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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Apr 11. 2024

로베르 2세의 세 부인과 시테 궁전


1.


998년 초 봄 프랑스 파리 인근 뱅센 왕궁의 국왕 접견실에는 싸늘한 바람만 감돌았다. 국왕 로베르 2세의 얼굴은 침통했고, 그의 두 번째 부인 베르트는 남편의 가슴에 파묻혀 통곡했다. 


두 사람 앞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5세가 보낸 사제단이 서 있었다. 맨 앞에는 주교가, 뒤에는 다른 사제 12명이 자리를 잡았다. 국왕 부부와 사제단 말고는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상은 물론 시종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교는 가방에서 종을 꺼내 옆에 내려놓고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 초가 꽂힌 촛대 여러 개를 꺼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제각각 불을 밝혔다. 모든 절차를 마친 주교는 두루마리를 풀어 추상같은 목소리로 낭독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부, 성자, 성신, 성 베드로, 그리고 열두 사도와 모든 성인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이르노니, 우리는 로베르와 모든 동조자, 교사자에게서 성탄식의 권리를 박탈하노라. 로베르를 모든 기독교 사회에서 추방하고, 하늘과 땅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의 품에서 내쫓노라. 우리는 로베르에게 파문과 저주를 선언하노라. 로베르가 참회하고 속죄해서 악마의 족쇄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를 악마가 다스리는 불지옥에 보내기로 판결하노라.” 


주교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뒤에 선 열두 사제가 큰소리로 삼창했다.


“그렇게 됨을 알겠습니다. 그렇게 됨을 알겠습니다. 그렇게 됨을 알겠습니다.”


열두 사제의 삼창이 끝나자 주교는 종을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를 낸 다음 펼친 성경을 접고 일부 사제와 함께 촛불을 끄고 발로 걷어차 촛대를 넘어뜨렸다. 촛불이 완전히 꺼진 걸 확인한 주교와 열두 사제는 국왕 부부에게 말을 붙이기는커녕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권좌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로베르 2세는 꽁꽁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귀에는 교황청에서 온 주교가 조금 전 추상같은 목소리로 쏟아낸 저주가 계속 맴돌았다.


“당신은 이제 파문이오.”


교황청에서 파견된 주교와 열두 사제가 거행한 의식은 교회법에서 정한 근친상간을 이유로 로베르 2세를 파문하는 절차였다. 그가 파문을 당한 것은 결혼 때문이었다.


로베르 2세는 열여섯 살이던 988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정치적 이유 때문에 서른여덟 살이던 아르눌프 2세의 전 부인 로잘라와 결혼했다. 그는 스물두 살이나 많은 아내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영토 덕분에 제법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부부는 결혼하고 4년이 지나도록 아기를 가지지 못했고, 로베르 2세의 요구에 따라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교회법에서 허용하는 이혼 사유였다.


이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던 로베르 2세는 스물네 살이던 994년 블루아의 오도 백작과 전쟁하러 나섰다가 그의 부인인 부르군디의 베르트를 만나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여덟 살이나 많은 여인이었지만 스무 살 연상의 부인과도 살아본 그에게는 아무런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로베르 2세는 2년 뒤 오도 백작이 세상을 떠나자 베르트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서로 사랑하는 데다 베르트가 처음 결혼할 때 아버지에게서 지참금으로 받은 땅과 세상을 떠난 남편이 다스리던 땅까지 합치면 꽤 넓어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로베르 2세와 베르트의 결혼에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있었다. 로베르 2세의 할머니 헤드비그와 베르트의 할머니 게르베르가는 친자매여서 두 사람은 6촌인 재종 사이였다. 게다가 로베르 2세는 베르트 아들의 대부였다. 6촌 사이의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교회법에 따르면 애당초 결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베르 2세는 정치적으로 측근인 투르 대주교를 설득해 결혼식을 올리기는 했지만,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황 그레고리오 5세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다. 로베르 2세로서는 안타깝게도 그는 라임 대성당 대주교 임명권을 놓고 그레고리오 5세와 맞선 일이 있어 교황과의 사이는 이미 매우 나빠진 터였다.


로베르 2세는 그레고리오 5세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혼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따르지 않았다. 결국 그의 결혼 문제는 로마와 파비아에서 두 차례 열린 공의회에서 안건으로 다뤄졌고, 이혼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교황이 보낸 사제단이 파리로 로베르 2세를 찾아가 파문 선언 절차를 진행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2.


로베르 2세는 베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영토가 지참금으로 딸려오지 않더라도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오도 2세를 마치 친아들처럼 아낀 것도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이유였다.


