새 절차의 하이라이트는 대관이었다. 역대 대관식에서는 교황이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줬지만 나폴레옹은 왕관을 직접 자신의 머리에 얹었다. 그는 하느님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그리고 국민의 동의를 통해 황제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직접 왕관을 쓴 것이었다. 그는 조제핀에게도 자신의 머리에서 벗긴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일부에서는 나폴레옹이 왕관을 씌워주려는 교황의 손에서 왕관을 빼앗았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역사학자는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미리 “왕관은 내 손으로 직접 쓰겠다”고 말해 동의를 구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서 왕관을 두 번 썼다. 첫 번째는 로마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황금색 월계관이었고, 두 번째는 샤를마뉴가 사용했던 왕관을 복제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 보관된 진짜 샤를마뉴 왕관을 착용하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가 반대하는 바람에 대관식에 가져올 수 없었다. 


대관 순서가 끝나자 교황은 황제의 빰에 입을 맞추고 라틴어로 “황제 만세”를 선언했다. 교황의 선언이 끝나자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했고 각종 선물을 바치는 순서가 이어졌다. 음악 연주가 끝나자 나폴레옹은 금실로 수놓은 장갑 하나를 벗어 손을 성경에 올린 뒤 프랑스의 새 지도자가 되겠다는 엄숙한 선서를 했다.


대관식을 마친 나폴레옹과 조제핀이 이미 어둑해진 오후 5시 무렵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와 튈르리 궁전으로 돌아갈 때 연도에 늘어선 프랑스 국민들은 횃불과 촛불을 들고 황제의 귀가를 축하했다. 


대관식이 열린 날 파리에는 프랑스 전국에서 국민 200만 명이 몰린 것으로 추정된다. 대관식에 이어 파리에서는 2주일 동안 각종 축하행사가 이어졌다. 각 성당에서는 매일 축하 종을 울렸고, 곳곳에서는 불꽃축제가 펼쳐졌다. 공식 무도회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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