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군 교수대와 사라진 성배

by leo


1.


“삐거덕, 삐거덕, 덜컹, 덜컹.”


1437년 9월 초였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서는 며칠 동안 수레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레를 끌고 다니는 소나 말이 퍼질러 놓은 똥이 얼마나 많았던지 악취가 광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나마 늦은 밤에는 소음이 잦아들어 인근 주민의 깊은 잠을 방해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곳곳에서 달려온 수레가 멈춘 곳은 언제나 똑같은 장소였다. 블타바강 동쪽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고 평가받는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앞이었다.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수레가 교회 앞에 멈추면 교회에서 일꾼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이 수레에서 내린 것은 산에서 벌목해 제재소에서 가공을 거친 건축용 목재였다. 십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일꾼들에게 거칠게 지시했다.


“지난번에 나무를 서둘러 내리다 부러진 적이 있어. 목재 하나의 가격이 얼마인지 잘 알지? 다들 조심해. 만약 이번에도 나무를 부러뜨리면 임금에서 깎을 테니 그렇게 알도록 해.”


십장의 성격이 얼마나 직설적이고 거친지를 잘 아는 일꾼들은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목재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나무를 부러뜨리지 않고 잘 다뤄야 다음 일을 하는 데에도 편하기 때문에 십장이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목재 수집은 언제쯤 끝날까?”


십장의 등 뒤에서 아주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얀 로키찬 대주교가 틴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걸어 나왔다. 십장은 허리를 굽신하며 대답했다.


“오늘 오후에 북부에서 신도들이 보낸 목재 수레 스무 대가 더 오기로 돼 있습니다. 그것만 도착하면 목재 수집은 다 끝납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지붕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겠군.”


“완벽한 설계도가 있으니 곧바로 목재로 지붕 지지대를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착공만 하면 다 짓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전국의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목재를 보내준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어. 공사가 끝나면 틴 성모 마리아 교회는 칼리스니체 신도들에게 영혼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걸세. 자네 이름도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되고. 나는 자네만 믿네.”


얀 로키찬 대주교는 밝게 웃으며 십장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십장도 흐뭇한 표정으로 교회 출입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우당탕탕! 덜커덩!”


다음날 아침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인근에 있는 얀 로키찬 대주교의 사택은 시끌벅적했다. 누군가 허겁지겁하며 2층에 마련된 대주교의 방으로 달려갔다. 전날 수레에서 목재 하역 작업을 총괄하던 십장이었다.


“대주교님, 큰일 났습니다.”


얼마나 큰일이 벌어진 것인지 십장은 대주교의 방문을 쾅쾅 두들겼다. 대주교가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걸 잘 알면서도 조심성 없이 서두르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주교의 방문이 삐걱 열렸다.


“무슨 일인가? 아침부터.”

“화…황제가, 모…목재를 모두 빼앗아 간답니다.”

“목재를? 그게 무슨 말인가?”


대주교는 십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황제는 후스 전쟁 이후 권좌에 오른 지크문트 황제를 뜻하는 것이었다. 후스파의 칼리스니체와 합의를 거쳐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얀 로키찬 대주교는 간단히 옷을 챙겨 입고 목재를 쌓아놓은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앞으로 달려갔다. 황제가 보낸 병사들이 목재 주변을 에워싸고, 그 사이로 낯선 인부들이 수레에 목재를 실어 천문시계가 있는 시청사 앞의 광장 구석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얀 로키찬 대주교는 병사들을 이끌고 온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항의했다. 그는 민망한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황제께서 목재를 저곳으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모은 목재를 왜 가져간단 말인가?”


대장은 대주교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어서 말해 보게.”


“며칠 전에 타보리테 잔당을 소탕했습니다. 타보리테 두목인 얀 로하츠를 포함해 일당을 모두 생포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들을 교수형에 처하기로 했답니다.”

“타보리테를 소탕했다고?”


얀 로키찬 대주교의 가슴 한쪽이 아련하게 쓰렸다. 타보리테는 후스 전쟁(1419~1434)에서 칼리스니체와 힘을 합쳐 가톨릭에 맞서 싸운 후스파의 한 무리였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항복하지 않고 3년여 동안 계속 게릴라전을 벌였다. 대주교는 정신을 퍼뜩 차려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것과 교회를 지을 목재와 무슨 관련이 있지?”


