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의 장례식과 카푸치너교회

by leo



과거 유럽에서는 어느 나라든 황제, 황후나 왕, 왕후의 장례식은 중요한 행사였다.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집안이었고 1438~174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독식했던 오스트리아제국 합스부르크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구성원이 세상을 떠나면 시신, 심장, 내장을 떼어내 따로 모셨다는 점이다. 시신은 방부 처리해 카푸치너키어셔(카푸치너교회)에 있는 카푸치너 그루프트(카푸친 묘지)에, 심장은 호프부르크왕궁 아우구스티너교회의 헤르츠 그루프트(심장 묘지)에 모셨다. 내장은 성슈테판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치했다. 그들은 왜 시신을 완전히 분해해서 제각각 안치했던 것일까?



1.


부활절이던 1633년 3월 15일 오전이었다. 화려한 마차 두 대가 오스트리아 빈의 케른트너 거리를 거쳐 카푸치너교회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는 14년 전인 1619년 봄에 세상을 떠난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티아스와 그보다 먼저 전년 겨울에 눈을 감은 황후 ‘티롤의 안나’의 시신을 실은 관이 실려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 세상을 떠나면 성슈테판대성당에 묻히는 게 관례였지만 마티아스는 평생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와 함께 다른 곳에 단 둘이만 묻히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내가 죽은 직후부터 부부 묘지를 짓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마티아스는 부부 묘지를 완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석 달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2세 황제는 선황의 유지를 지켜주기 위해 묘지 건설 공사를 계속 이어갔다. 30년 전쟁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는 바람에 새 묘지 축성식은 1632년 7월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마티아스 황제 부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이상이나 지난 1633년 부활절에 장례식을 거행하고 묘지에 묻히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새로 지은 묘지는 카푸치너 그루프트였고, 묘지가 조성된 곳은 카푸치너교회였다.


마티아스 황제 부부의 관을 실은 마차가 도착했는데도 카푸치너교회의 문은 굳게 닫혀 열릴 생각을 않았다. 황제의 마차에서 한 사내가 먼저 내렸다. 호프부르크왕궁의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은 왜 문을 안 여느냐고 힐난하는 대신 조용히 교회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은으로 만든 문고리를 잡고 문을 세 번 두들겼다.


카푸치너교회의 문 안쪽에는 교회를 관리하는 카푸치너수도회 소속 수도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시종장이 문을 두드리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대신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거기 누구신가요?”


시종장은 목을 가다듬은 뒤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마티아스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헝가리 국왕이며, 보헤미아‧달마티아‧슬라보니아‧갈리시아‧로도메리아 국왕이며, 일리리아 국왕입니다.(이하 생략)….”


시종장이 마차에 실린 관의 주인 이름과 작위를 한참이나 설명했지만 수도사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공손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시종장은 짜증내지 않고 문을 다시 두들겼다. 수도사도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거기 누구신가요?”

“저는 오토 대공입니다. 황제이며 왕입니다.”


수도사는 이번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 똑같은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시종장은 이번에도 화를 내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들겼다. 벌써 세 번째였다. 수도사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거기 누구신가요?”


시종장은 이번에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저는 마티아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죽어야 할 인간이며 하느님의 죄인입니다.”


그제야 수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살짝 열었다.


“들어오시오.”


시종장은 수도사가 살짝 개방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마차 주변에 섰던 귀족들에게 손짓을 했다. 귀족들은 마차 안에 실렸던 마티아스 황제 부부의 관을 차례로 꺼내 카푸치너교회 안으로 운반했다.


카푸치너교회 안에는 카푸치너수도회 수도사 수십 명이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양쪽으로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두 관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제단 앞에 놓이자 신부의 장례 연설이 이어졌다. 간단한 연설이 끝난 뒤 관은 지하묘지로 운반됐다. 빈 시내 곳곳에서는 대포 스물한 발이 발사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티아스 황제 부부는 원래 카푸치너 그루프트를 부부만의 묘지로 삼고 싶어 했지만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묻힌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매장지는 성슈테판대성당에서 카푸치너교회로 바꾸었다. 내장과 심장은 해체해 은 항아리에 담아 성슈테판대성당 지하묘지에 보내고, 시신은 카푸치너 그루프트에 묻었다.