로베르 2세의 뜨거운 사랑은 교황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그는 교황의 파문 선언에도 베르트와 이혼하지 않았고 프랑스에서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맞서려 했다. 그러자 교황은 로베르 2세를 넘어 프랑스 전국에 성사 금지령을 내려 성당 미사를 금지시켰고, 누구도 성당에서 결혼하거나 유아세례를 받거나 성당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여론은 국왕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심지어 왕을 모시는 시종, 시녀까지 달아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폭동이 일어나 왕궁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결국 두 사람에게는 서로만 남은 셈이 돼 버렸다. 두 사람을 파문한 그레고리오 5세가 별세하고 로베르 2세의 스승이었던 오리악의 제베르가 교황 자리에 올라 실베스테르 2세가 됐지만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로베르 2세는 결국 2년 뒤 굴복하고 말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교황에게 항복한 이유는 파문이 아니라 아들이었다. 후계자가 될 아들을 절실히 기다리던 그는 첫 아내 로잘라에 이어 베르트마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들만 낳으면 대를 이을 수 있는 데다 악화된 백성의 여론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실망감에 시달리다 결국 이혼을 선택했다.


로베르 2세는 1001년 9월 교황에게 사람을 보내 베르트와 이혼하겠다고 밝혔다. 이혼한다고 해서 그의 파문이 바로 철회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혼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과 교황청의 뜻을 어긴 것에 대해 참회하고 속죄하는지 확인돼야 파문의 효력은 사라질 수 있었다. 교황청에서 그레고리오 5세를 모셨던 추기경들은 로베르 2세를 괘심하게 여기던 터여서 파문 철회에 반대했지만, 실베스테르 2세는 그들의 뜻을 뿌리치고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이끌었던 제자에게 다시 한 번 교회로 돌아올 기회를 주었다. 


파문 파동에서 벗어난 로베르 2세에게 필요한 것은 아들을 낳아줄 재혼이었다. 그가 고른 여성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던 아를의 콩스탕스였다. 로베르 2세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녀는 이탈리아 및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을 다스린 윌리엄 백작의 장녀였다.


콩스탕스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어둡고 차분한 프랑스 궁정의 분위기와는 달리 남부 출신답게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기질을 가졌던 여성이었다. 남자는 물론 남편에게 지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성격도 적극적이었다. 


아버지가 프로방스에서 사라센을 완전히 몰아낸 덕분에 엄청난 영토를 확보해 아주 부유해서 콩스탕스는 어릴 때부터 화려한 저택에서 우아하게 사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로베르 2세가 사는 파리로 간 그녀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국왕의 부인이 되면 환상적인 왕궁에서 살 줄 알았는데, 파리의 궁전은 프로방스의 몰락한 귀족 저택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미모와 빼어난 화술, 사교적인 성격으로 남편을 완벽하게 손아귀에 사로잡은 그녀는 파리에 새 궁전을 짓자고 졸랐다.


사실 로베르 2세 이전까지만 해도 메로빙거, 카롤링거 왕조의 역대 국왕은 물론이거니와 카페 왕조를 세우고 파리를 수도로 삼은 로베르 2세의 아버지 위그 카페조차 파리에서 그다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뱅센, 콩피에뉴, 오를레앙에 있던 궁전을 돌아다니며 지냈다. 파리는 왕들에게 중요한 여러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다.


반면 로베르 2세는 수도가 된 파리에 완전히 눌러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역대 어떤 왕보다 파리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콩스탕스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파리에 왕의 권한에 어울리는 궁전을 건설할 필요성을 짙게 느끼던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콩스탕스가 밤낮없이 졸라대자 그는 파리에 새 궁전을 짓기로 결심했다. 


로베르 2세가 선택한 곳은 그의 아버지는 물론 역대 국왕이 파리에 갈 때면 늘 머물던 시테 섬이었다. 이곳에는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건물이 적지 않았다. 섬의 동쪽에는 신전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자리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건설됐다. 


팔라티움으로 불린 서쪽에는 높은 성채 안에 총독이 거처하던 저택과 재판소가 있었다. ‘배교자’로 불렸던 율리아누스가 동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로마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갈리아에서 게르만족과 싸울 때 관사로 사용했던 곳이 바로 여기였다.


프랑스 최초의 메로빙거 왕조를 창건한 클로비스 1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3년간 거처한 것을 포함해 역대 국왕이 파리에 잠시 머물 때 처소로 사용한 곳은 바로 이 총독 저택이었다. 위그 카페도 성벽을 대폭 보강한 뒤 파리에 머물 때에는 언제나 총독 저택에 짐을 풀었다. 