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잔당을 처형할 교수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목재를 곧바로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틴 성모 마리아 교회를 지을 목재가 쌓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황제께서는 이 목재를 가져가서 교수대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얀 로키찬 대주교는 그제야 대충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점은 남아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처형하기에 이 많은 목재를 다 가져가려는 건가? 교수대 하나만 있어도 서너 명을 처형하는 데 1시간도 걸리지 않을 텐데….”

“황제께서 사형시키라고 하신 반군은 얀 로하츠 외에 부하 49명입니다. 다 합쳐서 50명입니다. 한 명씩 죽이면 극적 효과가 떨어지니 50명을 한꺼번에 다 처형하라는 게 황제의 명령입니다. 교수대 50개를 만들어 함께 죽이라는 겁니다. 그럼 훨씬 끔찍하게 보일 것이고, 프라하 시민들이 황제를 더 무서워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얀 로키찬 대주교는 치를 떨었다. 황제가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지를 다 알게 됐다. 황제는 틴 성모 마리아 교회가 칼리스니체의 본거지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전국에서 신도들이 보낸 목재로 지붕 공사를 마무리하면 교회가 완성된다는 것도 분명히 알 것이었다. 그런데도 교회를 지을 목재를 빼앗아 후스파의 다른 분파 지도자를 처형하기로 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대주교의 머리가 복잡해졌을 때 시청사 쪽에서 얼굴이 노래진 사제 한 명이 달려왔다.


“대주교님, 정말 끔찍합니다.”


얀 로키찬 대주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얀 로하츠가 붙잡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얀 로키찬 대주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는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황제가 로하츠를 시청사 지하의 고문실로 끌고 가 고문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손톱을 뽑고 눈알을 후벼내고 심지어 내장을 모두 뜯어냈답니다.”


얀 로키찬 대주교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오후에 처형시킨다고 하면서 죽이기 전에 굳이 그렇게 고통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황제에게 항의하기 위해 시청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시청사 앞에는 많은 시민이 모여 고함을 치는 중이었다. 대부분 칼리스니체 후스파 신도였지만 가톨릭 신도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도 대주교와 다르지 않았다. 얀 로하츠를 처형하는 것은 황제의 권리이니 그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지만 고문은 다른 일이었다. 얀 로키찬 대주교는 시민들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얀 로하츠는 우리와 신념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됐든 같은 후스파 신도입니다. 지금 황제가 로하츠와 동료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뒤에는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할 거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찌 이리 잔혹할 수 있습니까? 설상가상으로 황제는 칼리스니체의 성지인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지붕 지지대 제작에 사용할 목재를 빼돌려 교수대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는 후스파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얀 로키찬 대주교가 황제의 속셈을 설명하자 시청사 앞에 모인 신도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들은 시청사를 향해 돌을 집어던지며 야유를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끝내 고집을 부려 틴 성모 마리아 교회의 목재로 교수대를 만들어 그날 오후에 사형을 집행했다. 결국 교회 공사는 진행되지 못했고, 교회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미완성인 채로 남겨졌다.



2.


틴 성모 마리아 교회는 후스 전쟁과 백산전투(1620년)를 포함해 15~17세기 이후 체코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건축물이다. 틴 교회는 처음에는 가톨릭 교회였다가 나중에는 후스파의 거점으로 바뀌었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가톨릭에게 돌아갔다. 이 사실만으로도 틴 교회가 얼마나 많은 역사의 부침을 경험했으며 체코 역사는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알 수 있다.


틴 교회는 원래 11세기 초 운겔트에 장사를 하러 온 외국 상인들을 위해 만든 ‘병원 교회’였다. 이때는 가톨릭 교회였다. 13세기 그 자리에 새 교회가 생겼고 14세기에는 더 큰 규모로 새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틴 교회가 후스 전쟁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것은 후스 전쟁이 터진 직후의 일이었다.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활동하던 후스파가 가톨릭에게서 틴 교회를 빼앗은 것이었다. 아직 공사 중이기는 했지만 프라하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어 여러 모로 편했기 때문이었다.