마티아스 황제 부부 이후 카푸치너 그루프트에는 황제 12명, 황후 18명 외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공작, 공주 등 113명이 묻혔다. 17세기 ‘오스트리아의 여걸’로 불렸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 슈테판 황제는 공동묘지의 맨 위에 누웠다. 곁에는 19세기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씨씨’로 유명한 황후 엘리자베트 그리고 자살한 아들 루돌프의 관이 놓였다.



2.


빈이 서서히 더워지기 시작한 1654년 7월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20년간 재임한 페르디난트 3세는 큰아들의 침대 앞에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두 살도 아니고, 이제 스물두 살인 데다 그렇게 건강하던 아들이 갑자기 죽음을 앞두게 됐다니….


페르디난트 3세는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3세의 딸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고 2년 만에 첫 자식인 아들을 얻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페르디난트 4세였다. 신생아 사망률이 50%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어서 다들 그가 출생 초창기를 잘 넘길지 걱정했다.


페르디난트 4세는 모든 사람들의 우려를 딛고 어떤 아기보다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페르디난트 3세는 물론 그의 아버지이자 당시 황제이던 페르디난트 2세는 대를 이을 건강한 아들, 손자를 얻었다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기 바빴다.


페르디난트 4세가 태어나고 4년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페르디난트 3세는 아들이 열세 살일 때 보헤미아 국왕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듬해에는 헝가리 국왕은 물론 오스트리아 대공 자리도 물려주었다. 아들이 누구보다 건강해서 제위를 물려받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손자를 보기 위해 아들을 서둘러 결혼시키기로 했다. 며느리는 손위처남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그런데 결혼식을 두어 달 남겨두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페르디난트 4세가 급작스럽게 천연두에 걸린 것이었다. 시의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면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평소 종교적 신심이 독실했고 특히 성모 마리아에 집착했던 페르디난트 4세는 침대에 누워 죽어가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에게 간절한 유언을 남겼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내용이었다.


“아버지, 제가 죽으면 시신은 카푸치너 교회에 묻고, 내장은 성슈테판대성당에 보관해 주세요. 다만 심장은 따로 떼어내 아우구스티너키어셔(아우구스티너교회) 안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발밑에 안치해 주세요. 죽어서라도 성모 마리아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해주세요.”


아우구스티너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살던 호프부르크왕궁의 부속 교회였다. 1327년 프레데릭 공작이 아우구스티너수도회를 위해 건립한 곳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아들딸이 결혼할 때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곳에서 결혼식이 거행됐다.


페르디난트 4세는 1654년 7월 9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곧바로 아들의 시신을 해체해 내장과 심장을 떼어내고 나머지는 방부 처리했다. 시신은 특별 제작한 침대에 눕혀 오스트리아 국민이라면 누구나 조문할 수 있도록 했다. 떼어낸 심장은 은으로 만든 잔에 담아 침대 옆에 놓아두었다


페르디난트 4세의 심장은 다음날 오후 9시 아우구스티너교회로 이송됐고, 간단한 미사를 거쳐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로레타예배당에 안치됐다. 방부처리한 시신은 며칠간의 조문기간을 거쳐 카푸치너 그루프르트로 운구됐고, 마티아스 황제 부부와 똑같은 장례 절차를 치른 뒤 매장됐다. 내장은 같은 날 성슈테판대성당으로 옮겨져 간단한 미사를 거쳐 지하묘지에 안치됐다.


페르디난트 4세의 시신, 내장, 심장이 분리돼 제각각 묻히거나 보관된 이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의 선례를 따라 세상을 떠난 구성원의 시신, 내장, 심장을 떼어내 따로 묻는 관습을 정착시키게 됐다. 이때부터 시신은 카푸치너교회의 카푸치너 그루프트에, 심장은 아우구스티너교회의 로레토예배당에 있는 헤르츠 그루프트에, 내장은 성슈테판대성당 지하 공동묘지에 모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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