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4년 가을이었다. 런던 날씨가 늘 그렇듯이 아침부터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끼었다. 정오가 다 됐을 무렵 잠시 맑아지는가 싶었지만 다시 흐려졌다.
한 사내가 잰걸음으로 국왕 찰스 2세가 사는 런던 시내의 화이트홀 궁전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걸로 봐서는 국왕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입구에서 기다리던 시종의 안내를 받아 국왕의 접견실로 서둘러 갔다.
“어서 오시오, 플림스티드 경. 천문대 일로 바쁘실 텐데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찰스 2세는 벌써 그곳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주변에는 신하들과 정치적 영향력이 큰 귀족 여러 명이 앉았다. 나라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플림스티드라고 불린 사내는 허리를 굽혀 국왕에게 인사를 했다.
“전하, 런던 타워에서 까마귀들을 몰아내 주십시오. 까마귀들 때문에 천문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시로 날아다니며 너무 시끄럽게 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천문망원경에 앉아 똥을 사거 망원경 유리를 부리로 긁는 바람에 천문활동에 지장이 많습니다. 이러다가는 비싼 장비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당시 런던 타워에는 유명한 궁정 천문학자들이 모여 천문학을 연구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별을 보기에 편했기 때문이었다. 플림스티드도 그중 한 명이었다.
문제는 까마귀였다. 영국에는 오랜 옛날부터 까마귀들이 많이 살았다. 런던 타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언제부터 까마귀들이 들어와 살게 됐는지 시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까마귀들이 너무 많다 보니 런던 타워에서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의 활동을 방해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찰스 2세도 까마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플림스티드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신하들과 귀족들을 죽 둘러보았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때 한 귀족이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전하, 런던 타워에서 까마귀가 사라지면 영국 왕실은 몰락하고 영국은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단순히 전설이긴 하지만 전하께서 과연 이를 무시하고 까마귀를 쫓아낼 수 있으시겠습니까?”
“짐도 들어보기는 했지만,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있다오.”
“먼 옛날 이 땅을 다스렸던 브란 더 블레스드(자비로운 브란) 국왕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 ‘하얀 언덕’에 묻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얀 언덕에 올라가면 멀리 도버해협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얀 언덕에 묻혔다가 프랑스 등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면 까마귀가 돼 환생해 영국을 지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묻힌 하얀 언덕이 바로 지금의 런던 타워 자리입니다. ‘브란’이라는 이름은 웨일스 사람들의 말인데 ‘까마귀’라는 뜻입니다. 이후 런던 타워에는 까마귀가 살게 됐고, 까마귀를 둘러싼 전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신하로부터 런던 타워에 사는 까마귀의 내력을 들은 찰스 2세는 까마귀를 내쫓을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비록 전설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괜히 쓸데없는 일을 해서 그의 마음도 불편해지고 백성 여론도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소. 런던 타워에 사는 까마귀들을 그대로 두도록 하시오. 앞으로는 까마귀를 돌보는 인력을 배치해 까마귀를 보살피고 먹이를 주는 일을 맡기도록 하시오.”
그때 눈치를 보던 플림스티드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을 꺼냈다.
“전하, 그럼 천문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왕립천문대를 새로 지을 생각을 갖고 있었소. 이 기회에 그리니치에 건물을 새로 지어 왕립천문대를 설립하도록 하겠소. 앞으로 영국 천문의 중심지는 그리니치가 될 것이오.”
국왕의 지시에 따라 그리니치의 왕립천문대 공사는 이듬해 8월 시작돼 1년만인 1876년 마무리됐다. 왕립천문대 초대 소장으로는 당연히 프림스티드가 앉았다.
찰스 2세의 지시에 따라 런던 타워에서는 까마귀들을 보호하고 사육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돼 시행됐다. 런던 타워의 까마귀들은 레이븐 마스터, 다른 말로 ‘여맨 가드’ 또는 ‘비프 이터’라고 하는 까마귀 조련사들의 보호를 받게 됐다.
영국이 건재하고 왕실이 무사하기 위해 필요한 까마귀는 여섯 마리다. 현재 런던 타워에 사는 까마귀는 모두 일곱 마리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예비로 한 마리를 더 키우기 때문이다. 일곱 까마귀에게는 각각 이름이 있다. 주빌리, 해리스, 그립, 로키, 에린, 포피, 멀리나이다. 까마귀들은 ‘가디언스 오브 타워’, 특 ‘타워의 수호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런던 타워 측은 까마귀들이 날아가지 못하게 날개를 짧게 깎는다. 레이븐 마스터가 주기적으로 까마귀들의 날개를 정리한다. 과거 일부 까마귀들이 런던 타워에서 달아나 사라지거나 며칠 뒤 돌아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마귀들은 낮에는 조련사와 함께 밖에서 생활하다 해가 지면 웨이크필드 타워 근처에 있는 숙소로 돌아간다. 까마귀들은 주로 고기를 먹는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까마귀들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먹이를 주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가끔 레이븐 마스터들이 런던 여행을 온 사람들에게 먹이주기 시범을 하는 경우는 있다.
전설에 따라 영국을 지키고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 사육되는 런던 타워의 까마귀들은 지금은 런던 여행을 온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관광자원이 됐다. 런던 여행을 가서 런던 타워를 방문해 기념품 가게에 가면 까마귀 관련 제품을 무척 많이 볼 수 있다. 사소한 스토리 하나도 소중히 간직해서 보호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내는 영국 사람들의 능력에 경탄을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