후스파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귀족, 사제로 구성된 ‘칼리스니체(또는 우트락비스테)’ 그리고 주로 농민으로 이뤄진 ‘타보리테’로 나뉘어 있었다. 칼리스니체는 라틴어로 ‘성배’라는 뜻이었다. 성배는 온건파의 상징이었다.


두 파는 후스 전쟁 중반부터 분열했다. 근본적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칼리스니체의 귀족과 사제는 기득권 세력이었다. 이들이 얀 후스의 가르침 중에서 주목했던 것은 종교 개혁, 외세 배격, 민족주의였다. 반면 타보리테의 농민들은 빈곤 타파, 사회 개혁을 꿈꾸었다. 언젠가는 두 파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은 이런 점을 간파해 후스파를 이간시킬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들은 1432년 1월에 열린 바젤 공의회에 보헤미아 특사를 초청했다. 협상은 쉽지 않았지만 연이은 대화 끝에 이듬해 11월 후스파 온건세력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강경파인 타보리테는 협상안을 거부했다. 칼리스니체는 결국 타보리테를 버리고 가톨릭과 손을 잡았다. 양측의 마지막 전투는 1434년 5월 30일 프라하 동쪽 40km 지점에 있는 리파니에서 벌어졌다. 이날 전투에서 칼리스니체, 가톨릭 연합군은 타보리테를 대파했다. 이 한판으로 15년간 끌었던 전쟁은 막을 내렸다.


칼리스니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지크문트에게 비어 있던 보헤미아의 왕 자리를 넘겨주고, 가톨릭의 권위를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후스파의 예배를 거행할 수 있다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강제로 빼앗았던 틴 교회의 소유권을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것도 이때였다.


후스 전쟁이 끝났지만 틴 교회 건설 공사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후스파는 전쟁을 끝내면 지붕부터 얹을 예정이었다. 지붕 공사에 필요한 지지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목재가 필요했다. 후스파는 전국의 신도로부터 목재를 기증받았다. 이 목재를 지크문트가 빼앗아 교수대 제작에 사용해 버린 것이었다.


틴 교회의 지지대는 20년 후에야 만들 수 있었다. 엉뚱하게도 왕 자리에 앉을 예정이었던 라디슬라프 공작과 프랑스 공주 막달레나의 결혼식 연단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기로 했던 나무가 투입됐다. 라디슬라프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결혼식이 취소돼 나무를 쓸 데가 없어졌다.


라디슬라프 대신 국왕 자리에 오른 포데브라디의 이르지(재임 1420~71년)는 이 나무를 틴 교회 공사에 투입해 교회를 최종적으로 완성했다. 그는 또 교회의 두 첨탑 사이 박공에 황금으로 도금한 거대한 성배를 만들어 달았다. 이곳이 후스파의 성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틴 성모 마리아 교회는 이후 200년 가까이 후스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된 1620년 백산전투에서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가톨릭 연합군에게 패하기 전까지였다.


백산전투 패배 때문에 체코의 운명은 바뀌어 버렸다. 체코는 자치권을 잃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완전히 복속됐고, 다시 가톨릭 국가로 변해 버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모든 프로테스탄트에게 사흘 내에 보헤미아를 떠나든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명령했다. 대부분 프로테스탄트는 떠나는 걸 선택했다. 이 탓에 체코 인구는 대폭 줄었고 전통 귀족은 완전히 몰락했으며 체코어도 퇴색했다. 대신 독일어를 사용하는 귀족과 독일인이 득세했다. 체코인은 17~18세기를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틴 교회 종탑 사이에 설치돼 있던 황금 성배를 뜯어냈다. 황금으로 만든 후스파의 다른 상징물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은 성배 등을 녹여 성모 마리아 등 가톨릭 상징물을 만들었다. 지금 틴 교회 종탑 사이 박공에는 황금색 성모 마리아 부조가 붙어 있다. 400년 전 후스파의 황금 성배를 녹인 금으로 만든 것이다.


사라졌던 성배는 400년이 흐른 2017년에야 다시 교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톨릭이 종교의 화합을 상징하는 의미로 성배를 만들어 교회에 설치한 것이었다. 물론 원래 모양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성배의 원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하는 그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이 성배 제작에 참조한 것은 후세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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