로베르 2세도 아버지를 따라다닌 덕에 총독 저택에 자주 갔다. 그래서 이곳의 위치와 장단점을 잘 알았고 주변 분위기에도 매우 익숙했다. 그는 총독 저택을 대규모로 확충해 궁전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를 모신 사제이자 역사학자였던 헬고드는 ‘위그 카페의 아들 로베르 2세는 재임 후반기에 정말 눈부신 궁전을 파리에 짓는 일에 착수했다’고 기록했다.


로베르 2세는 먼저 가로 130m, 세로 110m 규모로 성벽을 쌓거나 보강하고 탑 형식으로 문도 여러 개 달았다. 왕이나 왕비가 거처하는 방이나 접견실 등은 센강이 보이는 방향에 배치했다. 귀족과 지역 영주의 모임을 갖는 회의장은 따로 만들었다. 마지막에는 성 니콜라스에게 바치는 예배당을 건설했다. 


콩스탕스는 남편이 궁전을 쌓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여성은 아니었다. 그녀는 직접 궁전 건설 현장에 나가 건축가와 일꾼들에게 일일이 지시하며 자신이 파리에 머물 때 지낼 집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같은 증축 공사를 통해 고대 로마의 낡은 성채로 둘러싸인 작은 저택은 직사각형 궁전으로 탈바꿈했다. 궁전이 시테 섬에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곳을 ‘팔레 드 라 시테’, 즉 시테 궁전이라고 불렀다.


이후 로베르 2세의 아들, 손자, 증손자가 시테 궁전을 연거푸 증축하거나 개축했고, 고손자였던 필립 오귀스트는 시테 궁전의 운영을 체계화하는 동시에 왕립 도서관과 금고를 설치했다. 그는 또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던 궁전 주변 도로를 파리에서는 최초로 돌로 포장했다. 이때부터 파리는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됐고 시테 궁전은 파리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3.


오늘날 시테 섬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등지고 2~3분 정도 걸어가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세 건물이 나타난다. 팔레 드 쥐스티스, 콩시에르주리 그리고 생트 샤펠 성당이다. 서로 나란히 선 이 세 건물이 바로 옛날 로베르 2세가 아내를 달래기 위해 만든 시테 궁전이다. 


가운데 건물은 과거에는 프랑스 귀족, 영주가 모여 회의하던 공간이었고 지금은 프랑스 대법원인 팔레 드 쥐스티스다. 이곳이 프랑스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은 프랑스대혁명 때였다. 이곳에 혁명법원이 설치됐기 때문이었다. 루이 16세의 왕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 머리를 집어넣어야 했다. 


1850년대 나폴레옹 3세의 지시를 받아 도시개혁을 진행한 파리 시장 오스만은 팔레 드 쥐스티스를 둘러싼 옛 건물을 모두 부수고 정원도 없애버렸다. 새로운 법원 건물을 짓는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지금 팔레 드 쥐스티스는 과거 시테 궁전일 때의 모습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센강을 바라보는 건물은 콩시에르주리인데, 과거 시테 궁전의 주거 공간이었다. 이 건물에 ‘집사’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것은 필립 오귀스트 때문이었다. 그는 외국에 전쟁을 하러 떠나면서 궁전 행정을 총괄 책임지는 ‘콩시에르주리’라는 관직을 신설했는데, 이 관직명이 나중에 궁전 이름으로 정착돼 오늘날에 이르렀다. 


콩시에르주리는 1367년 샤를 5세가 파리 시민의 폭동인 ‘자크리의 난’을 피해 시테 궁전을 떠난 뒤에는 행정 기관으로 변신했다. 1391년에는 감옥으로 용도가 바뀌어 잡범과 정치범을 수감했다.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단두대에 끌려갈 사람들을 가둬두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곳에는 많을 때에는 남녀 통틀어 1200여 명이 한꺼번에 갇혔다. 이곳에 억류됐다가 콩코르드 광장으로 끌려가 단두대에 목이 잘린 사람은 모두 2600여 명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죄수번호 280번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였다.


맨 왼쪽 건물은 생트 샤펠 성당이다. 이곳은 ‘성 루이’로 알려진 국왕 루이 9세가 라틴제국 황제에게서 사들인 성 십자가 조각과 가시관 등 30여 점에 이르는 성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7년간 공사한 끝에 1248년 4월 완성한 건물이다. 파리에서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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